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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무측천)

신룡정변(神龍政變): 무측천의 최후의 나날 (II)

by 중은우시 2008. 10. 8.

 

5

 

소위 "남총(男寵)"은 바로 면수(面首)이며, 자신의 몸을 가지고 권세를 가진 여자를 기쁘게 하는 남자를 말한다.

 

무측천도 정상적인 생리적 욕구가 있고, 거대한 심리적 압력을 받았다. 복잡한 정무를 처리한 후에는 그녀도 안위가 필요했다. 누군가 곁에 있어주어야 했다. 나이가 들면서, 무측천은 권력으로 인하여 점점 더 고독해 졌고, 마음이 허해졌다. 이때 장역지, 장창종 형제가 그녀의 심리적 공백을 메워주게 된다.

 

장역지는 무측천이 만년에 가장 총애했던 신하이다. 그는 정주 의풍(지금의 하북 안국) 사람이다. 용모가 잘 생기고 피부가 희었으며, 음율과 가사에 능했다. 조건이 아주 뛰어나서, 남총의 기본은 모두 갖추었다. 장씨집안도 대대로 관료집안이다. 원래는 면수를 할 사람은 아니다. 처음에 장역지는 문음(門蔭)으로 상승봉어의 직위를 맡았다. 다만, 이런 자잘한 관리는 그의 야심에 차지 않았다. 하늘에서 복이 떨어지기를 바란 것은 아니지만, 태평공주는 장역지의 동생인 장창종을 궁중에 들어가서 무측천을 모시도록 추천해주었다. 나중에 장창종은 다시 무측천에게 형인 장역지를 추천한다. 장역지는 동생보다 일처리를 잘했고, 여자를 모실 줄 알았다. 그리하여 무측천의 총애를 받고, 전답과 옥,비단을 수도없이 받으며 관직도 계속 승진을 거듭하여, 사위소경, 공학감내봉공, 봉신령, 인태감을 맡았고, 항국공(恒國公)이 되었다.

 

장역지와 장창종의 두 사람은 여황제의 총애를 등에 업고, 권력을 농단하고 발호하였다. 조정백관이 모두 그들을 무서워했다. 심지어 무측천의 조카들도 서로 다투어 장역지의 말을 끌어주려고 했다. 그리고 그를 '오랑'이라고 부르고 감히 이름을 바로 부르지 못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의 행위는 많은 사람의 불만을 샀다.

 

이현의 아들 이중윤(李重潤), 영태군주의 오누이는 두 장씨의 권력남용에 대하여 얘기한 바 있는데, 생각도 못하게 장역지의 이목에 탐지되었고, 그는 무측천에게 과장되게 이를 일러바쳤다. 무측천은 태자 이현을 질책하고 욕하였을 뿐아니라, 이현으로 하여금 자녀를 국문(鞫問)하도록 명령한다. 어쩔 수 없이 이현은 아들과 딸을 자결하도록 시킨다. 이어서 장씨형제는 영태군주의 남편인 위왕 무연기를 감옥에 가두게 하고 죽게 만든다. 이렇게 하여, 장씨형제는 이씨와 무씨의 모두에게 원한을 산다. 이현, 이단, 태평공주 그리고 무씨의 각 자제는 장역지형제를 반대하는 일에는 바로 컨센서스를 이루게 된다. 그들이 연결되고 암중으로 상의하게 된다.

 

장역지 형제는 정치적으로 바보는 아니다. 왜 이런 잘못된 선택을 했는가? 사실, 권력은 인성을 왜곡시킨다. 자연히 사람으로 하여금 이성적인 판단능력을 상실하게 한다. 장씨형제도 이런 경우이다. 그들은 자신을 이씨와 무씨의 반대편에 두었고, 무측천의 사후에 장씨집안이 어떻게 될 것인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6.

 

무측천은 장역지형제의 후사에 대하여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그녀에게 있어서 남총에 불과했다. 무슨 살길을 마련해줄 필요까지는 없는 것이다. 무측천은 무엇때문에 바빴는가? 그녀는 자기의 사후에 적합한 승상을 고르고자 했다.

 

무측천이 고른 사람은 한양군왕에 봉해진 장간지(張柬之)였다. <<장간지전>>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장역지형제를 죽임에, 간지가 먼저 이 일을 모의했다" 무측천이 고르고 고른 승상이 신룡정변의 주모자가 된 것이다. 무측천이 사람을 잘못 본 것인지, 아니면 역사의 필연인지?

