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정치/중국과 일본

일본왕자의 입당구법(入唐求法)

중은우시 2009. 1. 9. 19:29

글: 사지동(謝志東)

 

당나라때 소악(蘇顎)이 편찬한 <<두양잡편>>에는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당선종(唐宣宗) 대중(大中)연간에 일본국의 왕자가 당나라를 방문했다. 왕자는 바둑을 잘 두었는데, 당나라의 국수(國手)와 바둑을 두고싶다고 요청했다. 당선종은 궁중의 기사(棋師)인 고사언(顧師言)에게 나서서 바둑을 두도록 하였다. 33수를 둘 때까지, 승부가 나지 않았다. 고사언은 황명을 욕되게 할까봐 두려워, "진신두(鎭神頭)"라는 절초를 구사하였다. 왕자는 눈을 크게 뜨고 팔을 움츠리고는, 싹싹하게 패배를 인정했다. 거처로 되돌아온 후에, 왕자는 외빈접대를 책임지는 관원에게 물어보았다: "그 사람은 당나라의 몇번째 고수인지요" 그러자, "제3고수입니다"라고 답변했다. 왕자는 제일고수를 만나볼 수 있겠는지 물어보았다. 그러자, 접대를 담당한 사람은 "우리나라의 규정에 따르면, 제3고수를 이겨야, 제2고수를 만나볼 수 있고, 제2고수를 이겨야 비로소 제1고수를 만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왕자는 탄식하며 말했다: "나는 우리나라에서 이미 제1고수인데, 아직도 귀국이 제3고수에도 미치지 못하는구나!" 사실 고사언은 당시 당나라의 제1고수였다. 이 이야기는 <<구당서. 선종본기>>에도 기록이 있다: "대중2년 3월 기유, 일본국왕자가 입조했고, 방물을 바쳤다. 왕자는 바둑을 잘 두어, 황제가 고사언에게 그와 대적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적지 않은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이런 일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당나라의 역사를 살펴보면, 당선종 대중연간(847-860)에 일본은 왕자를 당나라에 보내지 않았다. 다만, 당선종의 아들인 당의종(唐懿宗)이 즉위한 후인 함통3년(862)에 일본의 불문에 귀의한 친왕이 중국을 온 적이 있다. 이 친왕은 일본의 평성천황(平城天皇)의 셋째아들인 고악친왕(高岳親王)이다. 그는 평선천황이 차아(嵯峨)천황에게 양위한 후, 일찌기 황태자에 오른 적이 있었다. 나중에 "약자(藥子)의 난"에 연루되어, 태자에서 폐위되었다. 그리고 머리를 깍고 중이 되어, 밀종의 고승 공해(空海)의 문하로 들어간다. 법명은 진여(眞如)라고 했다. 그래서 진여법친왕(眞如法親王)이라고도 불렀고, 두타친왕(頭陀親王)이라고도 불렀다. 두타는 고행승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두양잡편>>과 <<구당서. 선종본기>>에 기록된 일본왕자는 분명히 진여법친왕일 것이다. 다만 기록된 연도에 착오가 있었다.

 

일본사료인 <<두타친왕입당약기>>에서는 그가 당나라에 간 상세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은 진여법친왕을 모시고 당나라로 갔던 이세흥방(伊勢興房)이 쓴 것이다. 글은 861년 3월 일본천황이 친왕으로 하여금 당나라로 가는 것을 허가한 때부터 시작하여, 865년 6월 귀국할 때까지의 일을 기록했다. 일기형식으로 진여법친왕의 입당구법의 역정을 자세히 기록했다. 862년 9월, 진여법친왕은 승속 60인을 이끌고, 당나라 상인 장우신(張友信)의 배를 타고 치가도(値嘉島)에서 출발하여, 명주(지금의 절강 영파)에 도착한다. 해안에 상륙한 후, 명주관청에서 즉시 경성에 보고한다. 3개월후에 경성에서 경성으로 오는 것을 허락하는 칙서를 받는다. 그리하여 진여법친왕의 일행은 월주, 양주, 낙양을 거쳐 장안까지 간다.

 

그러나, 진여법친왕이 입당한 목적은, 이전의 일본 견당사들처럼 중국에서 당나라의 제도와 문화를 배우려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의혹을 풀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의 미혹은 아마도 그의 특수한 신분과 관련될 것이다. 인생의 부침을 거듭하면서, 그는 불경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심도있는 사고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불문에 귀의한지 40년이 되었지만, 그는 "미혹을 버리고 깨달음을 얻고, 고통을 버리고 즐거움을 얻는(轉迷成悟, 離苦得樂)"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다. 오히려 의문은 더욱 많아졌다. 그리하여, 비록 이미 65세의 고령이지만, 그는 여전히 바다를 건너 당나라로 와서 불교의 요체를 깨닫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험난함을 무릎쓰고 당나라로 와서, 여러 고승을 방문해봤지만, 그는 아주 실망하고 만다. 진여법친왕이 장안에 있을 때, 당나라의 황제는 특별히 청룡사의 고승인 법전(法全)으로 하여금 책임지고 그의 의문에 해답을 주라고 하였다. 그러나 쌍방은 격렬하게 7개월여를 토론했지만, 법전은 여전히 그에게 만족스러운 대답을 주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진여법친왕은 친히 불교의 발원지인 인도로 가서 법을 구하고자 한다. 865년, 그는 광저우를 떠나 인도로 간다. 그런데 그 후의 소식은 아무도 모른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나월(羅越, 지금의 싱가포르)에서 죽었다고 한다.

 

진여법친왕의 입당은 일본이 18차견당사(제18차견당사는 실질적으로 최후의 견당사이다. 제19차는 이행되지 못하고 중단된다)를 보낸 이후였다. 이때의 일본은 1백여년의 당나라문화를 소화하고 흡수했다. 이미 자신의 특색있는 국풍문화를 형성한다. 동시에 당문화에 대한 반성기에 돌입한다. 그리하여, 진여법친왕이 입당한 것은 이미 당나라문화에 대한 존경과 배우려는 태도는 아니었다. 진여법친왕이 장안에서 고사언과 바둑을 두어서 졌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당문화가 아직은 일본보다 우세했다는 것을 말해주지는 못한다. 실제로, 진여법친왕은 입당후 다시 인도로 구법을 위하여 간다. 이것은 그가 당나라문화에 의문을 지녔다는 것을 말해준다. 최소한 그는 불교는 인도에서 당나라로 전해졌고, 다시 일본으로 전해진 것이므로, 이 과정에서 요체를 잃어버렸을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인도까지 가려는 생각을 품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현재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일본이 일찌기, "전반당화(全盤唐化)"정책을 썼다고 알고 있지만, 이런 견해는 정확하지 않다. 일본은 당나라문화를 배우는 과정이 맹목적인 것은 아니었다. 계속하여 생각하면서, 의문이 들면, 그들은 전심전력을 다하여 답안을 찾으려고 하였다. 이런 성격은 바로 중국인들에게 결핍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