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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중국과 일본

일본의 중국침략시 3명의 특무두목

by 중은우시 2008. 11. 1.

작자: 미상

 

일본제국주의의 중국침략은 단지 성을 뺏고 땅을 차지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그 배후에는 또 다른 전쟁, 즉 간첩전이 있었다.

 

일본인들은 그들이 정보수집활동에 종사한 것이 <<손자병법>>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말한다. 한 일본의 첩보장교는 일찌기, 그들은 "처음으로 손자병법을 가장 위대한 첩보기교전문가의 저술로 보고 번역한 사람"이었다고 하였다. 얄미운 점이라면 일본인들은 손자의 간첩전의 재주를 바로 손자의 고향에서 써먹었다는 점이다.

 

일찌가 청일전쟁이후, 일본참모본부는 중국에 특무기관(첩보기관)을 둔다. 먼저 아오키 노부주메(靑木宣純)가 이를 만들고, 그 후에 사카니시 리하치로(板西利八郞), 다시 도이하라 겐지(土肥原賢二)가 이어받았다. 삼대 특무두목은 일맥으로 서로 이어졌고, 중국에서 전후 50년간 활발히 활약했다.

 

아오키 노부주메(靑木宣純)

 

일본의 중국침략역사상 아오키 노부주메는 "첫번째 중국통"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아오키 노부주메는 1859년 일본 미야자와현의 한 사무라이가정에서 태어났다. 1875년 육군유년학교에 들어갔다가 다시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갔고, 1879년에 졸업하고, 포병소위로 임관한다. 아오키는 어려서부터 <<삼국지>>를 즐겨읽어 중국에 깊은 흥미가 있었고, 중국에 관한 지식을 쌓고, 중국어에 능통했다. 그의 이러한 특기는 참모본부에서 주목했고, 1884년 그는 광저우로 파견보내어진다. 광뢰차랑(廣瀨次郞)이라는 가명으로 그의 첩보인생을 시작한다. 아오키는 광저우에서 3년간 머물면서 유려한 광동말을 배운다. 그리고 이어서 참모본부는 그를 북경으로 보내어 북경주위지형을 탐색하게 한다. 그는 북경의 사방을 돌아다니면서 아주 상세한 북경지도를 그려서 보내어, 참모본부의 표창까지 받는다.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할 때, 이미 소좌(少佐)로 승진한 아오키는 전선에 나가 제1군참모를 맡는다.

 

청일전쟁후 아오키는 1897년 참모본부에서 북경으로 보내고, 일본주중국공사관에서 무관의 직위를 받는다. 그리고 북경에 특무기관을 설립한다. 대외적으로는 "청목공관(靑木公館)"의 명목을 내걸고, 널리 중국의 인사들을 사귀었다. 가장 그가 내세울만한 것은 당시 직예총독인 원세개의 신뢰를 받게 되었다는 점이다. 원세개는 마침 새로 육군을 건립해야 했으므로 아오키에게 의지하여야 할 점이 있어, 두 사람은 친하게 된다. 원세개가 산동순무로 부임할 때 아오키에게 제남으로 와서 신군을 훈련시키는 것을 도와달라고 한다. 원세개는 자주 동료들에게 아오키는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일본인'이라고 말하곤 했다.

 

1900년 아오키는 제남으오 간다. 도중에 의화단의 난이 일어나서 어쩔 수 없이 천진에 머문다. 아오키는 천진에서 일본조계의 교민으로 "의용대"를 조직하여 의화단의 진격에 저항한다. 오래지 않아, 팔국연합군이 들어오고 아오키는 적극적으로 연합군과 작전을 벌여, 천진성을 함락시키고난 후에 군사관제기구를 설치한다: 잠행관리진군상내외지방사무도통아문. 나중에 이는 천진지구임시정부로 된다. 아오키는 처음부터 여기에 참여하고, 군정위원을 맡으며, 의화단원을 수색하여 살해한다. 1902년 8월 팔국연합군은 천진에서 물러나고, 아오키는 귀국하여 포병연대장을 맡는다.

