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선진)

하(夏)왕조는 존재했었는가?

by 중은우시 2009. 10. 24.

글: 장경위(張敬偉)

 

하왕조는 도대체 존재했었는가? 이는 사학자와 고고학자들이 계속 논쟁을 벌이고 있는 문제이다. 그러나 사실은, 중학교 역사교과사에서 이런 사실을 명확히 그리고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기원전 2070년, 선양제(禪讓制)의 마지막 수익자이자 치수영웅인 대우(大禹)가 중국역사상 최초의 왕조인 하왕조를 건립했다. 그 아들인 계(啓)는 백익(伯益, 선양의 후보자인 대우의 계승자)을 죽이고, 자승부업(子承父業)의 왕위세습제도의 남상을 이룬다. 하나라는 400여년간 존속하다가, 1600년 마지막 왕인 하걸(夏桀)이 상(商)나라의 성탕(成湯)에게 멸망당한다.

 

기본적인 사실기재는 <<시경>>, <<상서>> 및 상고문화재의 명문(銘文)에 나오는 대로이다. 예를 들어, 춘추시대 말기의 제후종(齊侯鐘), 진공궤(秦公簋), 서주 중기의 수공수(遂公盨)등이 있다. 특히 수공수에는 '천명우부사(天命禹傅士), 수산준천(隋山浚川)"이라는 명문이 있다. 서한의 사학가인 사마천은 그의 <<사기>>에서 하왕조의 세계(世係)와 여러가지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상세한 하나라의 연대(기원전2070-기원전1601)는 비록 '대략'이라는 불확정시간용어가 사용되어 있지만, 중국의 하상자단대공정에서 인정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중국학계의 기본적인 견해는 하왕조는 확실히 존재했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필자도 그렇다고 믿는다. 인류의 초기문명서광은 몽매한 시대의 울타리에서 생겨났다. 황실히 어둡고 잘보이지 않는 것이다. 문자기록이 없다는 한계하에서, 구전으로 전해지는 것은 가장 진실한 인류문명의 맹아시대의 역사전승방식이다. 비록 구전으로 전해지다보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여러가지 와전이 일어나게 되고, 인류의 초기시대의 자연풍운변환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이들 전설은 신비롭고 신화적인 색채를 띄게 된다. 중국뿐아니라, 지구의 거의 모든 민족들은 원고시대의 신화전설을 가지고 있다. 이런 문명의 보편성과 역사전설의 관통성은 이런 사실을 증명한다. 원고신화의 핵심은 사실 인류문명의 역사를 포함하고 있다고. 즉, 비록 고고학적으로 혹은 문자자료로 검증할 수는 없지만, 하왕조의 존재는 논리적으로 진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언급할만한 것은 앙소, 용산, 이리두, 이리강등 현대고고학에서 발견한 문화유적지에서 우리는 출토된 기물이 이미 상당한 사회정치적 속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유감스러운 점은, 이들 문화유적지에서 우리를 곤혹스럽게 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현대인들이 읽고 확인할 수 있는 문자가 없다는 것이다. 기껏해야 문자에 유사한 간단한 부호가 나올 뿐이다. 그리고 이 시기는 전설상의 삼황오제와 하왕조에 해당한다. 이런 논리에 따르면, 하나라가 역사상 존재했다고 할 수 있을 뿐아니라, 삼황오제의 전설도 고대인들이 허구로 꾸며낸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더욱 확실하고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은, 청나라 광서제때 갑골문의 발견으로 상왕조의 존재가 확인되었다는 것이다. 하남안양 은허의 발굴은 태사공 사마천이 <<사기>>에 기록한 상나라 세계의 정확성을 방증했다. 이에 대하여 왕국유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은주(殷周)의 세계가 확실한 것으로 추정하면 하후(夏后)의 세계도 확실하다고 보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왕국유선생과 같은 견해를 표명하는 것은 중국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의 은위장(殷瑋璋) 교수이다. 그가 채용한 것은 전통사학기록과 갑골문이 상왕조의 존재를 확인했다는 논리에 근거한다.

 

하왕조에 대하여 의문을 표시하는 견해는 현재 보기에 약간은 풍자적이고 괴이하다. 청나라말기에서 민국초기에 이르기 까지, 중국이 빈약한 현실상황하에서 많은 학자들은 중국전통문화와 사학관에 의문을 나타냈다. 이들 전통이 중국이 낙후한 근원이라고 보았다. 사학에 서 의고(疑古)정서를 표현한 것으로는 강유위가 원고전설은 "상고망매무계(上古茫昧無稽)"라는 것이 있다; 문화에서 나타난 것은 '공가점(孔家店)'을 타도하자는 사조이다. 이런 환경하에서 서방 고고학을 받아들여 중국현대고고학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검증가능한 실물고고학적 증거에 대하여 극단적인 편집증세를 보인다. 사실상, 지나치게 '엄격'한 것은 사실 말도 되지 않는다. 고고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았다고 하왕조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는가? 이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더욱 중요한 것은, 1960년대초에 발굴된 하남 언사 이리두문화유적지는 면적이 10.8평방미터이다. 차바퀴유적이 있고, 궁전유적이 있다. 그리고 기세가 대단하고, 왕의 기개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탄소연대측정에 따르면, 이 유적지는 지금으로부터 개략 3600년-3700년사이의 것이다. 하왕조의 시대와 부합한다. 학계에서는 이리두문화의 시기확정에 의견차이가 있다. 한쪽은 이리두문화가 하나라에 속한다는 것이고, 다른 한편은 이리두문화는 하,상의 혼합문화라는 것이다. 어찌되었건 간에, 고고학적으로 인정된 하왕조의 역사로 보면 증거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상왕조의 고고학적 확인자료를 지난세기에 겨우 찾아낸 것과 비교하자면, 하나라의 검증가능한 고고학적 발견도 앞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아마도 수백년 심지어 천년이상 기다려야 할 지도 모른다. 다만, 고고학자들은 더욱 과학적이고 신중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 가볍게 하왕조의 존재를 부인해서는 안된다. 정확한 태도는 하왕조의 존재라는 논리적 진실을 믿고 꾸준히 증거를 찾아내는 것이다.

 

감정적으로 말하자면, 하왕조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중화문명의 근원을 부인하는 것과 같다. 이성적으로 말하자면, 갑골문을 문화적 전승도구로 하는 상왕조는 문학과 정치제도를 볼 때 상나라사람들이 일거에 이루어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잊지 말라. 갑골문은 고도로 성숙된 문자이다. 창힐이 문자를 만들었다는 전설을 연상해보면, 문자전승에서 끊김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끊김은 분명히 하나라 문자이다. 그러므로, 하왕조를 찾는 것이, 고고유적에서 증거를 발굴하고, 하왕조 문자를 찾아내는 것 이외에 하왕조의 존재를 증명할 핵심증거를 찾아내야 한다. 갑골문이 상왕조를 확인해준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