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논쟁/조조무덤논쟁

두 구의 여성유골은 조조무덤설의 가장 큰 헛점이다

중은우시 2010. 1. 5. 18:21

글: 왕효웅(王曉熊)

 

안양 "조조무덤"은 여러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일부 사람들은 왜 조조의 고향인 초현(縣) 혹은 허도(許都), 낙양(洛陽)이 아니냐고 말하기도 하고; 또 다른 일부 사람들은 '칠십이의총'중 하나가 아닌가 의심한다. 사실, 이것들은 모두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조조의 군대가 원씨의 정치중심인 업성(城)을 함락시킨 후, 이 성을 개인세력확대의 기지로 삼았다. 위나라가 처음 건립될 때의 국호도 업성이 옛날 진나라의 위국(魏國)에 속하는 땅이었기 때문에 정한 것이다. 조조는 위나라의 종묘사직을 업성에 건설했다. 고대 업성은 지금의 하북성 임장현 경내로 안양에 가깝다. 조조의 고릉이 안양 경내에 나타나는 것은 완전히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소위 '칠십이의총'은 후대에 만들어진 전설이고, 역사적으로는 아무런 근거도 없다.

 

일련의 "위무제상소용(魏武帝常所用)"이라는 글을 새긴 패가 나타나는 것은 위조의 가능성을 배제한다면, 글자의 사용법상 말이 된다. "상소용"의 "상(常)"은 '자주'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일찌기(嘗)'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위무왕'이라는 시호도 조조가 매장되기 전에 이미 정해진 것이다. <<삼국지. 무제기>>에 기록이 남아 있다. 이때 조비는 아직 한나라 황제로부터 선양을 받지 않은 상태이다. 조조가 '위무제'로 칭해진 것은 그가 매장된 1년후의 일이다. 패에 '격호(虎)"라는 글이 새겨진 것도 배송지의 <<무제기>> 주석중에 인용된 <<위서>>에 기록된 내용에 근접한다: "(조조는) 힘이 남다르고, 손으로 날아가는 새를 쏘았으며, 몸으로 맹수를 잡았다."

 

그러나, 이것들만으로는 묘주인이 조조라고 인정하기에 부족하다. 왜냐하면, 묘 안에서 나온 또 다른 중요한 출토물품이 '조조무덤'이라는 결론에 대하여 커다란 의문을 제기해주기 때문이다. 이 묘는 이미 여러번 도굴되었다. 그러나 묘주인의 유골은 그대로 남아 있다. 보도에 다르면, 묘주인 남성은 약 60세가량으로 추정되는데, 조조가 66세에 죽었다는 것과 비슷하게 맞아떨어진다. 그러나, 두 구의 여성해골은 연령이 하나는 사십여세, 하나는 이십여세로 추정된다고 한다. 고고학자인 유경주선생은 사십여세된 여성은 나중에 황태후가 된 변황후(卞皇后)라고 보았다: "변황후는 조조와 나이차이가 20살이다. 조조가 죽었을때 66세이니, 그녀는 40여세였다."

 

<<삼국지>>에 기록된 조조와 합장한 후비는 변씨 1사람이다. 태초4년(230년) 오월, 변씨가 죽었고, 7월, 고릉에 합장한다. 만일 안양의 묘가 과연 조조의 무덤이라면, 거기에 있는 여성의 해골은 당연히 1구이어야 하고 그것은 변황후의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뉴스보도에 따르면, 연령이 변황후와 전혀 맞지 않는다. 배송지가 주석으로 인용한 <<위서>>에는 "(변)황후는 한연희3년십이월 기사일에 제군 백정에서 태어났다" 이 해는 서기160년이다. <<후비전>>에는 변황후가 "나이 이십에, 태조는 초()에서 (변황)후를 첩으로 들였다. 변황후는 나중에 태조를 따라 낙양으로 간다. 그리고 동탁의 난에.."로 되어 있다. 변황후가 20살때라면 180년 전후이다. 이때 조조는 외지로 쫓겨나서 "돈구령(頓丘令)"을 지내고 있었다. 나중에 산동일대에서 제남상(濟南相) 및 동군태수(東郡太守)를 지낸다. 188년에야 낙양으로 들어가서, 서원팔교위를 맡는다. 동탁의 난은 그 다음 해에 일어난다. 이들 자료를 보면, 기본적으로 <<위서>>에 기록된 변태후의 출생년도는 믿을만하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계산하면 220년에 조조가 병사할 때, 변씨는 이미 60살이다. 조조보다 20살이 어리다는 결론은 도저히 나올 수가 없다.

 

변씨의 죽음은 더더구나 조조가 죽고나서 10년이 지난 후이다. 이때 그녀는 칠십의 노구이다. 현재의 유골감정기술로 보아 30년씩이나 나이차이가 날 수는 없다. 현재 안양 고고발굴팀은 이 문제에 대하여 합리적인 설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의문을 제기하는 전문가들은 대부분 별로 설득력이 없는 세부사항에 매달려 있다. 이 두 구의 여성유골이야말로 이 '조조무덤'의 가장 큰 문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