 

장간지가 승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사람들이 볼 때 기적이었다. 장간지는 능력이 출중했고, 자격도 있었지만, 신룡원년에 이미 80세였다. 80세의 노인은 현재도 고령이지만, 당나라때는 정말 드문 사람이었다. 장간치를 선택하여 후사를 처리하게 한 것은 무측천이 아마도 그의 정치경험과 정치포부를 좋게 본 것일 것이다. 장간지는 관료로 오랫동안 있으면서 인맥이 넓고, 경험이 풍부하고, 기교를 알고, 정치능력이 있었다.

 

전 승상인 적인걸은 일찌기 장간지를 극력 추천했다고 한다. 적인걸은 무측천의 가장 중요하고, 가장 신임하던 대신이다. 무측천이 황제가 된 후, 이당종실의 대신들은 많이 해를 입었는데, 적인걸만이 충성, 정직, 능력으로 총애를 받았다. 적인걸은 드물게 보는 직언할 줄 아는 사람이고, 무측천이 받아들이는 사람중 하나였다. 그의 많은 건의는 관철되어 국가의 정책이 된다. 이외에, 적인걸은 재덕을 겸비한 인재를 많이 추천하였다.

 

무주왕조가 건립된 초기에, 무측천은 적인걸에게 장상(將相)의 인재를 추천해보라고 하였다. 그때 적인걸은 형주자사를 맡고 있던 장간지를 추천한다. 장간지가 입경하여 관직을 맡았는데, 오래지 않아 무측천의 뜻을 거슬려 경사에서 쫓겨난다. 외지로 보내어진다. 나중에 무측천은 다시 적인걸에게 인재를 추천해보라고 하는데, 적인걸은 여전히 장간지를 추천한다. 무측천은 그 자는 내가 써보았다고 말한다. 적인걸은 "제가 폐하에게 추천하는 것은 재상의 재목입니다. 다만 장간지에게 재상을 맡긴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무측천은 다시 요숭(姚崇)에게 재상의 재목을 추천해보라고 한다. 요숭도 장간지를 추천한다: "장간지는 과묵하면서 지모가 있다. 비록 나이는 들어도, 과감하게 일처리를 한다. 폐하께서 시급히 써야할 인재이다" 무측천은 그제서야 장간지를 부른다. 그리고 그를 봉각난태평장사로 임명하고, 금방 봉각시랑으로 승진시켜 조정의 정사를 맡게 한다.

 

장간지는 나이가 많았지만, 공을 세울 기회를 보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재상이 되자마자,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바로 조치를 취한다. 한꺼번에 많은 돈을 들였다.

 

장간지는 이당왕조를 그리워했다. 이당왕조를 회복시킴으로써 무주의 어지러움을 바로잡고자 했고, 세상과 백성을 구하고자 했으며, 자신의 이름을 청사에 남기고자 했다. 그는 이미 80세이다. 반드시 시간을 잘 잡아서 행동에 들어가야 했다. 그리하여 그는 정직한 대신과 일부 우림군장령과 연락하고, 앞장서서 장씨형제를 제거하고 당나라를 부활시킬 계획을 조직, 기획한다. 모든 기획방안중에서, 이당의 맥을 잇는 태자 이현의 협조는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이현이 얼굴을 들이미는 것은 정변의 호소력을 높일 뿐아니라, 향후 가장 이상적인 황제후보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장간지는 암중으로 이현을 찾아 상의한다. 이현은 잠시 머뭇거린 후, 정변에 참여하는데 동의한다. 유약하고 겁이 많던 이현이 왜 정변에 참여하는데 동의하였을까? 왜냐하면 장역지형제를 죽이는 문제에 있어서, 그와 대신들은 이익이 일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신들이 그를 옹립하여 이당왕조를 회복하는 그림은 그의 마음 속에 깊이 숨어있던 명예감과 책임감을 불러 일으켰다.

 

이에 이르러, 이현이 명의상의 우두머리가 되고, 장간지가 주모자인 정변집단이 형성된다.

 

7.

 

장안4년(704년) 십이월, 80세가 된 무측천은 병으로 영선궁으로 옮겨서 거주한다.

