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공통)

칫솔질이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래된 역사

by 중은우시 2009. 4. 1.

글: 향우전(向右轉)

 

고대 인도의 승려가 집단으로 외출을 나갈 때면, 몸에 항상 18가지 물건을 가지고 다녔다. 18가지는 도대체 어떤 것들인가? 그것은 바로 치목(齒木), 조두(豆), 삼의(三衣), 삼의(三衣), 발(鉢, 바리때), 병(甁), 좌구(坐具), 석장(錫杖), 향로(香爐), 여수낭(濾水囊), 모건(毛巾, 수건), 소도(小刀), 화수(火燧, 부싯돌), 섭자(子), 승상(繩床), 경권(經卷), 계본(戒本), 불상(佛像), 보살상(菩薩像)이 그것이다.

 

"조두"는 지금의 비누와 유사하여 세수하는데 쓰는 것이다. "삼의"는 가사(袈裟)를 가리킨다. "발"은 밥을 담는데 쓰는 것이고, "병"은 물을 답는데 쓴다. "좌구"는 일종의 네모난 베(布)인데, 앉거나 누울 때 쓴다. "석장"은 윗부분을 둥글게 만든 지팡이인데, 독사나 맹수를 쫓을 때도 쓰고, 시주를 받을 때 이것을 흔들면 휘리릭 휘리릭 소리가 나서, 사람들이 음식을 준비해준다. "향로"는 당연히 향을 불사르는데 쓰는 것이다. 승려들이 걷다가 다리가 아프면, 향로를 내려놓고 향을 피운다. 향로 곁을 지나가면 땀냄새가 사라지게 된다. "여수낭"은 물 속에 들어있는 작은 벌레를 걸러내는데 쓴다. 이런 작은 벌레들을 먹지 않도록, 즉 살생을 범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모건"은 손을 닦는데 쓰고, "소도"는 머리카락을 깍고, 옷을 만들고, 손톱발톱을 자르는데 쓴다. "화수"는 불을 피우는데 쓰고, "섭자"는 콧털을 뽑는데 쓴다. "승상"은 휴식하는데 쓰고, 필요할 때면 들것으로도 쓸 수 있다. "경권"은 경문을 가리키고, "계본"은 계율을 가리킨다. "불상"은 석가모니상을 가리키고, 보살상은 다른 득도한 고승의 조각상을 가리킨다.

 

기껏 얘기하면서, 아직 "치목"은 얘길하지 않았다. "치목"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건 18가지 물건들 중에서 아주 중요한 것이며 산스크리트어로 "단다가색차(但多伽色叉)"라고 부르는 것이다. "단다"는 이빨이라는 뜻이고, "가색차"는 나무조각이라는 뜻이다. 합쳐보면, 이빨을 닦는 나무가 된다. 이런 정도의 해석은 너무나 두리뭉실하다. 심지어 오해할 소지까지 있다. 역시 우리는 불경을 다시 살펴서 자세히 얘기해보는 것이 좋겠다.

 

