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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논쟁/조조무덤논쟁

조조무덤의 "9대증거"는 모두 근거가 없다

by 중은우시 2010. 1. 16.

글: 예방육(倪方六)

 

2010년 1월 14일 오후, CCTV 채널1 기자와 인터뷰를 했다. 시간이 이미 새벽이 되었고, 아주 피곤했다. 날이 밝고 9시가 되어서 북경위성TV로 가서 프로그램을 찍었다. 오전, 오후 각각 1회씩이었다. 이번에는 다행히도, 나에게 '비전문가'적인 말을 한다고 비판했던 유경주 선생을 만나서, 직접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다.

 

미인PD는 나에게 일찌감치 쉬고서, 다음 날 활력있게 출연하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잠이 오지 않았다. 먼저 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가 대외에 공개한 몇 가지 견해를 검토했는데, 아주 웃긴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 이전에 홍콩의 남화조보(South China Morning Post)의 기자와 인터뷰를 할 때, "조위고릉(曹魏高陵)"이라는 말이 바로 조조무덤이라는 말이 아닌가라고 말한 적이 있다.? 고고학에서까지 문자유희를 하고 있다.

 

나는 조조묘의 진위확인에 있어서 가면 갈수록 학술외적인 소동이 되어버리는 것같고, 이미 학술적인 자중은 찾아볼 수 없는 것같다.

 

여기에서 필자는 유경주 선생이 프로그램에서 한 말을 먼저 언급하기로 한다.

 

이전에, 어떤 전문가는 조조무덤의 "6대이유"를 내놓았는데, 현재는 다시 "9대증거"를 공포했다. 이유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충실해지는 것이다. 6개가 9개로 바뀌었다. 그러나, 새로운 증거라는데 아무 것도 아니다. 그저 옛날 술을 새 술병에 담은 것이다. 그러나, 한가지 변화가 있었다. 이전과 상반된 것은 인정태도와 신용에 있어서, 갈수록 모호해지고, 갈수록 강도가 약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전에, 유경주 선생은 CCTV와의 인터뷰에서 현재의 6대증거로 이미 "충분히 조조무덤으로 인정할 수 있다>"고 했다. 14일 오후, 중국사회과학원 고고연구수의 '포럼'에서 전문가는 다시 그저 '초보적인 인정'이라고 말했다. 말이 바뀐 것이다. 마지막으로, 현임 왕소장은 매체의 질문을 받고는 다시 이렇게 강조했다: '아직 결론이 난 것은 아니다'

 

"충분히 조조묘로 인정할 수 있다' --> "초보적인 인정" ---> "아직 결론이 난 것은 아니다"

 

이렇나 추리과정은 이미 이전에 조조묘로 확신하던 관점을 부정하는 것이고, 이는 관련전문가들이 이미 백퍼센트 자신감을 갖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조조무덤이라고 결론이 난 것이 아니라면, 왜 황급히 "09년도 6대발견"으로 꼽았는가? 이건 무슨 짓인가? 그리고 다시 성급하게 매체를 불러서 뭘하겠다는 것인가? 뭘 증명하고 싶은가? 외부의 입이라도 막아보겠다는 것인가? 소위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매치를 통하여 강제로 전파하려는 것인가? 필자는 이미 결론이 나지 않았다고 말한 바 있다.

 

고고학적 인정은 증거를 가지고 해야 한다. 증거가 부족하고, 논증이 불충분한데로, 이렇게 하는 것이, 엄격한 학술적인 태도란 말인가?

 

고고발굴을 주재한 반위민 선생은 포럼에서 초보적으로 조조무덤으로 인정한 "9대증거"를 공포했다. 하나하나 분석해보자.

 

증거1: 이 묘장은 다묘실전실대묘(多墓室塼室大墓)이다. 주묘실은 4각찬첨정(攢尖頂)으로, 낙양에서 발견된 조위(曹魏) 위시8년 대묘의 묘천정모양과 같다. 전문가들은 일치하여 동한말기의 대묘라고 인정한다.

