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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중국과 일본

당일혼혈아(唐日混血兒)에 관하여

by 중은우시 2009. 2. 26.

글: 북경청년보

 

견당사(遣唐使)를 얘기하자면 우리는 일본이 당나라의 선진문화를 학습하기 위하여, 십여차례에 걸쳐 방대한 사절단을 구성하여 바다를 건너 중국을 방문하여 외교활동을 벌인 것으로 알고 있다. 외교활동이라고 하니 오늘날 보기에는 아주 멋있는 일일 것같지만, 당나라시대에, 특히 항해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당시에 견당사가 매번 방문할 때마다 삶과 죽음을 넘나들었다. 배가 침몰하여 몰살하는 사건도 종종 발생했다. 제1차 견당사를 따라 일본으로 가던 당나라의 신주자사 고표인은 다시 당나라로 되돌아온 후에 해상여행의 험난함을 이렇게 묘사했다: "지옥으로 가는 문을 거쳤고, 스스로 그 기색이 엄청난 것을 알았으며 고함치고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극히 두려웠다."

 

바다길의 흉험함으로 많은 사람들이 바다로 나가는 것을 두려워했다. 당나라때 저명한 산문가인 소영사(蕭潁士)는 일본에서 그를 국사로 모셔가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 급히 병이 든 것처럼 행세하며 거절했다. 일본측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소야파(小野)라는 견당부사가 있었는데, 출발하기 전에 병이 들었다며 배에 오르지 않았다. 그리고는 <<서도요(西道謠)>>라는 글을 써서 견당사를 풍자했다. 그리하여 일본천황은 화가 머리끝까지 난다. 원래 그를 교살하려고 했으나, 그의 문재가 뛰어남을 아껴서, 사형을 면하고 은기도로 유배보냈다. 이로써 볼 때, 당시 출국방문은 좋은 일만은 아니었던 것같다. 우리의 현재 일부 관리들처럼 온갖 머리를 짜내서 시찰의 명목으로 해외여행을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었던 것같다.

 

당연히 모든 사람들이 소영사, 소야파같았던 것은 아니다. 용감한 사람들은 자신의 생명을 돌보지 않고 바다를 건넜다. 일본견당사 구성원중에는 어떤 사람들은 여러번 왕복하면서, 일생을 양국간 문화교류에 바치기도 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아들이 부친의 일을 이어받아, 몇 대에 걸쳐서 계속 사절단에 들기도 했다. 양국의 사신들 중에서 아주 특수한 무리들이 있었다. 그들은 국가적인 사명을 부여받은 외에, 혈연적인 정도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당나라와 일본의 혼혈아이기 때문이다.

 

진조경(秦朝慶), 진조원(秦朝元) 형제는 일본 학문승 변정(辯正, 어떤 사료에서는 辨正이라고 쓰기도 하는 데, 辨正은 653년 제2차견당사를 따라 당나라에 왔던 일본승려이다)이 당나라에서 낳은 두 아들이다. 변정은 702년 제8차 견당사를 따라 당나라로 왔다. 속성은 진(秦)이다. 당나라에 들어온 후에 당나라 여인과 결혼했고, 조경, 조원 형제를 낳았다. 718년, 12살된 진조원은 제9차 견당사를 따라 일본으로 간다. 733년, 진조원은 제10차 견당사절단에 판관의 신분으로 당나라에 온다. 그리고 당현종을 접견한다. 당현종은 그가 혼혈아인 것을 알고는 그에게 큰 상을 하사한다. 진조원은 일본에 돌아간 후에도 아주 존경받고, 도서두와 주계두의 직위를 맡는다. 변정과 진조경부자는 평생 일본에 돌아가지 않고, 당나라에서 늙어죽는다.

 

또 다른 형제인 우율상(羽栗翔), 우율익(羽栗翼)은 일본견당사 수행원 우율길마려(羽栗吉麻呂)와 당나라 여자가 결혼하여 낳은 두 아들이다. 우율길마려는 견당유학생인 아배중마려(阿倍仲麻呂, 중국명은 晁衡)의 수행원이었다. 717년, 제9차견당사가 당나라로 온다. 734년, 우율길마려는 두 아들을 데리고 제10차 견당사를 따라 일본으로 되돌아간다. 759년 일본조정은 고원도(高元度)를 '영입당대사사(迎入唐大使使)'로 하여, 당나라에 체류중인 견당대사 등원청하(藤原淸河)의 귀국을 맞이하게 한다. 우율상은 사절단에서 녹사의 직위를 맡는다. 당시 '안사의 난'이 아직 평정되지 않아서, 당숙종은 도로가 평안하지 못하는 이유를 들어 등원청하를 귀국하도록 놓아주지 않는다. 고원도는 이리하여 우율상등을 당나라에 남겨두고 자신이 먼저 귀국하여 보고한다. 나중에 우율상등은 평생 당나라에 거주하며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우율익은 777년 제15차 견당사의 구성원이 되어 당나라를 방문한다. 먼저 녹사를 맡고, 나중에 판관으로 승진한다. 귀국후에는 천황시의(侍醫)가 된다.

 

희낭(喜娘)은 등원청하가 당나라여인과의 사이에 낳은 딸이다. 등원청하는 752년 제11차 견당대사로 왓다가 귀국하는 도중에 폭풍을 만나 당나라에 체류하게 된다. 나중에 당나라에서 결혼하고 희낭을 낳는다. 778년, 희낭은 제15차견당사를 따라 일본으로 친척을 만나러 간다. 도중에 타고있던 배가 풍랑을 만나 반으로 잘리고, 같이 배에 타고 있던 60여명은 물에 빠져 익사한다. 배꼬리에 타고 있던 희낭은 익사하지 않고 6일간 표류하다가 일본의 서중도에 닿는다. 소식은 수도인 평성경(현재의 일본 나라)으로 전해지고, 조정은 깜짝 놀란다. 등원의 가족은 일본의 황실외척이다. 황족에 바로 다음가는 귀족이었던 것이다. 희낭이 기적처럼 살아오자 등원가족은 아주 기뻐한다. 일본조정도 경성의 관리자제 800명을 모아서 기병의장대를 조직하여, 당나라사신과 희낭을 맞이한다.

 

이상의 몇 사람은 그저 당일혼혈아중에서 이름을 남긴 사람들이다. 그들은 양국교류에 특수한 의미와 작용을 했다. 그리하여 역사서에 기록된 것이다. 실제로 당일의 이백여년간의 교류에 있어, 일본인들이 당나라에서 결혼하여 자식을 낳은 것은 수두룩하다. 당나라사람들도 일본에서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다. 혼혈아는 적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사절단에 끼지 못한 경우도 있었지만, 여전히 양국교류에 공헌을 했다. 예를 들어, 734년에 제10차 견당사의 호송사로 일본에 갔던 당나라의 음악가 원진경(袁晋卿), 황보동조(皇甫東朝) 및 그의 딸인 황보승녀(皇甫升女)는 나중에 모두 일본에 머문다. 그들의 혼혈후손들은 당나라문화를 전파하는데 애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