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오대십국)

구마라즙(鳩摩羅什) : 강제로 결혼당한 인도고승

중은우시 2008. 2. 19. 20:09

작자: 미상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아니하고,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은 고대 불교승려의 기본계율이다. 그런데, 어떤 고승은 어쩔 수 없는 압력으로 취처납기(娶妻納伎)를 한 바 있으니, 그 고승은 바로 구마라즙이다.

 

구마라즙(344-413, 산스크리트어로 Kumarajiva)은 인도인이고, 집안은 명문이며,대대로 재상을 지냈다. 부친인 구마라염(鳩摩羅炎)은 원래 재상의 지위를 승계할 수 있었지만, 홀연 출가하여, 파미르고원을 넘어 구차(龜玆)국으로 갔다. 구차국의 국왕인 백순(白純)은 그의 명성을 일찌기 들은 바 있어 국사(國師)로 삼는다. 그리고, 갓 스무살이 된 자기의 여동생인 기파(耆婆)을 그에게 시집보낸다. 오래지 않아, 구마라염과 구차국왕의 여동생간에 사랑의 결실이 태어나니, 그가 바로 구마라즙이다. 그는 진체(眞諦, 499-569), 현장(玄장, 602-664)와 함께 중국불교의 3대번역가로 불린다. 또 다른 의정(義淨, 700-711)을 포함하여 4대번역가중의 하나로 불리기도 한다.

 

구마라즙은 어려서부터 아주 총명하였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모친도 그를 임신하고 있을 때는 그로 인하여 지력이 비범했었다고 한다. 그는 7살이 되는 해에 모친과 함께 출가하여 승려가 된다. 구마라즙이 살았던 시대는 중국의 동진(東晋)시대인데, 그는 고생을 마다 않고, 동으로 불교를 전도하기 위하여 왔다. 불교를 중국에 소개하는데 큰 공헌을 세우게 되었으며, 중국불교역사상 손꼽히는 위대한 인물중의 하나가 되었다.

 

구마라즙은 비록 승려였지만, 두번의 결혼경력이 있다. 첫번째는 전진(前秦)에 있을 때이다. 전진의 장수인 여광(呂光)이 병사를 이끌고 구차국을 공격하여 무너뜨렸고, 당시 구차국에 있던 구마라즙은 포로로 붙잡혔다. 구마라즙은 당시 서역불교의 지도자였고 명성이 널리 알려져 있었으므로, 전진의 황제인 부견이 그를 아주 존경했다. 그리하여 구마라즙을 전진으로 모셔가고자 했다. 부견이 여광에게 구차국을 토벌하게 한 것은 실제로는 구마라즙을 데려가려는 뜻도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당시 구마라즙은 아직 나이가 젊었다. 여광은 구마라즙에게 구차국왕의 딸과 결혼하도록 강요했다. 구마라즙은 응하지 않았는데, 여광은 구마라즙에게 술을 취하게 먹인 후에, 그와 구차국왕의 딸을 한 방에 집어넣었고, 억지로 왕녀와 결합하게 하였다.

 

구마라즙의 두번째 결혼은 엄격하게 말하자면 결혼은 아니라, 동거였다. 구마라즙이 여광에게 포로로 잡힌 후 계속 여광의 통제하에 있었다. 나중에 여광이 후량(後凉)을 건국하면서 후량의 신하가 된다. 다시 후량이 멸명하자, 구마라즙은 후진(後秦)에 속하게 된다. 후진의 황제인 요흥(姚興)도 구마라즙을 오랫동안 흠모해 왔다. 그리하여 국사의 예로 그를 대했다. 하루는 구마라즙이 초당에서 경전을 강연하는데, 요흥과 대신 및 승려 천여명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사람들이 엄숙하게 강연을 들으려고 하는데, 구마라즙은 홀연 강연대에서 걸어내려와 요흥에게 말했다: "두 아이가 내 어깨에 서 있습니다. 그들을 없애려면 여인이 필요합니다" 그리하여 요흥은 궁녀 하나를 구마라즙에게 보냈다. 한번 관계를 해서 두 아들을 낳게 된다. 요흥은 구마라즙과 같이 총명하고 뛰어난 인물은 천하에 둘도 없다고 보고, 그의 후대를 두지 않으면 아깝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다시 구마라즙에게 기녀(伎女) 10명을 내린다. 그리고 승방에 머물지 못하게 하고 별도의 집을 지어준다. 이에 대하여 구마라즙은 거절하였지만, 요흥의 압력으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게 된다.

 

구마라즙의 첫번째 결혼은 그다지 나쁜 영향을 미치지 않았지만, 두번째 결혼은 달랐다. 승려들은 일년내내 금욕생활을 하고 있으며, 겉으로는 여색을 멀리하고 초연한 모습을 보였었지만, 내심으로 성에 대한 갈망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구마라즙에게 말못할 사정이 있다는 점은 보지 않고, 그에게는 처첩이 여럿 있다는 것만 보았다. 그리하여 하나둘 구마라즙을 따라하기 시작했다. 구마라즙의 주변에는 방종적인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다. 이런 상황이 나타난 것은 불교의 전파나 존재, 명성에 누를 끼치는 일이었다. 구마라즙은 그대로 두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해서 하나의 조치를 취한다.

 

하루는, 구마라즙이 승려들을 불러모았다. 그들의 앞에 바리때(鉢)을 놓았는데, 바리때에는 바늘(針)이 가득 담겨 있었다. "아무나 여자를 데리고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나처럼 이런 바늘을 모두 삼킬 수 있는 사람만이 가능하다" 그리고는 구마라즙은 침을 밥처럼 하나하나 입으로 넣어서 삼켜버렸다. 구마라즙의 이러한 기술은 탄침술(呑針術)이라고 하여 인도에서는 유명한 것이고, 그가 어렸을 때 구차국에서 배운 것이다. 침을 다 삼킨 후에 다시 모두 뽑아냈다. 승려들은 이런 술법을 본 적이 없었으므로, 구마라즙이 보통이 아니라고 감탄하면서, 다시는 그를 모방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구마라즙은 어쩔 수 없이 여러 기녀들과 함께 생활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