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월초(越楚)
기원전 676년, 진무공(晋武公)의 아들 희궤제(姬詭諸)가 군왕의 지위를 승계하니, 그가 진헌공(晋獻公)이다. 진헌공의 부친인 진무공은 말년에 제환공(齊桓公)의 딸인 제강(齊姜)을 취한다. 그런데, 제강은 태자로 있던 희궤제와 사통한다. 희궤제는 즉위후에 아예 서모인 제강을 부인으로 삼는다. 그리고는 딸 백희(伯姬)와 아들 신생(申生)을 낳는다. 백희는 나중에 진(秦)나라와 진(晋)나라의 정략결혼에 따라 진목공(秦穆公)에게 시집가서 그의 부인이 된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진진지호"의 시작이다. 이후 20년간, 두 번의 "진진지호"가 있었다.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세번의 "진진지호"의 배후에 숨겨진 음모와 전쟁이다.
진헌공은 다시 융(戎)족의 두 여인을 부인으로 취하여 각각 중이(重耳), 이오(夷吾)라는 두 아들이 있다. 중이, 이오와 신생의 삼형제중에서 신생이 가장 어렸다. 그래도 신생은 제강의 소생이므로, 태자의 자리에 오른다. 헌공5년(기원전671년), 여융주(驪戎主)가 진헌공에게 여희(驪姬), 소희(少姬)의 두 자매를 바친다. 여희는 미모가 뛰어나서 진헌공의 총애를 받는다. 여희는 아들 해제(奚齊)를 핳는데, 진헌공은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여희를 부인에 책봉한다. 그 후에 발생한 '여희의 난'에서 태자 신생이 핍박을 받아 자살하고, 중이, 이오는 다른 나라로 도망치며, 해제가 진나라의 태자로 된다.
기원전651년, 진헌공이 사망한다. 진나라대신 구식(苟息)은 유명을 받아 해제를 새로운 진나라의 국왕으로 올린다. 진나라의 중신 이극(里克), 비정(邳鄭)은 여희의 권력독점에 불만을 품고 공자 중이가 귀국하여 왕위를 승계하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개인적으로 무사를 매수하여 어린 국왕 해제를 진헌공의 영당에서 암살한다. 여희는 바로 여동생 소희가 낳은 아들 탁자(卓子)를 새로운 국왕으로 올린다. 그러나, 좋은 세월은 오래가지 못했다. 얼마후의 궁중정변에서, 이극, 비정등은 진의 궁중에서 9살된 탁자를 죽여버리고, 구식, 여희등도 죽여버린다. 이극은 국정을 장악한 후, 사람을 보내어 국외로 도망쳤던 중이를 귀국하도록 한다.
중이는 국내의 상황을 잘 몰랐으므로, 귀국하여 왕위를 승계할지 말지에 대하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둘째인 이오는 양(梁)나라에 도망쳐 있다가, 양백(梁伯)의 장녀를 부인으로 삼아 아들 희어(姬圉)를 낳는다. 이오는 진헌공이 이미 죽었고, 이극이 해제, 탁자등을 죽였으며, 중이가 귀국하여 국왕이 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고는 마음 속으로 기뻐한다. 이오는 한편으로 이극에게 국상의 자리를 주고 백만무의 봉지를 내리겠다고 약속하고, 다른 한편으로 진목공에게 병사를 보내어 자신이 귀국하여 왕위를 계승하도록 도와달라고 한다. 그리고는 성공한 후에는 진(晋)나라의 하서 5개성을 진(秦)나라에 주겠다고 한다. 진목공은 안목이 있었다. 그는 그 5개 성을 중시한 것이 아니라, 이오가 무덕무능하다고 생각했다. 분명히 혼군이 될 것이며, 이는 나중에 진나라가 중원을 다투는데 유리하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진목공은 이오의 구원요청서신을 받은 후 대장 공손지(公孫枝)로 하여금 삼백량의 병거를 이끌고 이오가 진나라로 귀국하는 것을 호송하게 한다. 기원전650년, 이오는 원하던 바대로 국왕의 자리를 승계한다. 그가 바로 진혜공(晋惠公)이다.
