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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무측천)

신룡정변(神龍政變): 무측천의 최후의 나날 (I)

by 중은우시 2008. 10. 8.

글: 장정(張程)

 

1

 

무측천(武則天)은 50년의 시간을 들여 권력경기장을 접수하고, 최고통치자가 된 여인이다.

 

690년, 무측천은 정식으로 황제를 칭하고, 당나라를 주(周)나라로 바꾼다. 이 전무후무한 여황제는 이미 이 날을 위하여 청춘과 세자녀(2남1녀)를 포함한 참혹한 댓가를 치렀다. 누가 생각했으랴. 등극은 단지 더욱 복잡한 일련의 갈등이 폭발하는 출발점이 될 줄을. 무측천의 주나라는 건국초부터 이런 저런 문제가 있었다. 비록 그녀가 이리저리 지탱하고, 힘들여 경영했지만, 겨우 15년을 버텼을 뿐이다.

 

영웅의 말년은 왕왕 그 영웅의 진면목을 느끼게 하고, 영웅의 필생동안 분투한 궤적을 반영한다. 705년, 무측천은 연호를 "신룡(神龍)"으로 변경한다. 이해는 신룡원년으로 칭해진다. 그리고 바로 이 해에, 말년의 무측천은 비상한 방식으로 권력경기장을 떠나게 된다. 후세 사람들은 이 변고를 "신룡정변(神龍政變)"이라고 부른다.

 

당나라 이씨황실이 보기에 15년의 무씨 주왕조의 역사는 탁자위에 드러낼 수 없는 것이다. 후대 이당왕조는 이에 대하여 피휘하고 절대로 언급하지 않았다. 마치 690년부터 705년의 역사는 공백인 것처럼. 그러므로, 원시사료에 남겨진 신룡정변에 관한 내용은 아주 적다. 그리하여 우리는 신룡정변의 본모습을 되살리는데 애를 먹게 된다. <<구당서>>를 예로 들면, <<무측천본기>>에 이 정변에 대한 묘사는 빈칸이다: "신룡원년 춘정월 .... 인태감 장역지는 동생 사복경 장창종과 반란을 일으켰다. 황태자는 좌우 우림군 환언범, 경휘등을 이끌고, 우림군이 금지로 들어가 이들을 죽였다. 갑신, 황태자가 감국을 하여 만기를 통람하고,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린다. 그 날, 황상은 황제위를 황태자에게 넘겨주고, 상양궁으로 옮겼다. 술신, 황제는 존호를 올려 '측천대성황제'라고 하였다" 이 기재는 황태자 이현이 우림군을 이끌고 금궁을 쳐들어가 간신 장역지, 장창종을 주살하고, 정권을 빼앗았으며, 무측천을 핍박하여 황제위를 넘겨주게 한 내용이 그대로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당중종이현본기>>의 기재는 더욱 많은 정보를 알려준다: "그 때 장역지와 동생 장창종은 역모를 꾀했다. 신룡원년 정월, 봉각시랑 장간지, 란태시랑 최현휘, 좌우림장군 경휘, 우우림장군 환언범, 사형소경 원서기등이 계획을 세워 우림군을 이끌고 장역지 장창종을 죽인 후, 황태자를 감국으로 하여 정사를 총괄하도록 하였다.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린다. 을사, 측천은 황태자에게 황위를 물려준다. 병오, 통천궁에서 황제에 즉위하고, 천하에 대사면령을 내리나, 오로지 장역지의 일당은 제외했다" 이현의 전기는 상당한 정도에 있어서 무측천의 전기와 모순된다. 전기에서 장역지, 장창종을 주살한 주모자는 황태자 이현이 아니다. 이현은 그저 피동적인 참여자이고, 실제로는 환언범, 경휘, 최현휘, 장간지, 원서기등의 중신들이 간신을 죽이고 무측천을 몰아내는 행동을 기획한 것이다.

 

<<구당서. 열전 제41>>은 환언범, 경휘, 최현휘, 장간지, 원서기의 다섯 사람의 합전이다. <<경휘전>>에서는 그가 장역지 장창종을 주살한 공로만을 적고, 과정에 대하여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원서기전>>은 그저 그가 간신을 주살하는 모의활동에 참여했고, 정변에 참여했다고만 적었다; <<최현휘전>>은 그저 간단하게 그가 간신을 주살하고 황상을 옹립하는데 공을 세웠다고만 적었지, 구체적으로 어떤 공로인지는 적지 않았다; <<환언범전>>은 다섯 사람의 전기중에서 그리고 <<구당서>>의 모든 내용중에서 신룡정변에 대한 묘사가 가장 상세하고, 가장 구체적이며, 다른 세부적인 내용에 연결된다. 아래에서 최대한 이 중요한 정변의 진실한 모습을 되살려보기로 하자.

