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왕덕항(王德恒)
최근에 불교역사상의 멸불(滅佛)사건을 쓰다보니, 국호를 주(周)로 쓴 두 나라의 황제가 멸불사건을 일으켰다. 하나는 북주의 주무제 우문옹(宇文邕)이고, 다른 하나는 후주의 주세종 시영(柴榮)이다. 이외에도 주나라를 국호로 쓴 나라가 3개가 더 있으니, 합치면 모두 5개의 나라가 주(周)라는 국명을 쓴 셈이다.
희주(姬周)
바로 하상주(夏商周)의 그 주나라이다. 나중에 서주(西周), 동주(東周)로 나뉘어진다. 주무왕이 상나라를 멸망시킨 후 3053년전에 설립하였다.
북주(北周)
성은 우문(宇文)이다. 서위(西魏) 공제3년(556년), 서위정권을 실제로 장악하고 있던 우문태가 죽은 후, 장남 우문각이 대총재(大冢宰)가 되고 자칭 주공(周公)이라 한다. 다음해 초, 그는 서위의 공제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국호를 주라 하고, 장안을 도읍으로 정한다. 역사상 북주라고 칭한다. 577년 북주는 북제를 멸망시키고, 화북을 통일한다. 581년,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양견(楊堅)이 북주정권을 찬탈해서 국호를 수(隋)라 하니, 북주는 멸망한다.
무주(武周)
무측천이 황제에 오르고 나서 이씨의 당나라를 주나라로 고친다. 당현경5년(660년)에 당고종 이치는 봉현(鳳眩)을 앓아, 눈이 보이지 않게 된다. 그리하여 조서를 쓰는 업무를 무측천에게 맡겨서 정무를 처리하게 한다. 이때부터, 무측천은 생사대권을 장악하고, 천자는 그저 손을 맞잡고 있을 뿐이다. 당고종은 후회해서, 대권을 회수하고자 중서시랑 상관의를 시켜 무측천을 황후에서 폐위시키는 조서를 쓰게 밀명을 내린다. 그러나 이 일은 기밀이 누설되어 성공하지 못한다. 무측천의 수법은 악랄해서, 먼저 손을 쓴다. 바로 상관의를 죽여버린다. 당고종의 시도는 물거품이 된다. 무측천이 정무를 훌륭하게 처리했다. 당고종처럼 미뤄두고 묵히지를 않았다. 그리하여 여러 신하들이 그녀의 처리에 탄복한다. 당고종은 그녀가 독단하는 것이 싫었지만, 많은 국가대사를 그녀없이는 처리하기 어려웠다. 이렇게 하여 무측천은 점차 막후에서 무대앞으로 나오게 된다. 당고종과 함께 나서서 신하들의 조배(朝拜)를 받았다. 상원원년(674년) 당고종은 호를 천황(天皇)이라 하고 황후를 천후(天后)라고 부른다. 세상사람들은 두 사람을 "이성(二聖)"이라고 불렀다.
상원원년(674년)부터, 무측천은 '천후'의 명의로 정무를 보고, 천수원년(690년)에 이르러 무측천은 황제에 오를 준비를 모두 갖추었다고 보고, 먼저 불교승려 법명의 입을 통하여 여론을 널리 퍼트린다. "무후는 미륵불이 환생한 것이다. 현재는 당나라의 천자이다" 곧이어 도 한가지를 연출한다. 당예종을 위시한 6만의 신하백성들이 글을 올려 국호를 고쳐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다. 이에 측천무후는 "위로는 하늘의 지시를 받고' '아래로는 여러 사람의 의견을 받아' 만세 소리 속에서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이렇게 그녀는 꿈에도 그리던 숙원을 이루고 당나라를 주나라로 개칭한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이미 67세였다.
무측천은 나중에 신하의 건의를 받아들여, 성력원년(698년) 여릉왕 이현을 돌아오게 하여 태자에 앉힌다. 무측천의 만년 신룡원년(705년) 정월 장간지, 환언범, 최현, 경휘등이 우우림대장군 이다조와 연합하여 정변을 일으키고, 무측천의 면수 이장(二張)을 죽여버리고 무측천을 퇴위시키며, 당중종을 복위시킨다. 당중종은 그녀에게 측천대성제라는 존호를 바친다. 후세인들은 이로 인하여 그녀를 무측천이라 부른다. 그리고 그해 11월에 사망한다.
후주(後周)
곽위(郭威)가 건립했다. 951년, 원래 후한의 추밀사인 곽위는 바깥으로 출정했는데, 변량에 남겨두었던 가족들이 참살을 당하고, 자신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 되자, 거병을 한다. 그는 먼저 감국을 칭하고 나중에 황제를 칭한다. 국호는 주로 하는데, 역사에서는 후주(後周)라고 부른다. 그는 연호를 광순으로 고치고, 주태조가 된다. 곽위가 즉위한 후, 개혁에 주력하여 후한의 적폐를 시정한다. 그리고 거란과 북한에 대하여 제한적인 방어를 통해 국면을 안정시키고 생산을 발전시킨다. 954년, 곽위가 병사하고 황제위를 양자이자 조카인 시영에게 넘겨준다. 그가 주세종이다. 주세종이 즉위한 후, 원래의 성을 회복하여, 사람들은 시세종(柴世宗)이라고도 한다. 주세종은 과거의 군사상 방어전략을 수정하여, 적극적으로 사방으로 공격하여 통일을 이루고자 한다. 진주, 봉주, 성주, 개주의 4주를 얻고, 회남14주도 회복한다. 아쉽게도 거란을 장성밖으로 축출하지도 못하고, 북한을 멸망시키기도 전에 나이 겨우 39세의 주세종 시영은 변량에서 병사한다. 이때가 959년이다. 주세종이 죽은 후, 그의 아들 시종훈은 겨우 7살의 나이로 황제위에 오르니 바로 주공제이다. 다음해 전전도점검 조광윤이 북벌군을 이끌고 '진교병변'을 일으켜 황제위에 오르고 후주를 멸망시킨다.
대주(大周)
국호만 남아있고, 황제의 성명도 모른다. 1980년, 포세헌(북경시 고건축연구소 부소장)은 문두구의 심산에서 비석을 하나 발견하는데, "주조원원년(大周朝元元年)"이라고 쓰여 있었다. 이 왕조는 역사서에 나타나지 않는다. 비문을 분석해보면, 원래 징기스칸이 금나라의 수도인 중도(지금의 북경)을 공격하여 금나라공주와 배상금을 받고 철수한다. 그래도 금선종은 두려움에 변경으로 도망가서 그곳을 새로운 수도로 삼는다. 이때 북경지역은 권력진공상태이다. 현지의 부호가 거병하여 "대주"정권을 건립한다. 국호도 정하고 연호도 정하였다. 나머지 사적은 불분명하다. 현재까지도 다른 사료는 발견되지 않았다.
마지막의 대주는 왕조라고 하기는 곤란하다. 그저 재미삼아 넣어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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