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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문혁전)

용선쟁(龍船峥)사건: 1960년대 강남종족간 무장전투

by 중은우시 2009. 2. 2.

 

 

 

작자: 미상

 

1967년에서 1968년 사이에 평양현(平陽縣, 지금의 蒼南)의 강남(江南)에서 진림(陳林), 양황(楊黃)간에 대규모의 종족간 무장전투가 벌어졌다. 20여개월동안 지속되면서 12명이 죽고, 수십명이 부상당했으며, 가옥 189간이 불탔고, 대량의 농지가 황폐화되어 손실이 참혹했다.

 

1. 역사연원

 

평양강남의 진림, 양황 양대종파의 투쟁역사는 오래되었다. 때로는 조용하다가 때로는 계속되어, 영향이 아주 컸다. 그러나, 양파 종족간에 결맹을 맺게 된 연원에 대하여 역사서에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민간에서 전해내려오는 바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오래 전에 전쟁이 빈번하여 병력을 보충하기 위하여 관청에서는 민간에서 병사를 차출했는데, 1집에 남자가 3명이면 2명을 징집하고, 2명이면 1명을 징집했다. 진(陳)씨가문의 한 부녀가 이미 16살된 아들이 있는데, 다시 임신을 했다. 관청에서 나온 사람이 조사등기를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네가 만일 또 사내아이를 낳으면, 장남은 징집되어 군에 들어가야 한다." 그녀는 마음 속으로 놀라고 불안해했다. 오래지 않아 전란이 발생하였고, 그녀의 남편은 이미 죽었다. 비통한 가운데 아들을 데리고 밖으로 도망쳤다. 갖은 고생을 거쳐 평양 강남의 한 산 속에서 둘째아들을 낳는다. 그녀는 큰아들이 군대에 끌려갈까봐 두려워 어쩔 줄을 몰랐다. 그녀는 하늘에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이때, 그녀는 자신이 두 그루의 큰 나무 사이에서 분만했다는 것을 깨달았고, 나무(木)를 두개 합하면 임(林)이 된다고 생각했다. 여기에 생각이 이치지 그녀는 아이디어를 하나 얻었다. 관청에 등록할 때 그녀는 자신이 임씨집안의 며느리라고 얘기하고, 전란통에 남편은 죽었으며, 진씨성의 16살된 고아와 함께 도망쳤다고 했다. 고아의 성은 진씨이고, 자신이 낳은 것은 임씨라고 한 것이다. 관청은 그녀의 말을 믿어주었고, 마침내 큰아들은 군대에 끌려가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이로부터 작은 아들은 임씨성으로 살아가고 임씨의 시조가 된다. 그리하여, 진,임은 서로 성은 다르지만 핏줄은 같다. 그리하여 진,임은 두 종족이 한 파로 뭉치는 근원이 된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평양 강남에서 해방전에 임씨의 묘 하나를 발굴했는데, 비명에 "진림동종(陳林同宗, 진씨와 임씨는 같은 종족이다)"이라는 글이 있었다고 한다.

 

양황(楊黃)의 연합에 대하여도 민간에 전설이 전해진다. 오래 전에, 평양 강남의 하두(河頭)에 있는 황씨와 하팔미(夏八尾)의 하(夏)씨간에 싸움이 벌어졌다. 영봉촌(靈峰村)의 황씨는 하팔미를 도왔다; 동문양(東門垟)의 양(楊)씨는 하두의 황씨를 도왔다. 하두의 황씨가 패배하여 수십명이 죽었다. 영봉의 황씨는 하두의 황씨와 동문양의 양씨를 뒤쫓아가서 죽이려고 하였다. 그런데, 도중에 황가택(黃家宅)의 황씨가 이를 막았다. 황씨가 황씨와 싸워서는 안된다. 상대방이 이미 패하였으니, 양씨들을 때려서도 안된다. 만일 권고를 듣지 않으려면 우리부터 죽여라. 그러자 영봉의 황씨는 황, 양씨를 공격하는 것을 멈추었다. 양씨는 황가택 황씨가 도와준 은혜를 잊지 않았고, 이후 양,황씨는 서로 원수에서 친구로 바뀌었고, 서로 결혼하면서 한 파가 되었다.