 

2.

 

698년, 무측천의 신체상황이 갈수록 나빠졌다. 여러 신하는 주청을 드려 무측천이 여릉왕(廬陵王) 이현을 경성으로 부른다.

 

유배가있던 이현의 귀경문제는 왕조정치의 핵심문제에 미치게 된다. 그 원인은 황제 무측천이 여성이기 때문이다. 무측천은 여황제이므로, 그녀가 죽은 후 황위는 자기의 아들인 이씨성의 이현(李顯) 혹은 이단(李旦)에게 넘길 것인가? 아니면 같은 성씨의 조카인 무삼사(武三思)등에게 넘길 것인가? 서구의 정치에서는 이것이 큰 문제로 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봉건예법관념이 뿌리깊은 중국에서 이것은 국체,국운의 근본문제였다. 황제의 성씨가 변경된다는 것은 왕조의 교체를 의미한다. 무측천의 성은 무씨이므로, 무삼사등이 권력을 계승한다면 이는 무주(武周)왕조가 연속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이현이 황위를 잇는다면, 이것은 무주왕조의 종결과 이당(李唐)왕조의 부활을 의미한다.

 

현재 대신들은 집단적으로 여릉에 유배가있는 이현을 불러오라고 주청드렸다. 이것은 무씨정권에 대하여 소리없는 부저추신(釜底推薪)의 반항이다.

 

무측천은 다른 황제들 보다 훨씬 더 큰 희생과 댓가를 치르고 권력의 정점에 올랐다. 그리하여 그녀는 수중의 권력을 아주 귀하게 여겼다. 황제에 등극한 후, 그녀는 계속하여 후계자문제를 생각했다. 만년이 되어서는 더욱 이에 골몰했다. 그녀의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이씨와 무씨중 어느 하나를 버리고 택하기가 어려웠다. 계속하여 욕심을 드러내는 무삼사등은 자신과 같은 무씨의 후예이다; 이현, 이단의 두 아들은 아주 착실하고 조심스러우며 둘 다 황제를 지낸 적이 있다. 대신들의 마음 속에는 이당왕조에 대한 감정이 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자신이 죽은 후에 다시 이당왕조를 부활시키길 바라고 있다.

 

대신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무측천에게 황제위는 당연히 아들에게 물려주어야 한다고 설득했다. 이렇게 하여야만 무측천이 하늘로 올라간 후, 대대손손 제사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만일 황제위를 무삼사등에게 물려주면, 무삼사등의 즉위자는 자신의 부모, 조부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지낼 것이며, 그 때가 되면 고모인 무측천의 지위는 어정쩡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무측천도 이런 가능성을 잘 알았다. 다만 천하를 다시 이씨에게 두손으로 바치고, 자신의 무주왕조를 끝장내는 것도 결심하기 어려운 일이어서, 최종결정을 미루고 있었다.

 

"왜 천하는 남자만 제왕이 될 수 있도록 하는가?" 후계자문제도 좋고, 종법제도 좋다. 가장 근본적인 사고는 역시 여기로 귀결한다. 무측천은 부득이 한탄할 수밖에 없다. 무주왕조는 아직도 여전히 뿌리깊은 남성주도의 천하이다. 비록 무측천이 십여년동안 여황제의 권위를 수립하였고, 정치제도에 여성의 색채를 뒤덮었지만, 그래도 결국은 실패한 것이다. 후계자문제의 곤혹은 그녀가 10여년동안 해온 성별반항이 그다지 실질적인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측천의 병세가 위중해지면서, 황위계승자의 문제가 조야의 촛점이 된다.

 

널리 알려진 <<적공안(狄公案)>>에는 무측천의 남총인 장역지가 적인걸에게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대책을 묻는 내용이 있다. 이씨의 굳건한 지지자인 적인걸은 장역지에게 무측천에게 여릉왕 이현을 후계자로 하도록 권하라고 한다. 신황제를 옹립하는 공로만이 스스로의 화를 면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당시, 무측천에게는 무삼사를 태자로 삼고자 하는 뜻이 있었다. 그리하여 조정신하들에게 어떤지 물어보았다. 대신들은 얼굴을 서로 쳐다보며, 감히 대답하지 못했다. 적인걸은 그 때 말한다: "천하백성은 여전히 당나라를 생각하고 있다. 이전에 북방에서 변방에 변고가 있어, 폐하께서 양왕 무삼사를 파견하여 병사를 모으게 하였는데, 1개월동안 겨우 1천명이 모였다. 나중에 여릉왕 이현으로 하여금 가서 병사를 모으게 하니, 며칠만에 5만명이 모였다. 만일 후계자를 선택한다면, 여릉왕이 아니면 안된다" 무측천은 그 말을 듣고 대노하여, 소매를 떨치고 들어가 버린다.

