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예방육(倪方六)
청나라 광서25년(1899년), 금석학자인 왕의영(王懿榮)은 북경의 한약방에서 파는 용골(龍骨)에 오래된 문자가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왕의영은 청나라 광서6년에 진사, 한림이 되었다. 중국의 고대문물에 대하여 깊이있게 연구한 인물이었다. 당시에 왕의영은 이들 소위 "용골"이 보통물건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은상(殷商)시대의 유물이라고 생각했다.
"갑골문"이라는 단어는 왕의영이 발견하면서 붙여졌다.
현재의 갑골문은 대부분 은허(殷墟)에서 출토되었고, 시간은 중국의 상나라 후기(기원전 14세기-기원전 11세기)때의 것이다. 당시 상왕실은 점을 치기 위하여 귀갑(龜甲)과 수골(獸骨)에 문자를 새겼다. 갑골문은 중국에서 발견된 고대문자중 시기가 가장 빠르고 체계가 완벽한 문자이다.
갑골문은 아주 중요한 고한자자료이다. 동시에 비교적 완벽한 상나라의 역사이기도 하다. 거기에 담겨있는 역사코드는 아주 중요하다. 사람을 산 채로 제사지냈다(活人祭祀). 이것은 갑골문에서 나타나는 중요한 역사정보중 하나이다.
중국의 고대인들은 아주 미신적이었고, 귀신을 숭상했고, 조상을 섬겼다. 사람을 희생물로 삼아서 제사지내는 것은 이 원시종교신앙에 따른 것이다. 상나라때 점복술(占卜術)이 아주 발달했고, 무당의 지위가 아주 높았다. 이들은 상왕의 정치참모였다. 앞으로 며칠 내에 비가 내릴지 아닐지, 재난이 있을지 없을지, 농작물이 풍년일지 아닐지, 전쟁에서 승리할지 아닐지, 심지어 자식을 낳고, 병이 들고, 꿈을 꾸는 등의 일에 대하여도 모두 점을 쳤고, 신령의 의지와 일의 길흉을 알아내고자 했다.
점복의 결과는 왕왕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것이었다. 그중에서 상왕이 신으로 받든 것은 자연신 이외에, 가장 주요한 제사대상은 그 자신의 이미 돌아가신 조상들이었다.
점복이 잦고, 사람수는 많아서, 대량의 사람들이 제사를 위하여 죽임을 당했다. 전쟁으로 인한 사망 이외에 또 하나의 비인도적인 사망현상을 나타낸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상왕에 의하여 산 채로 제사지내졌는가? 1930년대부터, 오기창, 동작빈, 우성오, 진몽가, 구석규, 호후부, 허진웅, 상옥지, 요효수, 장병권, 이학근, 황전악, 황천수, 방도남등의 여러 중외의 고문자전문가, 고고전문가들이 갑골문에 대한 해독을 시작했고, 통계를 내기 시작했다. 파악하고 있거나 연구한 갑골문의 수량이 서로 다르고, 출토시기와 차수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지금까지 그 어느 학자도 확실한 숫자를 내놓지는 못하고 있지만, 그저 그 숫자가 놀랄 정도로 많다는 것은 알 수 있다.
중국고대에 특수한 제사풍속이 있었는데, 제사를 지낼 때 사람을 제물로 하여 신령에게 제사지내는 것이다. 그 자리에서 산 사람을 죽인다. 이는 은상시대에 가장 성행했고, 가장 참혹했다. 도대체 상왕이 산 사람을 제사지내는 것은 어느 정도였을까? 적지 않은 전문가들은 구체적인 수치를 내놓으려고 노력한 바 있다.