 

진림, 양황의 종족무장전투는 계속 이어지고 끊임이 없었다. 사상자가 적지 않았다. 역사적인 원한도 아주 깊었다. 쌍방은 서로간에 적개심이 대단했다. 종족투쟁과 신에게 빌고 조상에 제사지내는 미신활동을 밀접하게 연결시켰다. 그리고 일련의 의식을 만들었다. 종족투쟁의 개시전에는 먼저 조상에 제사를 지내고, 향불을 사르고, 신과 부처에 절을 하고, 도와달라고 기도한다. 종족투쟁이 개시된 후에는 부녀들이 불당이나 사당으로 가서 향을 사르고 촛불을 켜고 부처에게 보호해달라고 기원한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 상대방을 저주한다. 이러한 극단적인 적대시하는 종족관념은 해방후에까지 지속되었다. 어떤 경우에 학교의 학생들도 선을 그어서 각각 죽간, 몽둥이를 들고 수시로 싸움을 벌였다. 심지어 기층정부관리도 현지성씨와 맞지 않으면 일을 할 수가 없었다. 어떤 경우에는 현지성씨군중들에게 쫓겨나기도 하였다. 문혁기간동안, 진동공사의 서기는 황모였는데, 현지종파세력에 굴복하여 성을 진씨로 바꿀 수밖에 없었다. 술자리를 8탁자 마련해놓고, 자신이 진가보에서 가장 세력이 강한 진씨 서삼방의 족보에 들어간 것이다. 현에서 파견나온 관리들도 공안,검찰,법원 혹은 어떤 부서이든간에 이 동네로 오면, 성씨만으로 친소를 가린다. 성만 인정하지 관직은 인정해주지 않는다. 금향구 방하와 황가택의 종족투쟁기간동안, 금향파출소의 소장인 진모는 권총을 차고 방하에 가면 열렬히 환영을 받았지만, 황가댁을 가면 황씨성의 사람들에게 결박당하고, 무기를 빼앗겼다. 그들은 그를 진씨성의 간첩으로 취급했던 것이다.

 

2. 종족투쟁조직

 

(1) 진림종파선: 진(陳), 림(林), 김(金), 여(呂), 전(錢), 유(劉), 방(方)등의 성씨로 구성되었다. 조직명칭은 강남진림자위동맹연합회이다. 주요 핵심 인물은 진송악, 진악증, 진가여, 진창주, 진봉춘, 진무통등이다.

 

(2) 양황종파선: 양(楊), 황(黃), 왕(王), 오(吳), 이(李), 장(張), 장(章), 하(夏), 무(繆), 풍(馮), 설(薛), 손(孫), 동(董), 반(潘)등 14개 성으로 구성되었다. 조직명칭은 강남양황자위동맹연합회이다. 주요 핵심인물은 양립촌, 황욱침, 양국여, 양개천, 양인강, 하소동, 황림목 등이다.

 

조직지도자가 있게 되면서, 양대종파의 무장투쟁은 점차 업그레이드되어 조직적으로 계획하고 지휘되었다. 1968년 음력 7월 23일부터 8월 13일까지, 진림, 양황의 양대 종파무장세력은 황가택, 방하에 집결하여 전투를 벌인다. 49일동안 싸웠지만 승부를 보지 못한다.

 

1968년 9월, 진림종파는 동전(東田)에서 회의를 개최한다. 회의에 참가한 사람은 진림종파선의 131개 생산대대의 당지부서기, 대대장으로 모두 300여명이었다. 이번 회의의 주요 의제는 어떻게 더 대규모로 종족투쟁을 벌여서 상대방을 이기느냐에 있었다. 이를 위하여, 회의는 조직지도자, 물자조달등 중요문제를 결정한다. 진림무장총지휘부를 결성하기로 하고, 진악증이 총지휘, 진가여가 부총지휘를 맡는다. 총지휘부 구성원은 "사성진(四姓陳)"(진가보, 선거, 아점교, 탁원)등 10개 생산대대에서 각각 2명을 추천하여 모두 20명으로 구성된다. 이어서, 양황종파도 유사한 회의를 개최하여, 무장조직을 만들고 지휘인원을 확정한다. 이후 무장투쟁은 급속히 업그레이드되고, 이해 10월에 "용선쟁"사건이 벌어지게 된다.

