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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논쟁/조조무덤논쟁

조조무덤과 소위 전문가

by 중은우시 2010. 4. 8.

글: 황수우(黃守愚)

 

최근 들어, 신문보도에서, "조조무덤"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너무나 비전문가적이며, 역사적 상식도 없고, 권위도 없다고 말하였다. 예를 들어, 중국사회과학원 학부위원이자 저명한 고고학전문가인 유경주(劉慶柱)는 이런 말을 했다: 의문을 제기하는 비고고학전문가들은 너무나 아마추어적이다.(신화망 2010년 1월 2일). 필자는 유경주 선생등의 말을 찾아보았다. 그랬더니, 그들은 역사적 상식이 아주 결핍되어 있었고, 학문하는 태도가 성실하지 못했다. 많은 말들이 그저 근거없이 내뱉는 말이었다. 특히 유경주 선생은 예방육(倪方六) 선생을 가리켜서 "제기한 문제는 업계내의 말같지 않다. 묘지명은 동한 말기에 묘 안에 없었고, 위진시기에 비로소 있었다. 의문을 제기하기 전에 먼저 찾아본 후에 말하는 게 좋겠다. 비전문가적인 말은 하지를 말고."(신화망 북경 1월 1일). 필자는 예방육 선생의 견해를 지지한다. 묘지명(墓誌銘), 묘표(墓表)등 묘주인의 신분을 증명하는 확실한 증거가 있기 전에는 이 무덤이 조조의 고릉(高陵)이라고 증명하기 어렵다.

 

2009년 12월 28일 오후, 중국사회과학원 학부위원, 고고연구소 전 소장인 유경주는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두개골의 연구결과 중년의 약 오십여세의 여자는 분명히 변황후이다(중신망 12월 29일). 유경주는 이렇게 말한다. 두개골에 따르면, 남녀는 인류해부학적으로 구분할 수 있다. 50여세된 여성은 아마도 변황후일 것이다. 변황후는 조조와 20세의 연령차이이다.조조가 죽었을 때 66세이니까 그녀는 40여세이다. 다시 10년이 지나서 죽었다면 오십여세이다. 바로 현재 감정한 결과와 일치한다. 유경주 선생과 같은 저명한 고고학자가 <<삼국지>>에 변황후가 70여세까지 살았다고 한 기록은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헛소리를 지껄인 것이다. 이는 확실히 역사문헌에 대한 소양이 부족한 것이다. 그런데 무슨 자격으로 비전문가들에게 너무 아마추어적이라고 비난할 수 있단 말인가? 유경주 선생이 만일 전문가라면, 어찌 미리 <<삼국지>>도 읽어보지 않고 큰소리를 친단 말인가?

 

그리고 또 일부 전문가들은 중국의 보첩학(譜牒學)에 대하여 아예 모르고 있다. 조조의 후손을 찾아서 DNA감정을 하자는 소리를 한다. 동방관시동영상 12월 30일자 뉴스를 보면, <<조조묘인정에 논쟁이 있다. 고고팀은 조조후순을 찾아서 DNA감정을 하고자 한다>>고 하였다. 안양의 "조조무덤"고고팀이 조조후손을 찾아서 DNA감정을 하겠다는 말이다. 광주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어떤 네티즌이 묘내의 해골에서 DNA를 채취하여 조조후손과 비교감정을 해보자고 했는데, 반위빈(潘偉斌)은 못할 게 없다고 하면서, '증거의 하나로 삼을 수 있다'고 말했다.(광주일보 2009년 12월 31일 보도). 호남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하남성문물고고연구소 소장인 손신민(孫新民)은 안양 조조고릉에서 출토된 남성유골의 포본 DNA감정은 반드시 조조의 후손을 찾아서 확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현대인류 DNA연구기술과 방법은 이미 광범위하에 인류사회생활의 각 분야에서 응용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생물유전학적 관점으로 말하자면, 고대인류의 유해에서 DNA를 채취하여 분석하는 것은 고고학연구의 신흥분야이다. 연구방법과 이론이 아직 성숙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출토한 유골표본의 고대인류DNA연구는 기술적인 난제에 부닥칠 것이다.(호남일보 2010년 1월 1일 보도). 남방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복단대학 문물및박물관과 부주임인 고몽하 교수는 조조본인의 두개골인지 여부를 확인하려면, 뼈에서 채취한 DNA를 조조의 후손과 비교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렇게 하려면 먼저 조조의 족보를 찾고, 확인할 수 있는 조조의 후손의 것을 참고하여야 한다고 하였다(남방일보. 2009년 12월 29일)

 

중국의 현존하는 족보에서 확인가능한 믿을만한 사실은 기껏해야 명청시기까지밖에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다. 공씨, 맹씨의 족보라 하더라도 끊어진 대가 있다. 다른 성씨의 족보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당나라말기 오대시기에, 전해내려오는 보첩은 모조리 잃어버렸다. 송나라에 이르러, 민간의 족보세계는 이미 불분명하게 되었다. 현재의 족보에 나오는 원나라 및 그 이전의 기록은 모두 진실이라고 믿기가 어렵다. 예를 들어, 송나라때 익양진사 황조는 그의 묘지명에 따르면, 부친의 이름을 확인할 수 없다. 영향의 모 황씨성의 족보를 보면, 황조를 황상승의 아들이라고 했다. 그러나 황정견의 기록에 따르면, 황상승과 황조는 숙질관계이지 부자관계가 아니다.