율부경전인 <<오분율>> 제26권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어느해 어느달 어느날에 고대인더의 승려가 함게 모여서 모임을 가졌다. 모두 경전과 불도를 논하고 있었으며, 분위기가 아주 달아올랐다. 유감스러운 점이라면, 그중 한 승려의 입에서 구취(口臭, 입냄새)가 심하게 났다는 것이다. 매번 그가 입을 열어 말할 때마다, 다른 사람들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입냄새때문에 다른 승려들이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리하여 석가모니에게 가서 물어보았다. 석가모니는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들이 입냄새가 나는 것은 완전히 치목을 써서 이빨을 닦지 않은 것때문이니, 다음에 그들에게 이빨을 닦게 하면 된다. 여기서 한가지 얘기할 것은 그 이후 누구든지 입냄새가 나든 말든 모두 아침에 일어나면 치목으로 이빨을 닦게 되었다는 것이다. 왜그럴까? 치목으로 이빨을 닦으면 다섯 가지 좋은 점이 있었다. 하나는 입안의 기운을 맑게 해주고, 둘째는 간과 눈을 맑게 해주며, 셋째는 소화를 도와주고, 넷째는 입맛을 불러일으키며, 다섯째는 타액분비를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당나라때 승려인 의정(義淨)이 편찬한 <<남해기귀내법전>>의 제1권에는 상세히 고대인도승려과 고대 남아시아수행자들이 치목을 가지고 이빨을 어떻게 닦는지의 정확한 순서를 적어놓고 있다: 치목의 한조각을 집어서 그중 한쪽 끝을 입안에 넣고 잘게 씹는다. 잘게 씹고난 후에는 손바닥에 뱉어서, 엄지, 식지와 중지를 이용하여 뭉친다. 그리고는 이빨과 잇몸을 반복적으로 마찰한다. 그 후에 아직 씹지 않은 나머지 끝을 두 조각으로 나눈 후 절반은 버리고, 나머지 절반으로 혓바닥을 닦는다. 혓바닥을 다 닦고 난 후에, 다시 치목의 끝부분을 씹어서 뾰족하게 만든 후에 이쑤시개로 쓴다. 마지막으로 치목을 버리고, 입안을 맑은 물로 헹군다.

 

치목은 어디서 구하는가? <<마하승지율>> 제16권을 보면, 소위 "치목"은 이빨을 닦는데 쓰는 나뭇가지(樹枝)이다. 그러나, 모든 나무가지를 치목으로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분률>> 제26권에서는 아주 분명히 언급되어 있다: 보리수 나뭇가지는 치목으로 쓸 수 없다. 왜냐하면 보리수는 성수(聖樹)이기 때문이다; 칠수(漆樹)의 나뭇가지도 치목으로 쓸 수 없다. 왜냐하면 칠수에는 독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이외에 계수나무(桂樹)의 가지나, 호초(胡椒)나무의 가지나, 목향(木香)나무의 가지나, 침향(沈香)나무의 가지나, 단향(檀香)나무의 가지는 모두 치목으로 쓸 수가 있다. 바꾸어 말하면 모두 이빨을 닦는데 쓸 수 있다는 것이다.

 

고대인도의 승려들은 치목의 형상에 대하여도 특별한 요구조건이 있었다. 율부경전인 <<부비나야잡사>> 제13권의 묘사에 따르면, 치목은 장(長), 중(中), 단(短)의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열두손가락마디길이의 나뭇가지는 장치목으로 고승들이 사용하고, 여덟손가락마디길이의 나뭇가지는 단치목으로 막 불문에 입문한 승려들이 사용하고; 길이가 양자의 중간쯤인 나뭇가지는 중치목으로 보통승려들이 사용한다는 것이다. 장치목이든, 중치목이든, 단치목이든, 두께는 모두 비슷하다. 대체로 새끼손가락마디의 두께에 해당한다. 등급의식을 빼고 말하자면, 필자의 생각으로 이런 규정은 이치에 맞는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나뭇가지가 너무길면 그것은 낭비이고, 너무 짧으면 씹는데 부족하고, 너무 두꺼워도 씹기 어렵고, 너무 가늘면 이빨 사이에 낄 것이기 때문이다. 치목의 길이를 여덟 내지 열두 손가락마디로 하고, 두께는 새끼손가락정도로 한 것은 많은 나뭇까지를 씹어본 후에 얻어낸 고귀한 경험일 것이다.

 

고대인도의 승려집단은 계율이 아주 많았다. 크게는 몸을 던져 해탈하는데부터 작게는 옷을 입고 밥을 먹는데까지, 모두 규칙이 많았다. 이빨닦기도 예외는 아니다. 이빨닦기에 대한 계율은 필자가 읽어본 곳만도 개략 십여조에 달한다. 각각 <<사분률>> <<오분률>> <<마하승지율>> <<십송률>> <<대일경>> <<증일아함경>>등에 흩어져 있다. 종합하면 아래와 같다:

 

(1) 머리를 깍고 수행하는 자라면 모두 아침에 일어나면 반드시 이빨을 닦아야 한다.

