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양려광(楊黎光)
예전에 고향으로 가면서, 심천에서 비행기로 합비까지 가고, 다시 차를 타고 안경을 간 적이 있다. 합비에서 안경으로 가는 도중에 도시가 하나를 지나게 되었는데 동성(桐城)이라는 곳이다. 마침 정오여서, 친구가 이곳에 차를 세우고 현지의 특색요리인 "수완(水碗)"을 먹어보자고 했다. 수완은 다른 중국전통요리와는 달리, 기름에 볶거나, 튀기거나 굽지 않는다. 전체 요리를 고기이건 야채이건 가리지 않고 한그릇 한그릇 물로 찌는 것이다. 그래서 '수완'이라고 부른다. 필자는 이것은 새로운 요리방식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이것은 현대영양학의 요구조건에 아주 잘 들어맞기 때문이다: 담백하고, 기름을 적게 쓰고, 소금을 적게 쓴다. 게다가 야채의 영양가치를 잘 보존한다. 필자는 이것이 분명히 먹는데 아주 신경을 많이 쓰고, 영양을 아는 사람이 만들어낸 과학적인 요리방법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식당의 주인인 장씨는 이렇게 얘기했다: "이건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은 방식입니다. 아주 오래되었지요." 아마도 그는 그래도 내가 이상하게 생각한다고 생각했는지,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 동성이 작은 동네라고 무시하지 마십시오.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과 큰 관리가 난 곳입니다. 동성파 산문팔대가를 아십니까? 방포, 유대괴, 요내가 모두 우리 동성 사람입니다. 우리 장씨성의 조상중에도 강희, 옹정, 건륭의 조손삼대황상을 모신 재상이 나왔지요." 장씨의 뜻은 아주 명확했다. 동성에는 문인도 나오고, 고관도 나왔으니, 먹는 것을 잘 아는게 당연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요즘 필자는 청나라역사를 보고 있었으므로, 바로 물었다: "당신의 조상이라는 분이 장정옥(張廷玉)이지요?"
장씨는 놀라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맞습니다.맞습니다. 바로 장정옥입니다. 아십니까?"
사료에 따르면, 장정옥은 안휘 동성 사람이고, 청나라때 보화전대학사, 군기대신을 지냈으며, 강희, 옹정, 건륭의 삼조원로이고, 관직에 50년이나 있었다. 옹정황제가 임종할 때, 그를 고명대신으로 삼는다. 사후에는 태묘에 배향되었다.청나라때 한족 대신중에 태묘에 배향된 사람은 장정옥 단 한사람 뿐이다. 만년에 80세가 되었을 때, 고향인 동성으로 돌아왔다. 1755년, 장정옥은 고향집에서 죽는다. 향년 83세였다. 청사기록에 따르면, "이십년 삼월에 졸하다. 세종의 유조에 따라, 태묘에 배향하고, 제사와 장례를 지내게 한다. 시호를 문화라 한다." 그는 사후에 동성의 교외에 안장된다. 그의 묘는 비록 문화대혁명기간동안 홍위병들에게 파괴되었지만, 지금은 지방정부에서 보호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 장씨의 식당에서 파는 특색음식인 '수완'이 옛날에 고향으로 돌아온 장정옥과 무슨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지는 알지 못하겠다. 만년에 은퇴하고 동성으로 돌아오기 전에, 희노애락이 무상하고 스스로 잘났다고 여기는 건륭황제를 자신의 손바닥에서 놀이감에 불과했던 근 80세가 된 백발이 창창한 노인이 40세도 되지 않은 건륭황제의 앞에 꿇어앉아서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하마터면 놀라서 죽을 뻔했던 사실도 있었다. 장정옥의 일생에 대한 이야기, 특히 말년의 이야기는 중국선비(士人)의 운명을 가장 잘 드러내준다. 선비는 글을 읽는 사람이다(讀書人). 고대에 글을 읽는다는 것은 과거를 위한 것이다. 과거는 관리가 되기 위한 것이다. 봉건사회에 관리가 되는 선비가 바로 사대부(士大夫)이다.
