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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문혁전)

소련공군의 한국전 참전

by 중은우시 2008. 12. 28.

 

 

 

글: 고홍비설(孤鴻飛雪)

 

요녕성 남부의 작은 도시 여순구(旅順口)는 지금 대련(大連)시의 한 구(區)가 되었다. 특수한 지리적 위치로 인하여, 중국근현대사상 여러가지 중요한 사건들 예를 들면, 청일전쟁, 러일전쟁, 부의의 만주국건국, 소련홍군의 동북지방진입 및 대련에 10년간진주한 일....등등이 모두 이 곳과 관련된다.

 

여순은 지금도 여전히 비밀유지가 엄격한 곳이다. 연해개방도시인 대련에서 국가는 여순구구의 일부만 개방했을 뿐이다. 이곳의 최대비밀은 반세기동안 덮여져 있는 소련공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했다는 역사진상일 것이다.

 

202개의 묘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순소련군열사능원에 있는 1600개의 형태가 서로 다른 묘비중에서 202개의 묘비로 구성된 거대한 방진(方陣)은 필자의 주의를 끌었다. 묘비의 주인공은 소련군의 비행기조종사였다. 희생된 시간은 1950년에서 1953년까지이다. 202명의 비행기조종사라면 5개단을 구성할 병력이다. 비록 훈련이 아주 위험하다고 하더라도, 3년의 기간내에 이렇게 많은 비행기조종사들이 사고를 당할 수는 없다. 전쟁이 아니고서는. 이 기간동안에 세계에서 가장 큰 지역전쟁을 꼽자면 당연히 한국전쟁이다.

 

다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역사서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중국과 소련은 합의를 달성하여, 중국이 앞장서서 부대를 보내어 미군과 싸우고, 소련은 공군을 내보내어 공중지원을 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지원군부대가 한국의 전쟁터로 떠나기 전날 소련측은 돌연 그들의 공군은 아직 준비되지 안았다고 말한다. 18일, 모주석과 당중앙은 의연히 결정한다: 소련공군의 지원이 없더라도, 마찬가지로 출병하여 미국에 대항하고 조선을 원조한다. 19일, 지원군부대는 게획에 따라 압록강을 건너, 조선에 들어가 작전에 가담한다."

 

지원군 부사령관 홍학지(洪學智) 상장이 쓴 <<항미원조전쟁회고>>라는 책에서도 똑같이 적고 있다. 팽덕회(彭德懷) 원수의 <<팽덕회자술>>에서는 아예 이 부분에 대하여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경량급"전쟁의 "중량급"비밀

 

통계에 따르면, 한국전쟁이 발발한 초기에 미국과 그 동맹국은 강력한 공중역량을 투입하여, 각종 작전비행기가 1200여대에 달하였다고 한다. 당시 중국공군비행기는 200대도 되지 않았다. 비율은 6:1이다. 미군비행기조종사가 비행한 시간은 대부분이 1000시간 이상이었고, 많은 경우는 3000시간에 달했다. 지원군 비행기조종사의 비행시간은 가장 많은 경우도 100시간이 넘지 않았다. 비율은 30:1이다. 미군비행기조종사는 대부분 2차대전을 거쳤고, 전투출동이 평균 300회이상이다. 그러나, 지원군비행기조종사는 막 단독비행을 배우고, 전투에 참가한 경험이 없다. 비율은 300:0이었다. 어떤 사람은 한국전쟁에서 중국-미국의 공중전을 이렇게 비유한다: "헤비급 권투선수와 플라이급 권투선수의 불공평한 싸움"

 

그러나, 중국-미국의 공중전에서 지원군공군은 대거 위력을 발휘하여, 미군기를 425기나 명중시켰다. 그중 격추가 330대이고, 격추당한 것이 231대였다. 이리하여 1:1.3의 혁혁한 전과를 세워, '플라이급'이 '헤비급'을 누른 결과가 나왔다.

 

지원군 공군은 1951년 1월 21일 미군기와 전투를 시작한다. 전투를 시작하고 난 후인 그해 11월, 미국의 공군참모총장 반덴버그는 "거의 하룻밤만에 중국이 세계에서 공군력이 가장 강대한 나라중 하나가 되었다."고 감탄했다고 한다.

 

사실은 소련공군이 지원군공군을 교육훈련시키는데 뛰어난 공헌을 했을 뿐아니라, 지원군의 "추응(雛鷹)"을 도와 미국의 "독수리"를 타격하는 데에도 큰 공헌을 세웠다.

 

중국,소련,미국의 묵계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다. 국제투쟁에서 특히 냉전시기에 중국, 소련, 미국의 삼대국은 많은 문제에 대하여 서로 치열하게 다투었다. 다만, 소련공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한 이 문제에 있어서는, 서로 묵계를 이루어 엄격하게 기밀로 유지했다. 그리고 이 비밀은 수십년간 계속 지켜지고 있다. 현재 수집된 자료를 보면, 이 묵계의 핵심은 소련과 미국이 직접 맞붙었다는 비밀을 누설하지 않고자 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세계대전으로 비화될 수 있다.