 

3. 용선쟁사건

 

1967년에 진림종파선의 무장세력은 양황종파에 소속된 신궁교(神宮橋)지역을 포위공격한 바 있다. 1968년 10월, 진림종파의 무장세력은 다시 신궁교지역을 포위공격한다. 양황종파는 진림무장세력이 신궁교지역을 포위공격하는 위협을 제거하기 위하여, 신궁교, 동문양에 두 개의 전선지휘소를 설립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각각 양립촌, 양국여가 지휘관이 된다. 이와 별도로 하소동으로 하여금 외지의 총수를 데리고 신궁교지역으로 들어가게 하여 양 지휘소 사이에 연락소를 설치한다. 연락인원을 두고, 전문적인 연락신호를 둔다. 이리하여 양파의 궁신교와 진파의 진가보, 선거등지가 대치하고, 양파의 동문양이 탁원과 아점교를 견제하는 국면을 형성한다. 이것은 "용선쟁"사건의 전주이다.

 

양파는 신궁교지역에서의 피동적인 국면을 타파하기 위하여, 화력으로 진파의 각 교통요지를 장악하고, 진파의 각 지역간 연락을 차단한다. 1968년 10월 23일 하소동, 양립동의 두 사람은 동문양으로 가서 양국여, 장정주를 찾는다. 그리고 군사적인 문제를 협의하여 "용선쟁"이라는 전략요충지를 점거할 계획을 세운다. 이어 10월 25일 오전, "용선쟁" 양화수등은 연명으로 동문양의 무장세력으로 하여금 "용선쟁"에 주둔해달라고 요청하게 된다. 같은 날, 오후, 동문양지휘소의 총지휘인 양국여는 물자조달팀에 총탄, 식량등을 점검한다. 그리고 물자조달팀의 황극탕에게 그날 저녁에 용선쟁에 무장진주할 것이라는 소식을 털어놓는다. 오후, 양문훈을 우두머리로 하는 동문양지방지휘소는 술자리를 열고, 무장으로 "용선쟁"에 진주하는 계획을 논의하고 결정한다. 그리고 신궁교 지휘소와 연락하여, 그들로 하여금 무기와 인원을 빼내어 공동으로 진주하자고 제안한다. 그후, 양국서는 창고의 모든 총탄, 식량을 꺼내고, 무장인원 34명을 선발하여, 그날 밤 9시에 "용선쟁"에 잠입한다. 출발전에, 양국서는 동문양 지방지휘소의 양문훈, 풍지금등과 약속한다: 다음날(즉 10월 26일), 아침 6시에 동문양지휘소는 탁원을 공격하는 척하여, 허장성세를 보인다. 이는 진파무장이 물러나도록 유도하고, 양파무장세력이 도중에 습격하여, 상대방의 무기를 빼앗으려는 것이었다. 만일 "용선쟁"에 진주한 인원들이 위험한 상태에 처하면, 신호탄을 표지로 하여 동문양지휘소가 즉시 무장을 파견하여 호응해주기로 하였다. 양파는 "용선쟁"에 진주한 후, 즉시 양파군중을 소집하여, 방어공사를 벌이고 진지를 고수하고자 한다.

 

1968년 10월 26일, 진파는 양파가 이미 "용선쟁"에 진주한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양파의 동문양무장이 탁원으로 진공한 것도 알게 된다. 진파지휘부는 즉시 사람을 모아서, 후퇴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그날 오후 1시경에 무장조직을 이끌고 "용선쟁"에 강력한 공격을 감행한다. 현장에서 진파는 4명이 맞아죽는다. 그날 오후 3시, 진파무장세력은 용선쟁으로 들어가 집 1채를 불태운 후에 스스로 물러난다. 양파는 진파가 집을 불태운 것을 보고는 약세를 보이지 않고 각각 하서안, 유전에서 진씨의 집 2채 8간을 불태워버린다. 이제, 양파에서도 사건이 커졌다는 것을 알았다. 일부 인원들은 동요하기 시작했고, "용선쟁"에 주둔한 인원은 속속 도망쳤다. 나중에는 양국여, 장정주등 12명이 남았다. 동문양지휘소는 계속하여 양국여에게 무리를 이끌고 철수하라고 요구했다. 이때 양국여는 지휘가 제대로 되지도 않고, 더 이상 어찌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용선쟁"에서 철수한다. 진파무장세력은 그 틈을 타서 "용선쟁"에 들어가서 148간의 집을 불태워버린다. 그리고 재산을 모조리 빼앗아간다. 양파는 마찬가지로 진파에 보복했다. 다시 유전, 전양저로 가서 모두 27간을 불태운다. 이제 "용선쟁"의 전투는 "용선쟁"의 마을 전체가 불타서 무너지면서 끝이 난다.

