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문혁전)

개국대전에 출석하지 못한 5명의 원수(元帥)는 어디에 있었는가?

by 중은우시 2009. 10. 7.

글: 김산(金汕)

 

60년전의 개국대전에 모택동의 곁에는 당정요인들인 주은래, 유소기, 송경령, 장란(張瀾), 고강(高崗)등이 모두 참가했다. 그런데, 주덕(朱德) 총사령관이 말을 할 때, 군대지휘관중에서 아주 중요한 인물들이 빠져 있었다. 사진으로 보면, 10대원수(비록 개국대전 6년후에 임명되었지만, 그들의 군대내에서의 지위는 알 수 있다)중에서 주덕 총사령관 외에, 유백승(劉伯承), 진의(陳毅), 하룡(賀龍), 나영환(羅榮桓)은 있었다. 그렇다면, 나머지 5명은 어디에 있었는가?

 

군대내에서 주덕의 바로 다음가는 인물인 팽덕회(彭德懷)는 개국대전전에 제1야전군의 사령관 겸 정치위원으로서 연안(延安)을 수복한 후, 병중에 있던 서향전(徐向前)을 대신하여 태원전투를 지휘하고, 군대를 이끌고 서북으로 진군했다. 그리하여 서안을 해방시키고, 난주를 함락시켰다. 모택동이 중화인민공화국성립을 선포할 때, 팽덕회는 난주의 '삼애당(三愛堂)'에 설치된 임시지휘부에 있었다. 라디오를 통하여 그들이 수십년간 분투한 이상이 실현되는 기쁨을 누렸다. 며칠후 팽덕회는 주천으로 가서 신강해방을 위한 전투배치를 실시했다.

 

전공이 혁혁했던 임표(林彪)는 개국대전 당시 42세였다. 그는 형양, 보경전투를 배치하느라 바빴다. 중앙에서 제4야전군에서 사람을 보내어 제1최 정협회의에 참가하라고 하여, 참가자격으로 따지자면 가장 자격있는 임표는 나영환 정치위원을 대표로 참가하게 했다. 주덕이 개국대전에서 전국에 진격명령을 내릴 때, 임표는 부대를 이끌고 대포소리를 들으면서 전진하고 있었다.

 

서향전은? 해방전쟁의 극도의 긴장과 피로는 병약한 그를 병석에 드러눕게 했다. 그는 부득이 청도로 가서 요양을 하고 있었다. 그는 청도에서 오래된 라디오를 통해서 감동적인 순간을 함께 느꼈다. 19일후, 그는 중국인민해방군 총참모장에 임명된다.

 

그리고 섭영진은 비록 북경에 있었고, 북경시시장을 맡고 있었지만, 그는 개국대전의 여러가지 일을 처리해야 했다. 여러번 천만문에 올라가서 배치를 확인하고, 열병연습을 지휘했다. 모택동이 공화국성립을 선언할 때,  그는 금수교의 곁에서 주덕 총사령관의 검열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천안문 성루에 오르지 못했다.

 

사진에는 또 한명의 군대내에서 중요한 인물이 빠져있다. 섭검영(葉劍英)이다. 그는 비록 해방후 제1기 북경시시장이었지만, 개국대전 1개월여전에 중공중앙 화남분국 제1서기 겸 광동군구사령관 및 정치위원을 맡게 되었따. 섭검영은 감주에서 라디오를 듣고 있었다. 당사자들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두시간여동안 꼼짝않고 라디오를 보고 있었다고 한다.

 

군인은 전쟁승리를 임무로 한다. 모든 영예, 환호는 모두 군대를 이끌고 전진하는 것보다는 우선순위가 밀린다. 군인은 가장 힘들다. 승리했을 때에도 그들은 격렬한 전투 속에서 잠자는 것도 먹는 것도 잊고 지냈다.

 

5명의 원수들은 인민공화국 건립에 불후의 전공을 세웠고, 비록 개국대전에 출석하지는 못했지만, 인민공화국의 역사에는 깊이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