 

1903년 가을, 일본은 러시아에 대한 전쟁을 준비한다. 아오키는 명을 받아 북경으로 다시 간다. 명의로는 여전히 공사관의 무관이었지만 그는 중대한 사명을 지니고 있었다. 즉, 러시아정보를 수집하고 중국동북각지의 마적들과 연락하여, 전쟁이 개시되면 일본군을 도와 러시아군의 후방을 교란시키도록 하는 것이었따. 아오키는 부임한 후즉시 천진으로 잠행한다. 비밀리에 당시 직예총독이던 원세개를 만난다. <<모략장군 아오키 노부주메>>라는 책에는 아오키와 원세개의 대화가 실려있다

 

아오키: 일본이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는 것은 어찌되었건 피할 수 없습니다.

원세개: 그 일은 나도 잘 알고 있다.

아오키: 그래서 각하와 상의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전쟁에서 일본이 독자적으로 작전하지만, 암중으로 어떡하든 각하의 협조를 받지 않으면 안됩니다.

원세개: 그건 쉽다. 적극 지원하겠다.

아오키: 각하께서 도와주실 것은 바로 만주와 몽고의 마적들로 하여금 일을 벌이게 하여 후방측면에서 러시아군을 교란시켜주시면 됩니다.

원세개: 네 생각이 아주 재미있구나. 너를 위해 방법을 생각해 보겠다. 다만, 내가 관할하는 직예성내에서는 소란을 일으켜서는 안된다.

아오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원세개와 아오키는 협의를 달성한다: 첫째, 원세개의 군대에서 수십명의 능력있는 장교를 뽑아서, 군영을 탈영하는 방식으로 아오키의 휘하에 들어와서 업무를 도와준다. 둘째, 직예총독부는 매일 만주지구의 정보를 받으면 아오키에게 건네준다. 이리하여 아오키는 아주 기뻐한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개전되기 5일전에, 참모본부는 긴급명령을 내려 아오키에게 여순지구의 러시아군과 국내의 전보선로를 절단하도록 지시한다. 아오키는 즉시 사람을 보내어 팔달령에서 북경에서 챠크투(恰克圖)를 거쳐 러시아로 가는 선로를 절단한다. 그리고, 잉커우에 있던 첩보인원에게 여순에서 하르빈으로 통하는 선로를 절단하게 한다. 이와 동시에 산동 지불(연태)에서 여순에서 지불을 거쳐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하는 해저전선도 차단한다. 이렇게 하여 2월 8일, 여순과 조선인천에서 러시아함대는 일본해군으로부터 급습을 받는데, 페테르스부르크에서는 전투상황을 전혀 덛지 못하여 피동적인 입장에 처한다. 일본군은 첫전투의 승리를 고한다.

 

일본이 러시아에 개전한 후, 아오키는 참모본부의 명을 받아, 북경에 "특별임무반"을 조직하고, 시베이라와 만주지역에 들어가서, 철로와 교량을 파괴하고, 러시아군의 보급선을 차단한다(나중에 일본의 '특무(特務)'라는 말은 바로 아오키의 '특별임무반'에서 온 것이다).

 

같은 해, 아오키는 만주군사령부로 이동되어 금주를 지킨다. 여전히 '특별임무반'을 조직하여, 동북각지에서 활약하는 마적들을 모아서 '만주의군'을 조직하고, 러시아군의 후방에서 교란기습활동을 벌인다. 예를 들어, 요서의 비적 풍호각은 수하에 비적이 2천명이 넘는데, 아오키에게 매수된 후, 계속 확충하여 전쟁이 끝날 때쯤에는 기병 4천여명으로 확대된다. 다른 지역의 마적도 만여명이 넘었다. "특별임무반"의 조종하에, 만주의군은 러시아군의 후방에서 활약하고, 철로를 파괴하고, 병참기지를 습격하며, 군수물자를 불태웠다. 그리고 기회가 있으면 러시아군을 습격했다. 예를 들어, 흑룡강 코사크 제5, 제6의 두 중대는 거의 전멸한다. 러일전쟁에서, 아오키의 "특별임무반"은 실력을 충분히 드러낸다. 일본군의 승리에 큰 공을 세운다. 그리하여 전후에 아오키는 소장(少將)으로 승진한다.