(2) 식사를 한 후에는 반드시 이빨을 닦아야 한다.

(3) 이빨을 닦기 전에, 반드시 치목과 손을 먼저 깨끗이 씻어야 한다.

(4) 이빨을 닦은 후에는 반드시 물로 입안을 가셔야 한다.

(5) 치목을 담는 용기는 반드시 깨끗해야 한다.

(6) 보리수의 나뭇가지를 치목으로 써서는 안된다.

(7) 치목의 길이는 열두손가락마디보다 길어서는 안되고, 여섯손가락마디보다 짧아서도 안된다.

(8) 이빨을 닦을 때는 먼저 씹은 후에 나중에 문지르고, 다시 혀를 닦고 이빨을 쑤신다. 이 순서를 어겨서는 안된다.

(9) 승려단이 외출할 때는 이빨을 닦을 때 반드시 한 곳에 모여야 하고, 함부로 돌아다녀서는 안된다.

(10) 우물가에서 이빨을 닦아서는 안된다.

(11) 식당안에서 이빨을 닦아서는 안된다.

(12) 하급승려는 고승의 앞에서 이빨을 닦아서는 안된다.

 

신분등급의식을 빼고 보자면, 상술한 계율중에서 우리가 지금도 인정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다. 예를 들면, 승려들이 한 곳에 모여서 이빨을 닦는 것인데, 이렇게 하면 나뭇가지를 아무데나 버리지 않게 될 것이므로 환경보호에 도움이 될 것이다.

 

주의할 것은, 승려집단에만 이빨닦는 습관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고대인도의 다른 집단에도 이빨닦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당나라때 승려인 도세(道世)가 쓴 불경색인인 <<법원주림>>에서는 고대인도의 경전인 <<아비달마대비파사론>>의 이야기 하나를 인용하고 있다. 그 내용은 소를 파는 장사꾼무리가 소를 몰고 시장으로 팔러 갔는데, 도중에 배가 고파서 서로 협의를 했다. 이들 소는 전부 남에게 팔아버릴 것들인데, 우리가 아예 소의 혓바닥을 잘라서 구워먹으면 어떻겠는가? 그래서 이들은 소의 코에 소금을 발랐다. 소는 짠맛을 좋아해서 혓바닥을 내밀어 소금을 핥았다. 그들은 이 틈을 타서 칼로 소의 혀를 잘라버렸다. 그 후에 불을 피우고, 소혓바닥요리를 만들어 먹었다. 소혓바닥을 다 먹은 후에 소장사꾼은 나무에서 치목을 잘라와서 승려들과 마찬가지로 먼저 씹은 후 다시 문질렀다. 그 후에 혓바닥을 긁었다. 그런데, 그 부드럽던 작은 나뭇가지가 갑자기 날카로운 칼날로 바뀌어서, 소장사꾼의 혓바닥을 모조리 뿌리부터 잘라버렸다. 순식간에 수십개의 선혈이 낭자한 혓바닥이 익은 감이 나무에서 떨어지듯 땅바닥에 떨어졌다. 도세는 이 이야기를 전하면서 목적은 착한 일을 하고 죽이지 말라는 것이라고 하였다. 다만,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한 가지 결론을 낼 수 있다. 고대인도에서 소장사꾼들도 이를 닦았었다.

 

고대인도의 소장사꾼이 이를 닦았다면, 혹시 승려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닐까? 혹은 불교가 흥성하기 이전에 고대인도에 이미 나뭇가지로 이를 닦는 습속이 존재했을까? 필자는 인도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한다.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함부로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감히 단정할 수 있는 것은 중국인들이 이빨을 닦는 것은 확실히 인도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점이다.

