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정치/중국과 일본

현방(玄昉): 환관이 된 일본견당사

중은우시 2009. 11. 13. 17:23

글: 장풍(蔣豊)

 

견당사(遣唐使), 이는 중일양국교류사상의 아름다운 이야기 한토막이다. 또한 사람들이 중일우호의 역사연원을 얘기할 때면 반드시 언급하는 일이기도 하다. 다만, 아마도 여기에 적힌 얘기를 들어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중국의 당나라때 일본견당사를 거세하여 환관으로 만들었던 적이 있었다.

 

최근에 풍조혜개(風早惠介)가 쓴 <<수수께끼의 인물 - 염본일본사(일본문예사출판, 1992년 10월 제1판)>>을 읽어보았는데, 거기에 "화관 현방"의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원래 필자는 일본이 중국문화를 받아들일 때, "전면적인 중국화"를 한 것이 아니라, 선택적으로 골라서 받아들였다고 알고 있었다. 과거제도라든지, 환관제도라든지, 여자의 전족이라든지 하는 것들은 모조리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데, 일본에 어떻게 환관이 있었단 말인가? 호기심에 그 내용을 읽어보았다.

 

먼저 책에 나오는 내용을 요약해보자:

 

일본 양노칠년(717년) 삼월, 제8차 견당사의 함대가 출항했다. 이번의 견당사의 정사(正使)는 길비진비(吉備眞備)이다. 유학승 중에서 현방이라는 사람도 한명 들어가 있었다.

 

당시, 중국의 당나라는 '세계삼대미녀'중 하나라는 양귀비가 아름다운 매력을 뽐내고 있던 시절이다. 즉, 당현종의 통치하에 있었다. 이 당현종은 각양각색의 인물을 좋아했는데 유학승인 현방도 당현종이 총애하는 사람중 하나였다.

 

나중에, 당현종이 현방을 아껴주자 질투심을 느낀 환관들이 현방에게 말했다: "황제께서 너같은 왜인을 아끼는 것은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이다. 때가되면 너는 놀라거나, 긴장하거나 무서워하더라도 이미 늦었을 것이다. 지금부터 마음의 각오를 다지는 것이 좋다."

 

며칠후, 현방은 돌연 '황제성지'를 받는다. 세 사람이 와서 그를 황성의 바깥으로 데려가서는 "창자(廠子)"라는 곳으로 끌고 들어갔다. 실제로 이곳은 오늘날의 정형외과와 같은 곳이다.

 

나중에 그들은 현방에게 정신을 잃는 약을 먹였다. 그가 깨어나서 보니 온 몸이 발가벗겨져 있었다. 그는 나무로 만든 수술대에 묶여져 있었으며, 움직일 수가 없었다. "창자" 안에는 외과의사가 있는데 "도자장(刀子匠)"이라고 불렀다. 그는 현방의 하반신을 뜨거운 호초탕으로 소독했고, 털을 깎았다. 마지막에느 겸도(鎌刀, 낫)와 비슷한 예리한 칼로 현방의 생식기를 잘라냈다. 이어서 비금속인 침으로 요도를 봉합하고, 지혈하고, 살균했다. 그리고 그에게 3일동안은 움직이지 말라고 얘기해주었다.

 

3개월후, 현방은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의 몸은 이미 예전의 몸이 아니었다.

 

이로 인하여 현방은 정신적인 타격을 크게 받고, 고뇌한다. 이 일을 들은 현종황제는 특별히 현방을 따로 불러수 그에게 말해준다: "출가해서 뜻을 품은 자라면, 단지 불, 법, 승의 세 가지를 추구한다. 현방 너는 이미 이 길로 들어섰는데, 왜 속세 남자의 상징을 잃었다고 고뇌하는가?" 당시 현방은 그 말을 듣고 연신 '맞습니다'고 외쳤다. 현종의 그 말 한마디에 현방은 깊이 깨달은 것이다.

 

(일본)천평7년(735년), 현방은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한다. 나중에 그는 후지하라(藤原) 일문에 들어가서 금방 광명황후의 스승이 된다.

 

이 기술내용을 보며, 견당사 중에서 유학승인 현방이 당나라 현종이 재위하는 기간동안 거세를 당하여 환관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록 내용 자체는 <<명나라의 그 일들>> <<역사는 어떤 장난인가>>의 작자들이 쓰는 방식과 비슷하지만, 적혀있는 내용은 역사의 진실을 반영하고 있다는데 의문이 없다.

 

현방이 '유학후 귀국'하였을 때, "경소오천여권"을 가져갔다고 한다. 이를 보면 그가 뜻이 큰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중에 일본조정에 들어간다. 기록에 따르면, 천평9년(737년), 그는 일본 성무천황의 총애를 받아 자가사(紫袈裟)를 하사받는다. 이는 일본역사상 천황이 하사한 첫번째 자가사이다. 이어서, 그는 총애가 날로 더해지자 행동이 괴이해지고, 사문의 본지를 약간 벗어나게 되어, 점점 당시 사람들이 싫어하게 되었다. 천평13년(741년), 등원광사(藤原廣嗣)의 탄핵을 받는다. 천평17년(745년), 축자관세음사로 유배된다(현재의 일본 후쿠오카현 태재부시). 다음해 그 절에서 원적한다. 나이는 분명하지 않다.

 

이런 내용들은 <<속일본기>>, <<원형석서>>권16, <<부상약기>>, <<동대사요록>>권2, 촌상전정의 <<일본불교사강>>등의 책에 나와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현방과 당시 도경(道鏡)은 세상사람들에게 "양대음마(兩大淫魔)"라고 불리웠다고 하는데, 일본의 일반적인 정사에서는 기록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