 

- 이것은 시대인정의 근거이다. 전문가들이 동한말기의 대묘라고 일치하여 모두 인정한다고 하여, 이것을 조조묘라고 인정할 수 있는가? 왜 다른 사람의 묘는 될 수가 없는가? 현재 조조묘의 시대인정은 그저 눈으로 본 것과 고고학적 비교이다. 현대는 아주 과학적인 검측수단이 있다. "열석광(熱釋光)". '열석광'의 오차는 1,2년정도이다. 상해박물관 문물보호과기센터는 '열석광' 검측을 할 수 있다. 왜 벽돌을 상해로 보내어 시대측정을 해보지 않는가? 만일 묘전(묘의 벽돌)이 조조가 죽기 전인 220년보다 1,2년전에 만들어낸 것이라면, 조조묘라는 이유가 더욱 충분해지지 않는가? 왜 하지 않는가? 혹시 묘의 벽돌이 220년에 만든 것이 아닐까봐 걱정하는 것인가? '전문가들이 일치'하여 인정한다고 하여 반드시 그런 것인가?

 

증거2: 이 묘장은 동시기의 묘장과 비교하여, 규모가 크서 왕후(王侯)급 묘장이다. 조조의 신분과 들어맞는다. 전체 묘실은 깊이가 15미터로 조식이 그의 시에서 묘사한 바와 일치한다.

 

- 이것은 더욱 웃기는 말이다. 설마 조조묘 이외에 다른 묘들은 이렇게 만들 수 없단 말인가? 나중의 염민, 고환등은 모두 이런 묘를 누릴 자격이 없단 말인가? 그리고, 무엇을 근거로 그것이 왕후급 묘장이라고 단정하는가? 황제는 아닌 것인가? 공신은 아닌 것인가? 또 무엇을 가지고 비교해서 왕후급묘라는 것인가? 혹시 묘실이 여러개이기 때문인가? 진한시대의 대묘는 일반적으로 모두 깊이가 10미터이하이다. 이것은 모두 조식의 시에서 묘사한 것과 일치한다. 이전에, 조조는 박장(薄葬)을 숭상했고, 생전에 묘를 미리 건설하지 않았다. 그리고 매장도 빨리 이루어졌다. 겨우 22일이다. 국내의 학술계는 지금까지 조조무덤이 그다지 크지 않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현재 묘가 이렇게 큰데 그것은 또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증거3: 묘지의 지면상황이 조조가 정한 <<종제(終制)>>와 부합한다. 이 묘장의 위치는 3킬로미터 이외의 북조묘지보다 해발이 10미터가량 높다. 이는 "인고위기(因高爲基, 높은 곳이어서 터로 잡았다)"는 요구조건에 부합한다. 이번에 발굴된 묘실의 상면에는 봉토(封土)도 없고, 비석을 세웠다는 흔적도 없다. 이것도 <<종제>>의 "불봉불수(不封不樹)"의 요구조건에 부합한다.

 

- 당시에 비장(秘葬)을 한 사람은 조조 한 사람만이 아니다. 나중에 위나라를 대체한 사마씨의 진(晋)나라도 "불수불봉(不樹不封)"했다. <<진서. 선제기>>(제1권)에는 사마의가 미리 '유명'을 내려 <<종제>>를 미리 만들었는데, "불분불수(不墳不樹)"하도록 했따. 고고학에서 봉토가 보이지 않았다고? 그렇다면 그 묘는 어떻게 파낸 것인가? 흙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한걸음 양보해서, 만일 봉토를 옛날사람들이 파갔다면? 또한 어떻게 비석을 세운 흔적을 찾을 수 없다고 판단했는가? 만일 석비를 도굴꾼들이 가져갔다면? 아니면 부숴버렸다면? 반위빈 선생은 자신의 책에서, 조조의 묘지에 건축이 있었다고 적지 않았던가? 지금은 어찌해서 예전에 있던 것도 발견하지 못했는가? 다시 말해서, 장하북쪽의 하북성 경내에, 이런 고대의 묘지들이 있는 고지대는 아주 많다. 그것들도 '인고위기'가 아닌가?

 

증거4: 문헌자료에 기재된 고릉의 위치와 부합한다.