 

1908년 아오키는 다시 북경에 무관으로 파견된다. 1912년에는 중장으로 승진하고, 여순요새사령관이 된다. 1915년 참모본부로 돌아간다. 그때 원세개는 이미 황제를 칭하였고, 손중산은 <<토원선언>>을 한다. 일본내각은 손중산의 원세개토벌운동을 원조한다. 이를 위하여 참모본부는 다시 원세개가 유일하게 믿는 일본인인 아오키를 상해로 파견해서, 손중산을 도와 원세개정권을 무너뜨리도록 도와주게 한다. 1916년 6월 원세개가 죽자 아오키의 임무는 끝이 난다. 1917년 1월, 아오키는 다시 여원홍 총통의 최고군사고문이 된다. 1923년 12월, 아오키는 일본의 고향에서 병사한다. 이로써 그는 중국에서의 40년에 걸친 특무생애를 마치게 된다.

 

사카니시 리하치로(板西利八郞)

 

사카니시 리하치로는 아오키가 러시아에 대한 첩보공작을 전개할 때 참모본부에서 북경으로 파견되어, 아오키의 보좌관이 되어, 아오키의 의발을 전수받는다. 일본의 첩보사상 사카니시는 "두번째 큰 별"로 불린다.

 

사카니지 리하치로는 1870년 일본의 와카야마현에서 태어난다. 역시 사무라이가정에서 태어난다. 1891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포병소위가 된다. 청일전쟁에 참전하고, 나중에 육군대학에 들어간다. 1909년 중국문제를 깊이 파고드는데 장점이 있어 참모본부로 들어가고 다시 북경에 파견나간다. 사카니시는 아오키의 추천을 통하여 직예총독 원세개와 알게 되고, 북양신군의 훈련고문 겸 북경독련공소의 총번역관이 된다. 당시, 중국과 러시아는 카시니밀약을 맺어 거기에는 중국군대가 외국교관을 초빙하는 경우 반드시 러시아인으에게 맡기게 되어 있었다. 원세개는 이를 피하기 위하여 사카니시를 아예 중국인으로 꾸미고, 그에게 중국이름을 지어준다: 반지초(班志超)

 

원세개는 당시 사카니시에게 "너의 업무는 한나라때 서역에 사신으로 간 반초와 비스사니, 반지초라고 하자."라고 하였다고 한다.

 

러일전쟁때 아오키는 만주군사령부로 이동하여 남은 첩보업무는 사카니시가 책임진다. 사카니시는 북양독련공소 참모처 총판인 단지귀와 연락하고, 단지귀가 매일 받은 각지의 정보를 사카니시에게 주었다. 그 후에 주요한 것을 일본어로 번역하여 일본주둔군사령부에 보내고, 다시 동경참모봉부로 보냈다.

 

러일전쟁이 끝난 후, 사카니시는 명을 받아 귀국하여, 야전포병연대장을 맡는다. 1911년 무창에서 신해혁명이 발발한 후, 참모본부는 다시 사카니시를 북경에 보내어 공사관 무관을 맡게 한다. 그리고 "판서공관"이라는 이름의 특무기관을 만들게 한다. 북양군벌이 북경을 장악한 십수년간, 사카니시는 광범위하게 북양의 각군벌, 정객들과 교분을 유지한다. 그리고 일본내각의 의도를 반영시키고 중국의 정치에 관여한다.

 

예를 들어, 단기서의 집정기간동안 일본의 데라우치내각은 단기서정권을 통제하기 위하여 "니시하라차관"을 체결한다. 이는 바로 사카니시가 선을 대어서 이룬 것이다. 북양정부는 원세개부터 시작하여, 여원홍, 풍국장, 서세창, 그리고 다시 여원홍이 두번째로 권좌에 오르고, 이후 조곤, 단기서를 거쳐 전후에 7명의 총통이 바뀌는데, 사카니시는 혹은 공개적으로 고문을 맡고, 혹은 막후에 숨어서 기획을 했다. 시종 권력자들로부터 인정받고 중용되었다. 그리하여 일본여론에서는 사카니시를 "7대흥망의 오뚜기"라고 불리웠다.

 

1927년 사카니시가 명을 받아 귀국할 때, 일부 북양군벌의 요인은 사카니시에게 석별의 정을 표했다. 예를 들면 국무총리를 맡았던 근운붕은 시를 지어 석별을 아쉬워했다. 이런 것들을 보면 북양정부에서 사카니시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알 수 있다.