선비(士)는 중국역사상 중요한 지위를 점한 특수계층이다. 국제사학계에서 명성이 있는 여영시 선생은'선비'의 개념 및 특징에 대하여 광범위하고 깊이있는 계통적인 연구를 했다. 그는 '선비'의 범위에 대하여 명확하게 '지식인'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지식인은 고대 중국에서 '사(士)'라고 불리웠다. 그리고 '사'의 출현은 바로 '도(道)'의 관념과 분리될 수 없다. 그래서 공자는 말한다. '사지어도(士志於道)'"
사실상, '사지어도'는 선비들 스스로의 희망이다. 중국의 역사발전추세는 증명해준다. 선비들이 유지보호하고 표방하려했던 '도통(道統)' 은 황권전제의 '정통(政統)'에 의하여 계속 밀려나고, 전락했다. 선비의 지위도 날로 비천해지고, 운명도 날로 난감해졌으며 결국은 인격적인 존엄마저도 모조리 잃어버리게 된다.
오함 선생의 견해에 따르면, 사대부는 관료계층에서의 정치지위가 역사적으로 변화하는데 그 시기를 대체로 3단계로 나누어볼 수 있다고 했다. 첫번째 시기는 선진시대부터 당나라때까지이고, 두번째 시기는 오대부터 송나라까지이고, 세번째 시기는 원나라때부터 명청시대까지이다. 우리는 군신간의 예절을 가지고도 이 문제를 설명할 수 있다. 송나라이전에는 "삼공좌이논도(三公坐而論道)". 여기의 삼공은 고대관직중 최고위직인 세 직위를 말하는 것이다. 이때 대신들은 황제와 얘기를 할 때, 모두 앉아서 말을 했다. 가의와 한무제가 얘기를 나눌 때도 그러했고, 당나라때 배감은 심지어 고조와 같이 어탑에 앉아서 얘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송나라에 이르러, 사대부들은 쪼그라들기 시작한다. 송태조때부터, 황제의 앞에서 대신들은 아무도 앉을 수가 없었다. 그저 황제 한 사람만 앉았다. 모든 대신들은 나이가 얼마이든간에 서있어야 한다. 삼공입이논도(三公立而論道)가 되어버린 것이다. 명청의 사대부들은 더욱 쪼그라들게 된다. 앉는 것이 허용되지 않을 뿐아니라, 서있는 것도 안된다. 반드시 무릎을 꿇고 아뢰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칠팔십세의 노인대신들이 십여세 심지어 몇살밖에 되지 않은 황제의 앞에 모조리 꿇어앉아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당시의 고관들은 조회에 참석할 때 의복의 안에 특별히 만든 무릎보호대를 붙였다. 오래 꿇어앉아 있게 되면 무릎이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청나라때가 되어서는 황제의 앞에서 무릎을 꿇을 뿐아니라, 스스로를 "노재(奴才)"라고 불러야 했다. 앉아있다가 서게 되고, 다시 서 있다가 무릎을 꿇게 되고...이것은 아주 생동감있게 역사상 군신관계의 변화를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또한 사권(士權)과 신권(紳權)이 계속 쇠락하고, 황권은 계속 제고되는 것을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선비는 중국의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일찌기 이상을 품고, 민족정신을 주도하고자 하고, 역사의 방향을 바로잡고자 하며, 사회모델을 설계하는 엘리트그룹이다. 그들의 흥기와 쇠락, 그들의 각성과 미망, 그들의 쾌락과 고통...결론적으로 그들의 운명은 전체 국가와 민족의 품격과 기품을 결정한다. 그들의 희노애락은 역대사회에서 가장 전형적이고, 가장 대표적인 인생의 모습이었다.
중국의 수천년 역사를 되돌아보면, 우리는 중국선비들이 어떻게 자신의 인격과 정신을 잃어갔는지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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