 

"용선쟁" 전투에서 진, 양의 양파의 무장세력의 배치는 다음과 같았다.

 

진파는 "용선쟁"을 점령하기 위하여 무장지휘, 작전배치 및 물자조달등에서 다음과 같이 결정한다: "용선쟁"공격점령총지휘부를 결성한다. 진악증이 총지휘를 맡고 진가여가 부총지휘를 맡는다. 징송악은 물자조달(경제,무기탄약,공관,식당등)을 책임진다. 총회계는 진은청이었다. 총출납은 진지은이었고, 군사지휘의 주요한 의사결정자는 진악증, 진가여, 진송악, 진무통등이었다.

 

1968년 10월 26일(음력 9월 초나흘) 오전, 진파지휘부는 "용선쟁"을 공격하는 결정을 내린다. 계획은 3로로 나누어, 진지상이 전적총지휘를 맡고, 총수 60명이다:진가보 20명은 경기관총 2정, 소총 9정, 반자동소총 1정으로 서남에서 동북으로 "용선쟁"을 공격했다;선거교두 20명은 경기관총 2정, 화포 1문, 소총 7자루를 가지고 북쪽에서 대교를 돌진하여 "용선쟁"을 공격했다; 탁원,아점교 20명은 경기관총 3정, 돌격총 1자루, 소총 12자로를 가지고 "용선쟁"의 서북쪽에서 다리를 지나 공격해 들어갔다. 진공을 개시한 후, 강이북의 양로는 다리를 건너는데 실패하여 4명이 죽는다. 진가보는 서문으로 공격해 들어가서, 집1채 5간을 태운 후에 철수한다. 그날 오전, 진파무장세력은 동문양을 공격하는 척해서 양파의 심리를 뒤흔들고, 그날 저녁에 노포로 후퇴한다.

 

전투가 전개된 후, 쌍방의 공수태세는 다음과 같다: 진파는 "사성진"(진가보, 선거, 아점교, 탁원)의 무장세력으로 "용선쟁"을 점령하는 것을 위주로 하였다. 그리고 상대방인 양파 신궁교무장세력이 공격해 들어오는 것을 방어했다; 양파는 동문양, 개여양, 남암의 무장세력으로 탁원을 공격하는 것을 위주로 하고, 전양저의 진파무장의 공격을 방어했다; 양파는 또한 신궁교 무장세력으로 유전을 공격하는 것을 위주로 하고, 진가보 진파무장의 진공을 방어했다. 이상의 각로와 각 지점은 상호 공격, 상호 견제하면서 진행하였다. 무장진공을 돕기 위하여, 쌍방은 각각 방화대를 조직했다. 진파는 100여명으로 구성된 방화대를 "용선쟁"에 투입하여 집을 불태웠다; 양파는 26일 오전 11시경, 노포, 개여양, 동문양에서 방화대를 조직하여, 전양저로 가서 진씨의 집 19간반을 불태웠다. 전양저의 사람들은 상황이 좋지 않을 것을 보고 나머지 80여간의 집을 철거하고, 탁원등지의 진씨성의 사람들과 방화대를 조직하여 "용선쟁"으로 가서 나머지 집들을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 그 때가 11월 26일 12시경이었다. 오후에, 탁원, 전양저, 아점교 등지의 진씨성의 사람들이 "용선쟁"으로 들어온다. 그리고 나머지 물건들을 모조리 가지고 간다. 오후 4시가 되어, 신궁교의 양씨성의 사람들이 유전으로 들어가서 진씨의 집 7간을 불태운다.

 

"용선쟁"전투후에 진림, 양황의 두 파의 원한은 더욱 깊어진다. 더욱 대규모의 종족전투를 벌여 상대방을 패배시키고자 한다. 무기를 쓰는 외에, 장량, 이하의 일대에는 지뢰를 묻고, 철조망을 쳤다. 평양강남에서의 대규모 종족전투는 성, 지방, 현정부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그들은 즉시 조치를 취하여 이들간의 전투를 제지한다. 그후에 인원을 조직하여 종족투쟁사건에 대하여 조사를 시작하고, 우두머리들을 처벌한다. 이리하여 종족투쟁으로 인하여 조성된 강남의 장기간동란은 점차 평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