 

나중에 무측천은 다시 대신들에게 묻는다: "짐은 자주 꿈에 쌍육(雙陸)을 하는데, 이기지를 못한다. 해몽을 해보라" 그 자리에 있던 적인걸과 왕방경이 대답한다: "쌍육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은 아들이 없다는 뜻이다. 이는 하늘이 폐하를 경고하는 것이다. 태자는 천하의 근본인데, 근본이 흔들리면 천하가 위험하다. 폐하가 사해에 군림한지 이미 10여년이 되었는데, 이제 무삼사를 태자로 삼고자 한다. 고모와 조카, 모친과 아들. 어느 것이 더 가까운가? 폐하가 여릉왕을 태자로 삼으면, 천추만세에 걸쳐 종묘에 모셔질 것이다. 무삼사를 태자로 하면, 종묘에는 폐하의 고모라는 자리는 없어질 것이다" 무측천은 그제서야 느끼는 바가 있었다.

 

장안원년(701년) 구월, 무측천은 마침내 서언백을 보내어 여릉왕을 장안으로 데려온다. 이현이 장안에 도착한 후, 무측천은 그를 장중에 숨기고 다시 적인걸을 부른다. 고의로 태자를 세우는 일을 협의하려는 것이다. 적인걸은 간절하게 눈물콧물을 다 흘리면서, 이현을 모셔서 태자로 세우라고 말한다. 무측천은 그제서야 이현을 불러내고는 말한다: "너에게 태자자리를 주겠다". 적인걸은 절을 하고 고개를 숙이고는 슬픔이 기쁨이 되어 말한다: "태자께서 돌아오셨지만, 아직 사람들이 모르고 있어, 말들이 많다. 이렇게 해서야 어찌 사람들이 믿겠는가?" 그리하여 무측천은 이현이 공개적으로 나타나도록 하였다. 대신들이 대례로 맞이하고, 조야가 기뻐했다.

 

3

 

장안의 사자가 마음이 급하여 방주의 이현이 연금된 곳으로 갔을 때, 이현은 절망에 빠져 있었다.

 

이현은 왜 이렇게 소극적으로 반응했을까? 여기에는 그의 순탄하지 않은 경력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이현은 당고종 이치와 무측천의 사이에서 나온 셋째아들이다. 당고종의 여덟명의 아들 중에서 일곱째이다. 먼저 주왕에 봉해졌다가, 나중에 영왕(英王)이 되어, 거의 황제자리와는 관계가 없어 보였다. 680년, 이현은 황태자가 되고, 3년후 당고종이 병사하자 이현이 즉위하니 바로 당중종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현은 성격이 유약하고, 간이 작다. 각측면의 능력도 모두 보통이다. 허수아비로는 딱맞는 스타일이다. 무측천은 권력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다. 당고종의 첫째아들인 태자 이충(李忠)은 무측천의 소생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금방 축출되고 죽임을 당한다; 무측천의 장남인 이홍(李弘)은 두번째 황태자가 된다. 다만 생각이 모친과 달라서 충돌한 다음에 원인불명으로 급사한다; 둘째아들 이현(李賢)은 세번째 태자이다. 그는 허수아비가 되기 싫어하여 쫓겨난다. 4년후 유배지인 파주에서 핍박으로 자살한다. 세 형들의 일을 경험으로 삼아, 이현은 경중을 잘 헤아렸다. 그리하여 사사건건 모친의 명에 따랐다. 불행한 것은 그가 금방 모친에게 핑계꺼리를 붙잡히게 된 것이다.

 

즉위한지 1개월도 되지 않다, 감국지위에 만족하지 못한 무측천은 이현이 장인인 위씨에게 관직을 내리겠다고 화난 끝에 한 말을 핑계삼아 그를 폐위시킨다. 여릉왕으로 강등된 이현은 이때부터 연금생활을 하게 된다.

 

연금된 이현은 잘 알았다. 자기는 연금장소에서 급사할 수도 있고, 자결을 명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이것은 모두 예상할 수 없는 일도 아니었다. 그리하여 그는 매일 전전긍긍했고, 겁에 질려서 살았다. 바깥에서 무측천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무주를 타도하자" "이현을 광복시키자"는 말이 나오면 이는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일이었고, 그의 내심의 공포는 더욱 심해졌다. 그는 자신의 존재 자체에 대하여 모친이 권력에 위협으로 느끼지 않을까 우려했다.

 

유배지와 연금장소에 있던 이현은 위험이 언제나 도사리는 어두운 생활을 했다. 수감자보다 훨씬 무거운 심리적 압박을 받으며 살았다. 심지어 매일 죽음이 올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직 도래하지 않은 그날은 그로 하여금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더욱 무서움에 떨게 만들었다. 이현은 여러해동안 불안 속에서 살았고, 자주 한밤중에 악몽으로 깨곤 했다. 두려움에 떠는 눈으로 별이 지는 것을 보고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보며 지냈다.