 

명청시기에, 전문적으로 족보를 반드는 "보장(譜匠)"이 있었다. <<만성통보>>, <<상우록>>등을 뒤적인 후에 어느 성씨의 역사상 유명한 인물을 하나 조상으로 골라잡아서 족보를 만든다. 심지어, 구양수, 소식, 주희, 문천상, 방효유등의 명인들이 족보의 서문을 쓰기도 한다. '졸부의 족보만들기"는 '고아가 부친을 모시기'와 비슷하다. 아무나 잡으면 된다. 소문에 따르면, 두월생이 성공한 후에 족보를 만드는데, 처음에는 누군가가 당태종시기의 유명한 재상인 두여회(杜如晦)를 조상으로 하여 만들었다. 그러나, 두월생은 두여회의 이름중에 회(晦)자가 불길하다고 보았다. 할 수 없이, 다른 사람을 찾아서 두보(杜甫)를 조상으로 모시게 된다.

 

현재, 조(曹)씨성의 족보에서 조조의 진정한 후예를 찾는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조조무덤의 전문가들은 왜 조조의 후손을 찾아서 DNA감정을 하겠다고 큰소리치는가? 한마디로 말하자면 비전문가이고 아마추어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상식과 과학적상식이 너무나 결핍되어 있다. 이미 과학자가 나서서 조조무덤의 DNA를 채취해서 조조의 후손과 비교하는 것에 대하여 결론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한 바 있으니, 이 것에 대하여 더 이상 말하지는 않겠다.

 

최근 며칠간의 신문보도를 보면, 조조가 자기의 조상이라고 다투는 해프닝이 벌어지고 있다. 예를 들어, 호남유양, 상해, 하남정주 등지에서, 자칭 족보에 따르면 조조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필자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이들은 모두 가짜들이고 짝퉁들이라고.

 

이치대로라면, 조조무덤에는 그의 신분을 증명하는 물건이 나와야 한다. 그러나 현재까지 찾지를 못했다. 묘지명의 기원에 대하여 현재까지 논쟁이 있다. 서한설, 동한설, 위진설, 남조설등이 있다. 묘지명의 기원이 언제이든지간에, 한가지는 확실하다. 상당한 기간동안의 과정이 필요했을 것이고, 서한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전강만보가 2010년 1월 1일에 보도한 바에 따르면, "전문가는 또한 이렇게 표시했다. 현재 최초의 묘장 묘지명은 산동 익도에서 발견된 <<유회지묘지명>>인데, 그 연도는 남조 유송의 '대명8년' 즉 기원464년이다. 조조가 죽은 해로부터 개략 240여년이 지났다. 그러므로 조조묘에서 묘지명이 발견되지 않은 것은 정상적이다." 전문가는 현재 출토된 최초의 묘지명을 가지고 그 이전에는 묘지명이 없다고 단정지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성립되기 힘들다. 아직 발굴되지 않았다고 하여, 없었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렇게 단정하는 것은 전문가로서 너무나 대담한 일이다. 예를 들여, 현재의 문헌기록에 따르면, 동한시기에 이미 묘표(墓表)가 나타난다. 혹은 묘 앞에 세우고, 혹은 묘도에 묻는다. 명나라 서사증의 <<문체명판서설. 묘표>>에 따르면, "묘표는 동한때부터 시작하여, 안제원초원년에 <<알자경군묘표>>를 세웠다. 그 후에 이를 따랐다. 문체는 비석과 같다. 관직이 있거나 없거나 모두 사용한다. 비석과 같이 등급의 제한이 없었다." <<알자경군묘표>>는 문헌기록에 나타나고, 믿을 수 있다.

 

또한, 필자의 선배인 송문덕 선생은 이런 말을 남겼다: 서문표사당만 확정한다면, 풍수학에 근거하여, 이 묘가 조조묘라고 확정할 수 있다고. 조조의 <<유령>>에서는 "업의 서쪽 언덕위, 서문표사당과 가까운 곳에 묻으라"고 했다. 그러나, 서문표사당은 조조시기에 어디에 있었는지 알 수가 없다. 이미 고증할 방법이 없다. 지금의 서문표사당은 여러번 새로 지어서, 원래의 위치가 어디인지는 찾아볼 수가 없다. 필자가 구글위성지도를 찾아본 바에 따르면, 서고혈촌은 장하의 가에 있는데, 물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감아돌아 흐른다. 물의 북쪽이 양이고 물의 남쪽이 음인으로, 서고혈촌은 풍수적으로 명당자리가 아니다. 이와 반대로, 장하의 서고혈촌에서 거꾸로 동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두 곳의 감아돌아흐르는 곳이 있는데, 이 곳이 풍수학적으로 명당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필자는 조심스럽게 예방육 선생의 견해를 지지한다. 묘주인의 묘지명, 묘표, 인신(印信)등 명확히 묘주인의 신분을 나타내는 증거가 없이는, 잠시 이 묘를 조조의 고릉이라고 확정할 수 없다. 소위 '고고전문가'들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을 아마추어라고 지적하긴 하면서, 자신들의 말이 전문가적인지는 따져보지 않았는가? 필자는 그 배후의 천기를 누설할 수는 없다. 다행히 필자는 명리에 구속받지 않고, 득실에 구애받지 않는다. 내가 틀리면 지혜가 더 느는 것이고, 내가 맞는다고 해도 나에게 더 생기는 것은 없다. "나는 나의 스승을 사랑하지만, 나는 진리를 더욱 사랑한다" 내가 추구하는 것은 진리이다. 시비를 가리는 것이다. 각계에서 토론에 참여해서 진리가 더욱 밝아지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