 

사카니시가 귀국한 후에 육군중장의 계급으로 전역한다. 그후에 다시 천황의 명령으로 귀족원의원이 되고, 자주 일본의 대중국정책의 제정에 참여한다. 그리하여 조야의 인사들로부터 "첫손 꼽히는 중국통"으로 불리운다. 1937년 중국침략전쟁을 발동한 후, 사카니시는 다시 참모본부에 기용되어, 북경에 머물면서 북양계의 요인들인 서세창, 오패부, 근운붕등을 끌어들여 친일정권의 요직을 맡게 하려고 하나, 결과적으로 아무런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조용히 귀국한다. 일본이 투항한 후 사카니시는 고향으로 돌아가서 1950년에 죽는다.

 

도이하라 겐지(土肥原賢二)

 

도이하라 겐지는 사카니시 리하치로이후 중국에서 첩보활동에 20여년간 종사한다. 그가 어디에 나타나면, 거기에 반드시 정치소란이나 무장충돌이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중국의 백성들로부터 이런 별명을 얻는다: 토비원(土匪源)

 

도이하라 겐지는 1883년 일본 오카야마현에서 태어난다. 마찬가지로 사무라이가정에서 태어났다. 1904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912년 육군대학을 졸업한다. 그후 참모본부에 들어가서 북경으로 파견된다. 사카니시 리하치로의 보좌관이 되어, 아오키, 사카니시를 이은 제3대 특무기관의 후계자가 된다. 도이하라는 중국어를 유려하게 말했고, 몇 가지 방언까지 할 줄 알았다. 그는 중국의 역사, 사회, 문화, 풍속을 잘 알았고, 위장을 잘했다. 그는 의표가 당당하고 선비기질이 있는 우아한 풍모를 지니고 있어서, 일본관동군 참모를 맡았던 가타쿠라 다다시(片倉衷)은 그를 이렇게 평가했다: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의 특무활동과 그의 사적을 보고 왕왕 그가 음험하고 독랄한 인물로 생각한다. 사실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그의 중국말은 아주 뛰어나고, 중국친구를 사귀는 것을 좋아한다. 중국인들의 각종 정보는 자동으로 그의 손에 들어온다. 그는 정보수집에서 빼놓을 수 없는 뛰어난 인물이다. 그리고 중일교류에서 가장 이상적인 인재이다."

 

"가장 이상적인 인재". 느끼한 거짓말로 피비린내나는 죄악을 덮을 수 없다. 도이하라는 도대체 무슨 짓을 했던가?

 

1930년 도이하라는 천진특무기관장을 맡았는데, 주요임무는 천진에 거주하는 군벌, 정객을 끌어들여, 그들이 다시 일어서도록 책동하고, 동북, 화북에 친일매국의 괴뢰정권이 들어서도록 하는 것이었다. 염석산은 중원대전이 실패한 후 도이하라의 엄호하에 대련으로 도망쳤고, 반복무상한 석우삼도 도이하라의 교사에 국민당군대를 분열시키고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1931년 8월, 도이하라는 긴급히 심양으로 이동되어 봉천특무기관장을 맡아서 9.18사건을 만들어낸다. 9월 21일 즉 사변발생후 3일째 되는 날 도이하라는 봉천시장이 된다. 당시 심양의 치안상황은 아주 혼란스러웠는데, 도이하라는 엄격한 수단으로 반항활동을 진압하였다. 상점은 즉시 영업을 개시하도록 하고, 봉천지방자치유지회를 만들었다. 일본현역장교가 시장을 맡은 것은 침략자의 진실한 의도를 아주 잘 폭로한다. 그리하여 20일후 도이하라는 사직하고 한족 조흔백으로 하여금 이어받게 한다.

 

도이하라가 봉천시장을 사임한 후, 다시 봉천관동군사령관인 혼조 시게루(本庄繁)는 밀명을 내려 천진으로 가서 부의를 데려와서 만주국의 괴뢰원수를 맡기고자 한다. 당시 일본외무성은 부의를 내세우는 전략에서 관동군과 이견이 있었다. 그리하여, 천진총영사 구오지마 슈케이(桑島主計)는 부의가 천진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엄밀히 통제하고 있었다. 도이하라는 이런 국면을 맞이하여, 일본주둔군으로 하여금 청방의 두목인 원문회로 하여금 깡패, 마약꾼등 2천여명을 동원하도록 하여, 1931년 11월 8일, '사복부대'들이 사회혼란을 일으키는 틈을 타서 부의를 잉커우로 데려간다.