 

무측천의 병세는 아주 심각했다. 영선궁에는 장역지 장창종만이 그녀를 좌우에서 모셨다. 외부인은 들어갈 수 없었다. 심지어 재상조차도 그녀를 볼 수 없었다. 역사에는 "무측천이 위독했다. 장역지와 장창종형제가 입각하여 병을 수발했고, 역모를 꾀했다"고 적었다. 장씨형제가 역모를 계획했는지 여부는 확실한 증거가 없다. 다만, 장역지 형제는 무측천이 죽은 후 권세가 없어질 것을 두려워했고, 화가 머리위에 떨어질 것을 겁냈다. 그리하여 우림군장수와 일부대신과 연락하여 불측을 예방하려한 것도 가능한 일이다. 사실이 어찌되었건 간에, 당시 장안에는 '장역지 형제가 모반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장간지와 환언범, 경휘등 대신은 이 기회에 장역지를 주살하고, 병중의 무측천에게 양위하게 하여 당나라를 회복시키기록 결정했다. 장간지는 직권을 이용하여 신속히 환언범, 경휘등 두 사람에게 우림장군을 맡게 하고, 금병(禁兵)의 지휘하게 함으로써 정변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당시 황태자인 이현은 북문에 기거하고 있었는데, 환언범과 경휘는 금군장군의 신분으로 이현을 배알했고, 정변계획을 상세히 보고하여, 태자의 동의를 받았다. 장간지는 이전에 외지에서 자사를 지냈으므로, 형주자사 양원염과는 서로 마음이 잘 맞았다. 무주왕조의 난맥상을 개탄하면서, 두 사람은 서로 약속한 바 있다: "언젠가 우리중 하나가 뜻을 얻으면, 서로 도와서 나라를 회복하자" 그리하여, 장간지는 이때 양원염을 추천하여 우림장군을 맡게 한 후 공동으로 정변을 계획했다.

 

신룡원년(705년) 정월, 무측천의 영선궁에서의 소식이 점차 줄어들었다. 정변집단은 이를 틈타서 정변을 일으켰다. 장간지, 환언범, 경휘는 좌우림장군 이담, 이다조, 우우림장군 양원염, 좌위위장군 설사행등과 함께 좌우우림관병 오백여명을 이끌고 궁중으로 출발했다. 그중 이담, 이다조의 두 사람은 동궁으로 가서 황태자 이현을 맞이하였다. 이현은 의연히 궁을 나서, 우림군의 앞에 섰따. 일행이 현무문에 도착했을 때, 관병들은 태자가 나온 것을 보고는 만세를 불렀다. 장간지, 환언범등은 이현을 모시고 영선궁으로 밀고 들어갔다. 궁문입구의 수비병사들과 약간의 충돌은 있었으나, 여러 사람은 이현을 모시고 문을 뚫고 들어갔다.

 

당시, 무측천은 영선궁 집선전에서 병치료중이었다. 장역지, 장창종의 두 사람은 집선전내에서 바깥이 소란스러운 것을 들었다. 병기를 들고나와서 바라보니, 우림장군이 흉맹하게 밀고 들어오며 막는 자들을 죽이고 있었다. 그들 장씨 형제도 피살당했다. 나중에 장씨형제의 시신은 천진교의 남쪽에 걸어두어, 방안의 백성들이 이를 보고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어떤 사람은 그들의 살을 베어내었다. 하룻밤만에 장씨 형제의 시신은 그저 뼈다귀만 남게 된다.

 

집선전내의 무측천은 바깥이 소란스러운 것을 듣고는 변고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병구를 이끌고 나가서 살펴보았다. 보니 장씨형제는 시신이 되어 복도에 쓰러져 있었다. 장간지등이 검을 쥐고 밀고 들어왔다. 그녀는 개략적으로 상황을 눈치챘다. 무측천은 어쨌든 노련한 정치가였다. 그녀는 천천히 병상으로 돌아와서 앉았고, 힘을 모아서 소리쳤다: "누가 소란을 피우는가?" 장간지는 이현을 앞장세우고 들어왔다. 무사들에게는 병상앞으로 가서 서도록 했다: "장역지, 장창종이 모반했습니다. 신등은 태자를 모시고 들어와서 두 역적을 주살했습니다. 계획에 새어나가지 않도록 사전에 황상에게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무측천은 강경하게 장간지의 말을 잘랐다. 노한 눈을 부릅뜨고 이현을 노려보며 물었다: "이게 네 생각이냐? 네가 어찌 이럴 수가 있느냐? 현재 장씨 두 형제는 이미 주살당했으니, 너는 빨리 동궁으로 돌아가지 못하겠는가?"

 

장간지도 마찬가지로 강경하게 말했다: "태자는 다시 동궁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이전에 고종황제는 태자전하를 폐하에게 부탁했는데, 이제 태자의 나이가 이미 많습니다. 하늘의 뜻과 민심이 모두 태자에게 돌아갔습니다. 신등은 태종, 고종황제의 후은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태자를 모시고 적당을 주살한 것이오니, 폐하께서는 태자에게 전위하여 주셔서, 위로는 천심을 따르고, 아래로는 민심에 부응해주십시오."