중국에서 이미 사망한 갑골학자이자 사학자인 호후부는 1974년에 그가 알고 있는 갑골문자료에 근거하여, 제사로 살해된 사람수를 통계낸 바 있다. 호후부가 1974년 <<문물>> 잡지에 <<중국노예사회의 인순(人殉)과 인제(人祭)>>라는 글에서의 통계에 따르면, 반경천은(盤更遷殷, 상왕 반경이 수도를 은으로 옮긴 것)으로부터 제신망국(帝辛亡國)에 이르기까지(기원전 1395년부터 기원전 1123년까지, 구체적인 연도에 대하여는 학설상 이견이 있다), 8세12명의 상왕이 집권한 시기동안, 모두 13,052명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1145개의 갑골문 복사에는 인생(人牲)의 숫자가 적혀 있지 않은데, 하나당 1인으로 치더라고, 제사에 희생으로 살해당한 사람의 수는 최소한 14,197명에 이른다.
호후부의 통계로 계산해보면, 반경천은에서 제신망국에 이르는 273년동안, 평균 매년 50명이 신령의 희생물이 되었고, 산채로 죽임을 당했다. 사실상, 제사에서 살해된 숫자는 이것을 훨씬 초과할 것이다. 아마도 수배에서 수십배이상일 것이다.
호후부는 제사에서 살해된 인생의 수량이 약간 변화한다고 보고, 상나라때의 활인제사를 4단계로 나누었다.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다.
무정(기원전1339년-기원전1281년) 시기: 58년간 9,021명을 죽임
조경, 조갑(기원전1280년-기원전1241년)시기: 39년간 622명을 죽임
늠신, 강정, 무을, 문정(기원전1240년-기원전1210년)시기: 30년간 3,205명을 죽임
제을,제신(기원전1209년-기원전1123년)시기: 83년간 104명을 죽임.
호후부는 이 놀라운 숫자는 완전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왜냐하면 일부는 해외로 유실되고, 어떤 것은 아직도 살펴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국내의 갑골문이 얼마나 되는지에 대하여도 지금까지 완전하게 통계를 내지 못하고 있다. 만일 이들 갑골문에 들어있는 사람을 희생으로 삼은 경우를 모조리 통계낸다면 숫자는 더욱 많아질 것이라고 했다.
갑골문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대상으로 삼은 숫자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통계를 통해 나오는 숫자도 서로 다르기 마련이다.
또 다른 상왕의 활인제사에 관한 통계버전은 <<상대의 포로>>라는 글에서 나타난다. 이 글은 중국고문자학자인 요효수가 1964년에 쓴 글이고, 1979년 8월에 출판된 <<고문자연구>>(제1집)에 실렸다.
상나라때의 인생(人牲)은 대부분이 전쟁포로였다. 요효수의 글에서 통계낸 갑곰룬의 총편수는 688개였다. 요효수는 상왕이 사용한 인생을 초기, 중기 말기의 세 시기로 나누었다.
초기: 무정시기에 5,418명을 죽임
중기: 조경에서 문정까지 1950명을 죽임
말기: 제을, 제신시기에 75명을 죽임.
서로 다른 버전의 통계숫자를 보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감소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료를 보면, 제을, 제신의 집권후반기에는 전쟁으 규모와 지속기간이 초기, 중기를 훨씬 넘어섰다. 전쟁에서 붙잡은 포로의 숫자도 훨씬 늘어났을 것이다. 그런데 왜 활인제사의 수량은 감소했을까?
인류사회발전사에 약간의 이해가 있는 사람이라면 알고 있겠지만, 상나라후기에는 생산력수준이 이미 새로운 수준으로 늘어났다. 이전에 전쟁포로의 용도가 이미 바뀌게 된 것이다. 이미 "인생"에서 "노예"로 바뀐 것이다. 이런 신분변화의 배후에는 인류문명의 진보가 있다.
다만,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살아있는 목숨이 상왕의 칼아래 죽어나갔는지는 갑골문의 배후에 숨겨져 있던 또 하나의 비밀일 것이다. 영원히 확실한 답을 알아낼 수 없는 하나의 수수께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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