이오가 즉위한 후, 진나라의 수도에 잠시 머물던 공손지는 하서오성을 내놓으라고 한다. 그러나, 이오는 약속을 어기고 하서오서을 넘겨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후 참언을 듣고는 이극을 자결하게 만든다. 죄명은 "살군난정(殺君亂政, 임금을 죽이고 정사를 어지럽히다)"이었다. 동시에 진(秦)나라 및 공자 중이와 가까운 대신들을 대거 주살한다: 예를 들면, 비정, 칠여대부(七輿大夫)등이 그들이다. 진목공은 대단히 화가 난다. 그리하여 기회를 보아 보복하겠다고 공언한다. 이 진혜공은 시운이 따르지 않았다. 즉위후에 진나라는 연속하여 가뭄과 해충의 재해를 입는다. 농사를 지어 추수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기원전 647년, 다시 심한 가뭄이 온다. 국내의 전답에서 거의 곡식을 거두지 못한다. 백성들은 사방으로 도망다니고, 국고는 텅 비어버린다. 사병들은 굶주리고, 원성이 길거리에 가득했다.
이오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철면피를 깔고 대부 경정(慶鄭)을 진(秦)나라로 보내어 양식을 사려고 한다. 이오는 이전에 신의를 어긴 적이 있었는데도, 진목공은 아주 대범하게 식량을 진나라에 팔아서 기근을 해결하는데 도와주겠다고 한다. 진목공과 그의 '두뇌'들의 의도는 명백했다. 식량으로 진(晋)나라의 인심을 사는 것이다. 그리하여 백성들의 마음이 진(秦)나라로 돌아서게 하려는 것이다. 이번 국제적인 구호활동은 아주 성대하게 이루어진다. 진목공은 명을 내려서 차량, 마필, 선박을 징집하고는 양식을 가득 싣고 진(晋)나라 수도로 향한다. 당시, 진(秦)나라의 식량운반선단이 진(秦)나라의 옹도에서 진(晋)나라의 강도까지 물길을 가득 메웠고, 길이가 수백리에 달했다. 진(晋)나라 백성들은 진목공이 양식을 보내준다는 말을 듣고는 모두 감격했다. 이번 국제적 재난구호활동은 역사에서 "범주지역(泛舟之役)"이라고 불리우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 일은 알 수가 없다. 세상은 돌고 도는 법이다. 다음해에 진(秦)나라의 위하(渭河)유역에 유례없이 심한 가뭄이 든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기근에 시달린다. 그러나, 진(晋)나라는 날씨가 좋아서 농사에 대풍이 들었다. 진목공은 사신 냉지(冷至)를 진(晋)나라로 보내어 양식을 빌려달라고 한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이오는 남의 불행을 고소해 했고, 진(秦)나라에 양식을 팔지 않겠다고 한다. 그뿐아니라 이오의 총신인 여이생(呂飴甥), 극예(隙芮)등은 오히려 자극적인 말까지 한다: "만일 우리나라 양식을 먹고 싶으면 진(秦)나라에서 군대를 보내어 가져가는 방법밖에 없다"
다시 한번 배은망덕한 이오를 보고, 진목공은 군대를 보내어 토벌하기로 결정한다. 그는 재상 백리해(百里奚)와 함께 친히 삼군병마를 이끌고 진(晋)나라를 공격한다. 진(秦)나라의 병력이 비록 적었지만, 군인들의 감정이 격앙되고, 투지가 드높았다. 진(晋)나라는 배은망덕하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다보니, 군심이 흩어졌다. 세차례의 전투를 거쳐 진(晋)나라는 연전연패한다. 기원전645년 가을, 진진(秦晋)양국은 한원(韓原)에서 결전을 벌인다. 이오의 말이 진흙밭에 빠졌다. 마침 진(晋)의 대장 경정이 지나가자 구해달라고 요청하지만, 경정은 이 무덕한 군주를 구해주고자 하지 않고, 그냥 채찍을 쳐서 버리고 간다. 결전은 진(晋)나라의 대패로 끝나고, 진(秦)나라는 이오와 그 가솔을 포로로 잡아간다.