 

무측천은 이제서야 장간지의 이번 행동이 단순히 장간지형제를 주살하는 간단한 것이 아님을 알았다. 그리고 자신의 황위를 노린 것임도 알았다. 돌연, 그녀는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다시는 아들과 대신들과 더 이상 싸울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 상황을 보자, 장간지는 바로 몸을 굽혀 꿇어앉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 "황상의 은준에 감사드립니다"

 

8

 

신룡정변의 피바람은 그날의 장씨형제의 죽음에서 그쳤다. 장간지와 이현은 더 이상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병중의 무측천은 적절히 안치되고, 그녀는 정권을 이현 감국에게 넘겨주었다. 오래지 않아서는 이현에게 선위(禪位)하고는 "대성황제"가 되었다.

 

1년후, 무측천이 사망하기 전에, 조정은 적시에 무측천의 유언을 공포했다. 무측천은 유언에서 이당황조의 종묘에 들어가겠으며, 남편 당고종과 합장되겠다고 말했다. 그녀는 자진해서 황제의 칭호를 없애고, "측천대성황후(則天大聖皇后)"로 개칭했다. 사람이 죽기 전에 하는 말을 선하다는 말이 있다. 조정에서 공포한 그녀의 이 부분 유언은 아마도 그녀의 참뜻이 아닐지도 모른다. 다만, 이후에 공포된 무측천의 정적인 왕황후, 소귀비 저수량, 한원등의 자손친척의 죄행을 사면하고, 그들의 직위를 회복시키는 내용은 아마도 그녀의 참뜻이었을 것이다.

 

며칠 후, 무측천은 상양궁 선거전에서 사망하니 향년 83세이다. 시호는 "측천대성황후"이다. 당고종의 건릉에 합장되었다. 일대여황은 결국 당나라의 황후 자격으로 건릉에 들어갔다.

 

9

 

정변후, 장간지는 한양왕(漢陽王)이 되고, 경휘는 평양왕(平陽王), 환언범은 부양왕(扶陽王), 원서기는 남양왕(南陽王), 최현휘는 박릉왕(博陵王)에 봉해진다. 세상에서는 이들을 오왕(五王)이라고 불렀다. 그리하여, 신룡정변은 "오왕정변"이라고도 부른다.

 

장간지등의 정변행위에 대하여, 당시와 후세인들은 모두 긍정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러나, 장간지등 5사람의 최후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당초, 경휘와 환언범등은 장역지형제를 주살한 후, 낙주장사 설계창이 경휘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두 흉적은 비록 제거되었으나, 여산, 여조와 같은 인물이 여전히 남아 있다. 대인들은 당연히 무삼사등을 주살하여, 왕실을 바로잡고 천하를 안정시켜야 한다" 경휘는 여러차례 장간지에게 제안하였으나 장간지는 동의하지 않았다. 나중에 이렇게 설명했다: "그것은 황상의 일이다. 황상이 영왕일때 용맹한 것으로 유명했다. 내가 무씨자제를 남긴 것은, 황상이 친히 이들을 제거하여 위엄을 세우도록 하기 위함이다." 나중에 경휘도 계속 고집하지 않았다. 설계창은 이렇게 한탄했다: "나중에 어느 곳에서 죽을지 모르겠구나!"

 

일의 진전은 역시 설계창이 예상한대로 진행되었다. 무삼사는 위황후와 결탁하여, "안으로는 재상의 일을 행하고 국정을 마음대로 하였다" 무씨가족과 그 일당이 여전히 권력을 장악하여, "천하의 우환"이 되었다. 나중에 장간지등 5인은 무삼사와 위황후에 의하여 모두 좌천된다. 경휘는 군권을 잃고 무삼사의 명령을 받게 되자, 매일 침상을 손가락으로 치면서 애석해 했다. 결국 손가락에서 피가 났다. 애주로 부임한지 얼마되지 않아 피살당한다. 이어서, 장간지는 신주에서 우울병으로 죽는다. 최현휘는 영남에서 병사하고, 환언범, 원서기의 두 사람은 이현이 보낸 사자에게 살해당한다.

 

 장간지등이 죽은 후, 멍청한 당중종 이현은 전환점에 놓인 대당천하를 제대로 장악하지 못했다. 새로운 정변, 새로운 변란이 장안성에서 잉태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