 

- 개략 이것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서문표의 사당의 서쪽 언덕위" 서문표사당의 위치를 확정할 수 있는가? 서문표사당의 위치를 확정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서쪽'이라는 것은 그저 대체적인 방향일 뿐인데, 사료에는 서쪽으로 얼마나 가야한다고 말이 없지 않은가? 몇미터? 몇십미터? 몇리? 몇십리?

 

반위빈 선생이 인용한 당나라때의 <<원화군현도지>>의 상주 업현 조에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고 되어 있다: 위무제(魏武帝)의 서릉(西陵)은 현의 서쪽 30리에 있다. 같은 책에는 이런 기록도 있다. 서문표의 사당은 현의 서쪽 15리에 있다고. 현재 대묘가 있는 위치인 서고혈은 업성에서 14.5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사료의 정확성이 얼마나 될 지는 별론으로 하고, 가장 분명한 것은 고대의 '리'와 현대의 '리'는 다르다는 것이다. 공간거리가 다른 것이다. 반위빈 선생은 현대의 14.5킬로미터를 고대의 30리라고 보았다. 이것도 상식적인 착오를 범한 것이다. 각 왕조의 길이에 대한 기준은 모두 달랐다. 현재와도 다른 것이다. 당연히 다시 찾아서 계산해봐야 할 것이다.

 

증거5: 칭호가 부합한다.

 

- 이것의 근거는 바로 "위(魏)"를 가리키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위"가 조조의 전용인가? 염민도 위나라의 군왕이었고, 역시 "위(魏)"였다. 하북의 학자중에 일찌감치 이의를 제기한 사람이 있다: 북위에도 '위효무제'가 있다. 그리고 고환(高歡)도 일찌기 동위(東魏)의 무왕(武王)이었다. '위무왕'으로 불러도 된다. 통치지역도 이 일대이다.

 

반위빈 선생은 '조위의 작위는 먼저 위공이다가, 다시 위왕이었고, 다시 위무왕이 되었는데, 나중에 무제로 칭하게 된다. 이 맥락은 아주 분명하다. 위무왕은 짧은 기간동안의 칭호이다" 이는 반위빈 선생의 주관적인 억측이다. <<삼국지>>, 혹은 기타 사서의 어느 곳에 조조를 '위무왕"이라고 칭하는 곳이 있는가? 만일 찾아낸다면 내가 고치겠다.

 

증거6: 발굴과정에서 출토된 명패(銘牌)에 "위무왕"이라고 새겨진 명패가 모두 7개이다. 이것은 신분인정의 직접증거이다.

 

- 이제 다시는 도굴범의 수중에서 되찾아온 그 '격호대극'을 강조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반절은 고고발굴때 친히 발굴했다고 말한다. 염민은 안양 사람이다. 그는 "좌장쌍인모, 우집구극(左杖雙刃矛, 右執鉤戟)"했다고 한다. 이는 출토된 '위무왕상용격호단모' '위무왕상소용격호대극', '위무왕상소용격호대도'와 부합한다. 외부에서도 일찌감치 이런 의견을 내놓았다. 심지어 북경대학 고고학 교수이며, 신중국 제1호 고고학박사인 왕신도 봉황위성TV에 출연하여 이 견해를 내놓았다: '조조를 제외하고, 염민이 묘주의 유력한 경쟁자이다."

 

포럼에서, 관련전문가의 견해로도 외부에서 '위무왕상소용격호대극'의 글자의 각법(刻法)에 대한 의문을 해소시켜주지 못했다. 어떤 네티즌은, "소(所)"자를 보면 동한위진시기의 쓰는 방법이 아니라, 현대에 해서를 배운 사람이 새긴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전문가가 하는 말을 믿는다고 하면, 이 글자는 조조시대에 쓰던 글자이다. 만일 위조한 사람이 그 시대의 문자를 그대로 베끼지 않았다면, 그것은 너무나 초보적인 위조가 아니겠는가?

 

농담을 한 마디 하자면, 한 북경대학 고고학교수는 반가원에 가서 골동품을 찾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는데, 몇년전에 그가 생각하기로 한나라때의 진품을 하나 구했다. 너무나 기뻐서 보배처럼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며칠이 지나서, 교수는 다시 반가원에 갔는데, 같은 사람이 똑같은 물건을 놓고 팔고 있었다. 그제서야 그 교수는 자신이 잘못봤다는 것을 알았다. 속았다고 생각이 드니, 체면이 말이 아니어서, 집으로 돌아간 후 며칠동안 밥을 먹지 못했다고 한다.