 

1933년 10월 도이하라는 다시 봉천특무기관장을 맡아 만주국을 만든 후에 다시 화북국을 다시 만들고자 하였다. 이를 위하여 관동군사령부는 산해관, 당산, 통주등지에 특무기관에서 모두 도이하라의 지휘를 받도록 했다. 도이하라는 은위겸시(恩威兼施)의 수단으로 국민당의 화북고급관리 송철원, 한복경, 염석산, 상진등을 남경정부에서 벗어나도록 하여, '화북자치'를 실행하도록 협박한다. 이 모략은 송철원등의 소극적인 저항으로 실현되지는 못한다. 마지막에 장개석에 압력을 가하여 건제상으로는 남경에 예속되나 반독립적인 성격을 지닌 기찰정무위원회를 만들어, 송철원이 위원장이 되고, 도이하라는 고문이 되며, 친일파를 위원으로 집어넣는다.

 

1935년 5월, 도이하라는 국민군대가 차하르성지도를 작성하는 일본특무를 구속하였다는 이유료 '장북사건'을 일으켜, 차하르성 국민당기관, 주둔군대를 취소하게 하고 송철원주석의 직무를 취소하라는 등 무리한 요구를 하며, 차하르성민정청장 진덕순으로 하여금 "진토협정"을 체결하도록 한다.

 

1935년 11월, 도이하라는 난유구 겸 계밀구 전문위원인 단여경이 기동사변을 만들고, 기동 22개현에 기동방공자치정부를 구성하도록 한다.

 

도이하라는 이 일련의 음모활동을 통하여 일본의 대중국침략의 나팔을 부는 역할을 햇다. 1936년 3월, 이미 소장에 승진한 도이라하는 명을 받아 일본으로 귀국하여 사단장을 맡는다. 1937년 노구교사건의 총성이 울리자, 도이하라 사단장은 즉시 명을 받아 화북으로 출정하고, 북경에서 평한선을 따라 남하하며 작전을 벌여 보정, 석가장, 형태, 한단, 자현, 대명, 안양, 신향을 점령하고 황하도구까지 진격한다. 도이하라는 우아한 가면을 벗고 흉악한 전쟁광의 진면목을 드러낸 것이다. 오래지 않아, 그는 중장으로 승진한다.

 

1938년초, 도이하라는 다시 참모본부로 불려가서 중임을 맡는다. 같은 해 6월, 도이하라는 육군성을 대표하고, 쓰루타 시즈에(津田靜枝)는 해군성을 대표하고, 사카니시 리하치로는 외무성을 대표하여, 대화특별위원회를 조직한 다음 일본군의 점령지역에서 하나의 통일된 친일중앙정부를 만드는 것을 책임진다. 그리고 도이하라는 상해에 "도이하라기관'을 성립시켜 업무를 시작한다. 당시 도이하라가 친일정권의 수뇌로 영입하려 했던 사람은 오패부, 당소의와 근운붕이었다. 그러나, 당소의는 오래지 않아 국민당군의 군통에 의하여 암살당하고, 오패부는 만년의 절개를 지켜서 매국노가 되고자 하지 않았고, 근운붕도 계속 몸을 피해서 발을 담그려고 하지 않았다. 또 다른 측면으로, 이미 매국노가 된 왕극민이 중간에서 장난을 쳤다. 1938년 12월, 왕정위가 중경에서 도망쳐 공개적으로 일본에 의탁하겠다고 발표한다. 왕정위라는 이 거물급 친일파가 나타나자 다른 매국노들은 그 빛을 잃어버린다. 도이하라의 모략은 중도에 급브레이크를 밟고 방향을 바꾸게 된다.

 

1941년 4월 도이하라는 대장으로 승진하여 육군항공총감을 맡는다. 1943년 3월 명을 받아 싱가포르로 가서 제7방면군사령관이 된다.

 

1945년 4월 귀국하여 육군교육총감이 되어 일본이 투항할 때까지 계속 그 자리에 있는다. 전후에 도이하라는 극동군사재판의 법정에서 갑종전점이 되어 사형을 언도받고, 1948년 12월 동경 스가모(巢鴨)감옥에서 형이 집행된다. 도이하라의 일생은 일본의 대중국침략에서 간첩활동의 집대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