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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중국과 일본

고대 일본에 침입한 대륙의 해적

by 중은우시 2012. 4. 4.

작자: 미상

 

935년, 고려가 신라를 멸하고, 다음 해 한반도를 통일한다. 고려는 일본과의 국교를 정상화하기 위하여, 937년부터 1051년까지 여러번 사신을 보내지만,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종전과 마찬가지로, 고려의 상인들이 큐슈로 빈번히 가서 무역을 하고, 일본상인의 고려행도 끊이지 않았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1073년부터 1093년까지, 일본상인이 고려로 간 것이 28회이다. 9세기 하반기 키타큐슈(北九州)의 연해는 신라의 소규모 해적들의 침입을 받았다. 977년 고려해적이 대거 일본을 침략하여, 치쿠젠(筑前), 치쿠고(筑後), 사쓰마(薩摩)등 연해지대가 모두 피해를 입었고, 아마미섬(奄美島)의 피해가 특히 심했다.

 

고려해적의 뒤를 이어 관인3년(1019년) 삼월, 도이인(刀伊人)들이 대거 침입한다. "도이(조선의 '되'의 역어)"는 조선말로 "외번(外藩)"이라는 의미이다. 통설에 따르면, 도이인은 중국동북지방과 한반도동북부에 산재해있던 여진족의 한 갈래로, 고려와는 무역왕래가 있었다. 11세기부터 한반도동해안에서 해적활동을 벌인다. 이해 삼월, 도이인들은 50척의 배를 타고 쓰시마(對馬)를 습격한다. 사월에는 이키섬(壹岐), 이토군(怡土郡), 하카다(博多), 나카사키(長崎)와 히젠(肥前)등지로 진격한다. 당시 농민을 착취하는 것을 능사로 하고 외적에 저항할 능력이 없었던 일본중앙귀족들은 이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지만,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이 도이해적은 결국 일본의 지방무장세력에 의하여 격퇴된다. 일본주민 463명이 피살당하고, 1280명이 포로로 잡혀갔다. 나중에 고려해군이 해상에서 이 해적을 물리치고, 일본인 포로 259명을 송환해준다.

 

또 다른 기록에 따르면, 일본의 관인연간, 일본의 키타큐슈는 한반도에서 온 내력불상의 군대에 습격을 받는다. 공격측의 국적은 불명이다. 그저 도이라고 부른다는 것만 안다. 기실 도이의 기원은 조선어의 음역이다. 그것이 가리키는 것은 중국동북 흑룡강유역의 여진족이다. 시간적으로 보면, 거란인의 한 갈래로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조선군재>에 수록된 관인삼년 사월 십육일 다자이후(太宰府)가 이론조정에 보낸 해문(解文) 및 <소우기>의 기록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관인삼년 삼월이십팔일, 50여척의 배를 다진 선단이 신속하면서도 은밀하게 쓰시마를 급습하여, 쓰시마, 이키 두 섬을 점령한다. 그리고 섬의 주민을 모조리 죽여버린다. 사월 칠일, 도이군은 치쿠젠 이토시마(絲島)로 상륙한다. 미처 방어할 틈도 없었던 인근의 시마(志摩), 사와라(早良)등 여러군의 군시(郡司), 지방우두머리들은 혼란에 빠져서 방어행동조차 조직하지 못하고 속속 근거지를 떠나 도망친다. 도이군은 매번 한 지방을 공격할 때마다, 물자를 약탈한 후, 가옥을 불태우고, 그후에 비로소 당당하게 떠나갔다. 도이군은 포로중 노인과 아동은 죽여버리고, 장년들만 배로 싣고 가서 노예로 삼았다. 지방호족인 마사히코 타다미츠(文室忠光)는 도이군 한 갈래가 주의하지 않는 틈을 타서 부대를 이끌고 반격하여 수십명을 사살했다. 다음 날, 도이군의 약탈방향은 나카군(那珂郡)의 노코노시마(能古島)로 향했다. 구일 새벽, 하카다 게이고쇼(警固所)에서는 대장종재(大藏種材)에게 군대를 이끌고 부근을 침입한 도이군의 한 무리를 공격하도록 한다. 대장종재는 수하 십여명을 이끌고 활로 적군을 물리쳤다. 십일, 해상에서 돌연 풍랑이 일었다. 도이군과 다자이후군은 모두 군사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하룻동안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는다. 십일일, 날이 밝기도 전에, 다자이후는 비밀리에 정신을 차린 시마군, 시와라군의 수비군을 후나고시로 보낸다. 다음 날, 전투가 재개된다. 호족수령인 재부홍연(財部弘延)은 단기로 도이군의 주둔지 앞까지 가서 활을 쏘아 도이군 사십여명을 사살한 후 본진으로 되돌아온다. 도이군은 크게 당황하여, 군심이 흐트러지고, 다시는 전투할 의욕을 가지지 못한다. 그리하여 해로로 퇴각하기 시작한다. 다자이후는 승리를 틈타 삼십여척의 배로 뒤쫓는다. 도이군은 히젠의 마쓰우라군(松浦郡)으로 도망간다. 현지 호족은 사람을 모아서 대항하고, 수십명을 활로 쏘아 쓰러뜨린다. 도이군은 다시 해상으로 도망친다. 연해를 따라서 수일을 돌아다니지만, 해안의 곳곳이 모두 경비가 삼엄했다. 후나고시에서는 다자이후의 군대가 진을 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먼 바다로 도망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렇게 하여 십여일에 걸친 '도이입구(刀伊入寇)'사건은 끝이 난다.