 

증거7: 출토물과 조조의 유언의 '박장'이 부합한다.

 

- 이것은 반박할 가치도 없다. 이 '조조무덤'에서는 250건의 출토물이 나왔고, 금으로 된 물건도 있었다. <<삼국지. 위지. 무제기>>에 따르면, 조조무덤에는 '금'은 하나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의복도 '평상시에 입던 옷으로 염을 했다' 가치있는 물건을 하나도 부장품으로 묻지 않았는데, 설마 조조는 도굴범이 그의 옷까지 훔쳐갈까 두려워서 하나도 걸치지 않고 맨몸으로 묻혔다면 그것은 너무나 체면에 맞지 않는 일이 아닌가? 그리고 현재 출토된 물건들이 그다지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하여, '박장'임을 증명할 수 있는가? 모두 알다시피, 이 묘는 일찌감치 도굴된 것이다. 발굴전에 여러번 도굴되었다. 어떻게 도굴범들이 보물을 훔쳐가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 있는가? 도굴을 당하지 않았다면 몰라도, 이미 도굴을 당했는데, 박장이라고 결론내리는 것은 너무 견강부회가 아닌가? 말이 안되지 않는가? 실제로, 박장인지 아닌지를 가지고 조조무덤인지 여부를 판단하는 증거로 삼을 수는 없다. 한문제도 죽기 전에 박장을 제창했지만, 사후에 도굴범들은 그의 묘에서 많은 금은보화를 도굴해냈다. 하물며, '박장'과 '후장'은 도굴사를 연구하면서 발견한 바에 따르면, 일정한 기준도 없다.

 

증거8: 묘장에서 발견된 남성유골은 60세가량으로, 조조가 사망할 때의 나이와 부합한다.

 

- 조조가 죽었을 때 66세이다. 이 '가량'이라는 개념은 일반적으로 이해하자면 60세에서 아래 위로 서너살 사이이다. 오십칠팔에서 육십이삼이다. 다시 말해서, 고고학적으로, 완전한 유골의 연령을 판단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약간의 경험이 있는 고고학자라면, 90%이상 자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처럼 두개골 하나만을 가지고 이렇게 정확하게 판단한다는 것은 실수할 가능성이 아주 뚜렷하다. 두개골로 연령을 판단하려면, 한가지는 골봉(骨縫)의 결합정도이고 다른 한가지는 아령(牙齡)의 마모정도이다. 아령의 마모상황이 연령을 파악하는 가장 믿을만한 방법이다. 그런데, 하악골이 아예 없고, 이빨도 없다. 이런 판단의 정확도가 얼마나 될 것인가? 두개골의 매끄러운 정도는 연령판단의 기준이 될 수는 있다. 그러나 정확한 것은 아니다. 하물며, 이 두개골은 묘의 전실에서 발견되었는데, 이치대로라면 당연히 후실에 있어야 한다. 이것은 또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만일 초기에 묘에서 맞아죽은 도굴범이 남긴 것이라면? 후실의 두 개의 여성유골은 또 누구랄 말인가?

 

증거9: 부근출토문물의 방증

 

- 이 소위 방증이라는 것은 "노잠(魯潛)"의 묘지(墓誌)이다. 묘지에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조조묘는 노잠묘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그런데, 지금 문제는 노잠의 묘지는 노잠묘안에서 발견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일 과거 농민이 다른 곳에서 옮겨온 것이라면? 혹은 도굴범들이 이 곳에 버리고 간 것이라면?

 

현재 고고연구소가 이 동한말기의 묘를 조조의 묘라고 하는 이유는 바로 상술하 '9대증거'를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인정한 것이다. 필자가 개략적으로 의문을 제기해보았는데도, 헛점이 하나둘이 아니다. 하나도 확실하고 반박할 수 없을 철증(鐵證)은 없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상의 9대증거를 종합해보면 반드시 조조묘는 아니라고 결론을 내릴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