 

불교가 한(漢)나라때 중국으로 전래된 사실을 알고 있는가? 그 후에 위진(魏晋)과 당나라때 두 번의 전성기를 맞이했었다. 그중에 이빨닦는 계율이 적힌 <<사분률>>, <<오분률>>, <<마하승지율>>등등의 율부경정이, 모두 위진시기에 한어로 번역되었다. 이들 경전 속에 나열된 계살(戒殺), 계음(戒淫), 주랍(做臘), 결하(結夏)등등의 계율은 혹은 중국승려들에게 완벽하게 집행되고, 혹은 그들이 변통적으로 이행했다. 이빨닦기와 관련된 계율은 비록 위진과 당나라때 중국승려의 생활습관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경전번역인사들의 마음 속에 혹은 깊고 혹은 얕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인도의 이빨닦기 습관이 중국의 승려에 미친 영향은 그저 인상을 남겼다는 정도로 간단하지는 않다. 당나라때 승려인 백장회해가 <<백장청규>>라는 것을 제정하는데, 그 곳에는 인도승려집단의 18종 휴대물품을 본떠서 중국승려들의 18종법기(法器)를 나열했다. 그중에는 "치목"이 들어있다. 앞에 얘기한 것처럼, 치목은 이빨닦는데 쓰는 나뭇가지이다(불교사전에서는 치목을 '이빨을 쑤시고 혀를 닦는데 쓰는 나뭇조각(木片)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치목의 기능은 단순히 이빨을 쑤시고 혓바닥을 닦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고, 겉모습도 조각이 아니기 때문이다). 백장회해는 치목을 휴대법기중 하나로 열거하고 있으니, 그의 제자들 사이에서는 당연히 인도승려를 본받아 이빨닦는 것이 유행했을 것이다. <<백장청규>>가 제정된 후, "천하의 총림에서 받들지 않는 곳이 없었다"고 하는데, 그의 영향이 얼마나 광대했는지를 알 수 있는 일이다. 이로써 추론해보면, 중국승려들의 이빨닦기는 이미 기풍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당연히, 필자의 이런 추론은 실제사례로 뒷받침되지는 않으면, 다른 사람을 충분히 설복시키기 어렵다는 것을 안다.

 

그렇다면, 실례를 찾아볼 수 있을까? 우리는 절에서 빠져나와 속세로 눈을 돌려보자.

 

속세는 거의 단층을 이룬 것같다. 당나라때는 역경이 최고조에 달하고, 무주(武周, 무측천의 주나라)시대에는 불교가 특히 성행했다. 만일 당시의 중국승려가 인도승려처럼 이빨닦는 습관을 길렀다면, 분명히 고관대작들과 일반백성들도 그들을 따라 치목으로 이빨을 닦았을 것이다. 그런데, 아주 이상한 일은 필자가 <<태평광기>>를 찾아보고, 당나라사람의 시집을 찾아보고, 백거이, 유종원등의 서신을 찾아보았지만, 이빨을 닦았다는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오히려 1세기 이후인 송나라에서는 칫솔과 치약이 갑자기 세상에 나타나게 된다.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고대인도의 승려들은 그저 치목, 즉 특정한 나뭇가지를 사용했다. 정규의 칫솔과 치약을 갖춘 것은 아니었따. 송나라사람들은 훨씬 앞서갔다. 도시상점에는 칫솔을 팔았다. 사대부들은 약물과 향료의 두 가지 성질을 갖춘 원시 치약을 만들기 시작했다.