진목공은 원래 소인배인 이오를 죽여버리려고 하였따. 그러나, 대장인 공손지가 이를 저지했다: "여전히 그를 군주로 세워두는 것이 좋겠다. 진(晋)에게 하서5성을 넘겨달라고 하고, 진태자 희어((姬圉)를 볼모로 잡아놓게 하면 진진의 두 나라가 평화공존할 수 있을 것이다" 진목공은 그의 말이 이치에 맞다고 보고, 즉시 이오를 엄밀하게 감시하도록 시킨다. 진목공의 부인인 목희(穆姬, 즉 伯姬)는 이오의 동부이모 누나이다. 원래 이오를 미워했다. 그 이유는 이오가 진나라의 왕위를 물려받을 때, 백희는 일찌기 그에게 서모인 가군(賈君)을 잘 돌봐주고, 해외에 유랑하고 있는 여러 공자들을 데려오라고 부탁한 바 있다. 그러나, 이오는 가군에게 음란한 짓을 하고, 여러 공자들을 데려오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이 무덕한 동생을 죽이려고 한다는 말을 들으니, 차마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사람을 시켜 후원에 높은 누대를 만들게 하고, 대의 아래에는 마른 장작을 넣게 했다. 그리고 태자, 공자와 딸을 데리고 흰 옷을 입고 스스로 분신하겠다는 말로 진목공을 협박해서 이오를 석방해서 귀국시키게 하라고 요구한다. 그리하여, 진목공은 이오를 풀어주어 귀국하도록 해준다. 진(晋)은 이 일로 하서5성을 할양하고 태자인 희어를 진(秦)나라에 볼모로 남겨둔다.
진목공은 인질로 잡고 있던 희어를 본국으로 돌려보내 국왕의 자리를 승계하도록 하려 했다. 그리고 자신의 딸인 회영(懷贏)을 그에게 시집보내어 처로 삼게 하였다. 또한 하동지역의 토지를 진(晋)나라에 되돌려 준다. 이것이 두번째 "진진지호"이다. 시기는 기원전 643년이다. 5년후, 태자 희어는 부친의 병세가 위중하다는 말을 듣고, 다른 사람이 군왕의 자리를 빼앗아갈까봐 우려하여, 몰래 부인 희영에게 함께 진(晋)나라로 도망쳐 돌아가자고 한다. 희영은 이렇게 말한다: 태자 희어와 함께 도망갈 수는 없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이 일을 누설하지도 않겠다. 그래서 태자 희어는 몰래 진(晋)나라로 도망친다. 다음해 진혜왕이 병사하고, 태자 희어가 왕위를 물려받는다. 그가 바로 진회공(晋懷公)이다. 진회공은 즉위하자마자, 진(秦)나라와의 일체의 교류를 단절한다. 그리고 해외에 망명중인 중이의 귀국을 불허한다. 진목공은 이 배은망덕한 사위를 크게 욕한다. 동시에 사방으로 진나라공자 중이의 행방을 수소문한다. 그를 진(晋)나라의 왕으로 세우게 하기 위하여서이다.
진헌공의 장남인 중이는 43세때 도망친 후, 사방을 돌아다녔다. 그동안 저명한 개자추(介子推)의 "넙적다리 살을 잘라서 먹이게 했다"는 이야기도 발생한다. 이때의 중의는 초(楚)나라에 있었다. 그는 초성왕(楚成王)의 가까운 친구였따. 금방 진나라의 대장군 공손지가 중이를 영접하여 진(秦)나라로 데리고 온다. 중이는 초왕과 헤어진 후 신하들과 공손지와 함께 진(秦)나라로 간다. 진목공은 중이를 보고는 극진하게 환대한다. 중이에게 5명의 여자를 주는데, 거기에는 원래 태자 희어의 본처였던 회영도 포함되어 있다. 진목공은 중이를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 딸을 중이에게 개가시키기까지 한 것이다. 진목공의 딸은 환갑이 넘은 중이에게 개가한다. 그리하여 그는 나중에 진문공(晋文公)의 부인인 문영(文贏)이 된다. 이것은 20년도 안된 기간에 발생한 세번째 "진진지호"이다. 진목공의 딸은 처음에 공자 희어에게 시집갔다가, 다시 그의 백부인 중이에게 개가한 것이다. 당시에는 그다지 기이한 일도 아니었던 것같다.
기원전636년, 진목공은 병력을 딸려보내어 중이를 귀국시켜 국왕이 되도록 한다. 진목공은 백리해, 공자집, 공손지등의 중신들과 400여 병거를 몰고 중이를 황하가에까지 호송한 후, 절반의 병마는 중이와 함께 강을 건넌다. 나머지 절반은 건너편에서 호응했다. 진(秦)나라의 도움하에, 중이는 진(晋)나라로 돌아가서 국왕이 된다. 그가 바로 진문공(晋文公)이다. 그후 중이는 도망친 진회공을 주살하고, 국내의 반란을 분쇄한다. 이로써 진나라의 불안했던 국면은 안정을 되찾는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춘추오패'의 하나가 된다. 중이가 죽은지 얼마되지 않아, 진목공은 기회를 틈타 이미 중원의 패자가 되어 있던 진(晋)나라를 패배시키고, 역시 '춘추오패'의 하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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