 

현재 장안의 사자가 마침내 왔다.

 

<<구당서>>의 기록에 의하면, "황상은 칙사가 왔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두려움에 자살하려고 하였다" 매번 장안에서 사자가 오기 전에, 이현은 간헐적인 정신이상증세를 보였고, 칼을 뽑아서 자살하겠다고 난리를 쳤다. 이번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의 곁에 있던 처 위씨가 마음을 다잡고 남편에게 말했다: "인생은 화복이 무상하다. 누구나 마지막에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우리는 당당한 황실의 사람인데, 이럴 필요가 있는가?" 그래서 이번에는 이현부부가 손에 손을 맞잡고 같이 사자를 맞이했다.

 

사자는 조서를 꺼낸 후 읽었다: "여릉왕을 태자로 봉한다. 동도(東都)로 돌아오라"

 

4.

 

하마터면 자살할 뻔했던 이현은 졸지에 태자가 되어, 정치무대의 중심으로 돌아왔다.

 

귀경한 후, 이현은 계속하여 꼬리를 감추는 외에, 더욱 총명해졌다. 그는 자기를 개조하여 "무씨(武氏)"가 되었고, 무씨들과 잘 지내려고 하였다. 그는 딸 하나(영태군주)를 무측천의 조카손자인 무연기에게 시집보내어, 위왕 무승사의 며느리가 되도록 했다. 또 다른 딸(안락군주)은 무측천의 또 다른 조카손자인 무숭훈에게 시집보내어, 양왕 무삼사의 며느리가 되도록 했다. 이현과 무씨의 혼인은 자녀관계를 통하여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함이었다. 무측천의 내심으로 가장 신경쓰는 것은 이씨와 무씨의 두 집안이 자기가 죽은 후에 어떻게 될 것인가였다. 현재 후계자인 이현이 일부러 무씨와 관계를 개선하자, 그녀는 아주 만족해 했다.

 

국내의 갈등을 완화시키고, 권력의 순조로운 이양을 위하여, 무측천은 사면령을 내린다. 마침 무측천이 병을 얻어서, 이번 사면은 폭이 넓었다. 조정은 문명원년(684년)이후 죄를 범한 사람은 양, 예, 박의 3개주 및 각 사건의 수괴를 제외하고는 일률적으로 사면했다.

 

무측천은 이미 사전에 사후준비를 해두었다. 그녀는 사방을 둘러보고 가장 안심할 수 없었던 것이 바로 무씨집안의 자손들이었다. 그녀는 이미 이현의 후계자지위를 명확히 하였는데, 무씨집안사람들의 정서는 어떻게 다독거릴 것인가? 어떻게 무씨집안사람들의 이후 안전과 권위를 확보하게 할 수 있을까?

 

이전에 북방의 변경에서 거란부락이 반란을 일으킨 바 있다. 부락의 수령은 스스로 '칸'을 칭했다. 이는 바로 나중에 요나라를 세우는 거란부락이다. 다만 이때는 아직 그다지 강대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저 자잘한 반란에 불과했는데, 무측천은 여러 무씨집안의 자제를 장수로 세워 대거 반란을 평정하도록 한다. 비록 많은 대신들이 이에 대하여 불만을 표시했지만, 무측천은 신속히 대군을 모아서 무씨집안 자제들에게 이끌고 나가서 토벌하게 하였다. 반란을 평정하는 것은 별 일이 아니지만, 이를 빌미오 무씨자제들이 힘을 모으고, 전공을 수립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때의 무측천은 사후 무씨자제의 운명에 대하여 걱정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씨와 무씨가 서로 사이좋게 지내면서 부귀를 누리기를 바랐던 것이다.

 

말년의 무측천은 잠재의식속에 한 두 가지 판단은 정확했다. 하나는 그녀는 정확하게 자신의 사우에 무주왕조가 전복되고, 이씨황족이 당나라를 회복할 것을 알았다. 다른 하나는 그녀는 무씨자제의 권력기초는 자신을 기반으로 한 것이므로, 자신의 사후에 여러 신하들 중에서 명성이 좋지 않은 무씨자제들은 권력을 잃을 것이고, 명운이 나쁠 것이며, 가장 최악의 결과는 무주왕조가 전복된 후, 무씨자제들이 멸족되는 경우일 것이다.

 

이런 결과가 타타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최소한의 무씨자제들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하여, 무측천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런 목표를 달성하려고 애를 썼다. 얼마남지 않은 시간에 정치적인 배치를 한 것이다. 그러나, 무측천의 이런 배려는 두 남총인 장역지, 장창종에 의하여 심각하게 파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