 

남송의 오자목(吳自牧)이 항주의 생활을 묘사한 필기체서적인 <<몽량록(夢梁錄)>> 제13권에는 이런 내용이 쓰여 있다: "여러 잡화중에 쇄아자(刷牙子)가 있다" 이 "쇄아자"가 바로 칫솔이다. 또 다른 남송사람인 주수충이 편찬한 양생서적 <<유찬제가양생지보>>에서는 아침에 이빨을 닦지 말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아침에 일어나서는 쇄아자를 사용해서는 안된다. 뿌리가 뜨고 이빨이 성기어져서 쉽게 흔들릴 수 있다. 오래되면 치통이 온다. 쇄아자라는 것은 모두 말꼬리(馬尾)로 만드는데, 아주 손상을 가한다." 그가 말한 쇄아자도 역시 칫솔이다. 그리고 말꼬리로 가공한 것이니 아주 딱딱했다. 조금만 부주의하면 잇몸에서 피가 흘렀다.

 

북송의 저명한 문학가인 소동파는 치약가루(牙粉)를 배합한 적이 있다. 그는 송지(松脂, 송진)과 복령(茯)을 원료로 하여, 말린 다음 빻아서 가루로 만든다. 작은 채로 걸른다음에, 포장한다. 다만 이런 치약가루는 칫솔과 함께 쓴 것이 아니었다. 소동파가 이빨을 닦을 때는, 작은 숫가락으로 치약가루를 뜬 다음에 입안에 넣고 물을 한 모금 마시고 구루룩 구루룩 헹군다음에 다시 뱉어내는 방식이다. 이것은 말은 이빨닦기라고 하지만, 실제는 입을 가시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북송의 저명한 과학자인 심괄(沈括)도 치약가루를 배합한 적이 있다. 그가 쓴 원료는 아주 단일했다. 고삼(苦蔘)이다. 마찬가지로 햇볕에 말려서 빻은 후 채로 가늘게 걸른다. 소동파와 달랐던 점이라면, 심괄의 이빨닦기는 칫솔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말꼬리칫솔에 맑은 물을 찍은 묻힌 다음에 치약가루를 뿌린다, 요즘과 다른 점이라면 콜게이트를 쓴 것이 아니라 고삼가루를 썼다는 점이다.

 

송나라때는 치약가루 말고 치약(牙膏)은 없었을까? 북송말기에 홍추(洪芻)가 편찬한 <<향보(香譜)>>를 보면, 십여가지 치약배합법이 소개되어 있다. 여기서는 그중 세가지만 소개하기로 한다:

 

(1) 침향 1냥반, 백단향 5냥, 소합향(蘇合香) 1냥, 갑향(甲香) 1냥, 용뇌향(龍腦香) 반냥, 사향(麝香) 반냥; 이상의 향료를 빻아서 가루로 만들고, 숙밀(熟蜜)로 개어서 죽처럼 만든다.

 

(2) 황숙향(黃熟香), 전향(香), 침향 각 반근, 단향, 영릉향, 곽향(香), 감송(甘松), 사향, 갑향, 정향피(丁香皮) 각 3냥; 이상의 향료를 빻아서 가루로 만들고, 소합향유와 숙밀로 개어서 죽처럼 만든다.

 

(3) 용뇌향, 유향(乳香) 각 반근, 청염(靑鹽) 2냥을 함께 빻아서 가루로 만들고, 숙밀로 개어서 죽처럼 만든다.

 

만일, 소동파와 심괄이 배합하여 만든 치약가루는 주로 충치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면, 상술한 세 가지 치약의 주요기능은 아마도 입안을 깨끗하고 맑게 하는 것일 것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상의 세 가지 치약이 송나라에서 그다지 보급되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원가가 아주 비싸서 일반 백성들이 감당할 수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송나라때부터 원,명,청의 삼대에 이르기까지 칫솔질은 대다수 중국인들의 생활습관으로 자리잡지 못했다. 동시에 일부 사람들은 계속 칫솔을 사용해왔다. 그 실례중 하나는 바로 원나라말기에서 명나라초기에 조선에서 만든 중국어교재인 <<박통사>>이다. 박통사에 소개된 내용중에는 시장에서 칫솔을 사는 장면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