나중에 포로를 심문하고서야 비로소 침입한 자들이 고려군이 아니라, 도이라고 부르는 이족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세소우기>의 기록에 따르면, 포로중 적지 않은 신라인이 있었다고 한다. 이를 보면 다자이후를 습격한 것은 거란,고려 혼합부대임을 알 수 있다. 이는 나중에 일본을 공격한 몽골-고려군과 성격이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사후에, 일본조정은 이번 작전에서 전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대규모의 포상을 한다. 다자이후의 곤노소치(權帥)인 후지와라노다카이에(藤原隆家)도 공로가 있는 사람들에게 상을 내린다.

 

관영6년, 신라(고려)가 침입하여 문실선우(文室善友)가 이를 격퇴한다. 이 전투는 다시 한번 헤이안조정의 대륙세력에 의한 큐슈침입에 대한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큐슈연해의 방어역량을 강화하기 위하여, 각각 이키섬과 쓰시마섬에 진슈후(鎭守府)룰 둔다. 현지호족인 대장종재가 이키노카미(壹岐守)에 임명되고, 경도귀족 등원정칙(藤原政則)을 쓰시마노카미(對馬守)에 임명한다. 이들은 각각 이키와 쓰시마의 수비를 맡는다.

 

당시의 일부 관련문서를 보면, 일본당국은 아주 긴장했다. 헤이안조정은 다자이후에게 공격측의 배의 구조, 장비, 전법전술등 정보를 수집하도록 요구하여, 종전의 외국의 일에 대하여는 묻지도 듣지도 않았던 태도를 바꾼다.

 

고려군이 키타큐슈를 침입하는 동시에 남방의 남만(아마미섬사람)도 미나미큐슈(南九州)를 공격한다. 도이가 쓴 집단전법은 당시의 일본인들에게는 본 적이 없을 뿐아니라, 심지어 들어본 적조차 없는 것이었다. 무서움을 맛본 후에야 비로소 황급히 정보를 수집했다. 당시의 다자이후가 막부에 보낸 해문에 따르면, "반짝이는 칼날이 휘날리고, 다음으로 활과 화살을 가지고 있으며, 방패를 든 자가 7,8십명가량이다. 따르는 자들이 이와 같았다. 일이십대가 산을 오르고 들판을 막는다" <소우기>의 기록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사월 이십오일, 적(도이군)은 전투를 하면서 사람마다 방패를 들고, 앞진에 선 자는 단도를 들고, 다음 진은 대도를 들고, 그 다음진은 활과 화살을 들었다. 화살은 길이가 1척가량이고, 활쏘는 힘이 아주 세었다. 사람들은 각각 손에 방패를 들고 있고, 마지막 열의 활화살대가 있었다. 1진은 약 이십대로 편성된다"

 

비록 도이의 침입에 항거한 전쟁에서 마지막으로 승리를 거두기는 했지만, 이런 승리취득은 참혹한 댓가를 치른 것이다. 특히 도이인의 집단전술은 당시의 일본인들에게 있어서 커다란 놀라움을 주었다. 일본은 집단전법을 중시하기 시작한다. 비록 이것이 일본국내의 전쟁형태를 완전히 바꾸지는 못했지만, 그러나 나중에 '몽골침입'때 막부군이 몽골기병의 집단돌격전법에 응전하고 연해진지를 고수할 수 있었던 것도 미리 마음의 준비를 갖출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륙기마민족은 이런 집단전술을 쓰는데 능했다.

 

당연히, 다자이후의 군사방어역량은 약했다. 무기가 상대적으로 낙후되었을 뿐아니라, 전법도 시대에 맞지 않았다. 더욱 중요한 점은 다자이후의 관료기구 자체의 효율이 아주 낮았다. 당시 다자이후에서 임직한 관료는 주로 두 가지 유형이다. 현지의 지방호족과 경성에서 파견되어 온 귀족이다. 전자의 대표는 기쿠치씨(菊池氏)와 무나카타씨(宗像氏)이고, 후자의 대표는 후지와라(藤原)씨이다. 예를 들어, '등원순우(藤原純友)의 난'의 등원순우와 같은 사람들이다.

 

어찌되었건, '도이침략'은 일본본토역사상 첫번째로 대륙에서 온 대규모 무력위협이었다. 그러므로 후대에 깊은 영향을 남긴다. 그후, 잇키우치(一騎打)의 작전방식은 점차 드물어진다. 비록 가끔 이런 낭만주의와 개인영웅주의가 충만한 사례가 사적에 나타나기는 하지만(예를 들어 제4차 카와나카지마전투에서 다케타신겐과 우에스기겐신의 일대일싸움이 있다), 율령제하에서 건아제, 선사제를 기초로 한 군단군제가 완전히 확립되기 시작하면서, 각군단은 지휘관의 지휘하에 통일적인 행동을 나타내고, 더 이상 이전처럼 원시적인 각자 싸우고 일대일로 싸우는 일은 없어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