 

1950년 10월 5일, 스탈린과 소련공산당 중앙정치국은 조선위기를 토론하면서, "여하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소련과 미국이 한반도에서 직접 충돌하는 것은 피하여야 한다. 설사 소련이 어쩔 수 없이 북한을 포기하게 되더라도"

 

1개월후, 전쟁국면의 변화와 중국측의 계속된 독촉에 스탈린은 엄격한 비밀유지를 요구하고, 마침내 출병명령을 내린다. 1950년 11월의 첫 일요일 제64방공집단군의 군사령관인 로보프는 32대의 비행기로 구성된 비행단을 이끌고 단동(丹東) 랑두(浪頭)공항에 도착한다.

 

신분이 폭로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소련군은 여러가지 기밀유지조치를 취한다. 예를 들어, 소련군비행기의 휘장을 말소하고, 중국군대의 "八一" 휘장을 그려넣는다; 조종사는 중국공군복장을 입는다; 조종사들이 미군통제지역과 해상작전은 하지 않는다, 왜나하면 어쩔 수 없이 비행기를 포기하고 낙하하게 되면 미군의 포로가 될 수 있기 대문이다; 중국인과 함께 사진찍지 않는다, 그리고 서로 개인적인 사진교환을 하지 않는다; 여하한 경우에도 무선국에서 러시아어를 말하지 않는다. 조종사들에게는 1인단 1개의 카드를 주는데 위에는 러시아알파벳으로 필요한 중국말, 한국말을 적었다.(이 명령은 작전의 필요에 부합하지 않아서, 잘 집행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소련공군은 처음에는 낭두공항에 머문다. 그곳은 압록강대교와 가까워 방공에 편리했지만, 기밀유지에는 불리했다. 소련군의 공군기가 계류중인 곳은 중국과 북한인원의 접근이 엄격히 차단되었다. 오래지 않아. 소련군은 다시 대동항(大東港)공항을 사용하게 된다. 그리고 대포(大浦)와 대고산(大孤山)공항은 중국과 북한의 부대가 사용한다. 반개월후, 지휘의 편의를 위하여, 중국과 북한은 낭두공항에서 중국-조선공군연합사령부(공련사)를 설립한다. 공련사는 로보프중장을 참여시키고 그가 통일적으로 작전을 지휘하게 한다. 그러나, 로보프는 이를 거절한다. 그는 "군사적인 각도에서 보면 이것은 좋은 의견이다. 그러나, 정치적인 각도에서 보면 깜짝 놀랄 일이다...나는 적극 협조할 것은 약속한다"

 

비록 소련공군은 각종 조치를 취하여 기밀유지하였으나, 미국은 금방 여러 경로로 수집된 정보분석을 통하여 사실의 진상을 파악했다. 놀라운 점은 이런 대규모 미소공군전에 대하여 미군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중에 우주항공조종사가 된 존 글랜은 이렇게 말한다: 그는 분명히 러시아인과 싸우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당국은 미그기안에 소련인이 있는 줄을 알았을 뿐아니라, 소련조종사들이 각종 제한을 받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사실상, 당시 미국도 마음은 있지만 힘이 미치지 못했다. 그들은 유럽에 겨우 150대의 비행기가 있어 1개사단병력도 되지 않았다. 소련과 전면전을 벌일 역량이 되려면 2-3년의 준비기간이 필요했다.

 

"큰형님"은 왜 약속을 여러번 뒤집었는가?

 

처음에, 소련은 한국전쟁에 개입하기는데 동의하지 않았다. 나중에 강대한 공군을 파견했다.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막 건립된 사회주의진영은 엄중한 도전에 직면한다. "큰형님"인 소련이 정말 수수방관할 수 있을까?

 

최근 출판된 <<항미원조전쟁기사>>, <<백만대군재조선>>등의 서적에서 드러난 바에 따르면, 소련공군의 참전은 최소한 3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소련의 극동공군기지가 미군의 폭격을 받았다. 1950년 10월 8일, 블라디보스톡의 수하야레카공군기지가 미군제트전투기의 폭격을 받았다. 실제로, 이런 공습은 8월부터 시작되었다. 단지 공급이 소련변경지역에서 진행되었을 뿐이다. 미국은 처음에는 공습사건을 부인한다. 그러나, 11일후에 "의외사건"이라면서 사과한다. 자신의 안전이 위협을 받는데, 소련이 그냥 있을 수 있겠는가?

 

둘째, 스탈린의 말이 있었다. 1950년 10월 8일 저녁, 주은래는 북경에서 비행기를 타고 소련으로 가서 스탈린과 회담한다. 스탈린은 "중국의 항미원조에 필요한 비행기, 대포, 탱크등 군사장비를 완전히 만족시켜주겠다. 다만 소련공군은 준비가 되지 않아서, 2달 혹은 2달반이 지나야 출동할 수 있다" 이는 소련이 두가지를 모두 대비했다는 것이다  두가지 경우를 모두 준비해서 참전하거나 하지 않거나 진퇴를 자유롭게 정할 수 있도록 하였다.

 

셋째, 스탈린은 미국이 극동에서 세력확장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2차대전에서 소련은 손실이 중대했다. 거대한 희생을 입었다. 그리하여 평화시기가 한동안 진행됨으로써 실력을 회복하고 국력을 모을 필요가 있었다. 다만, 미국은 전쟁의 포화를 자기의 집문앞까지 끌고왔다. 그리하여 스탈린은 비밀출병을 결정하고, 미국을 막아내고자 한 것이다.

 

영원한 비밀은 없다

 

미국인이 먼저 "소련공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했다"는 중대한 비밀을 털어놓는다. 1988년,미국의 전대통령 아이젠하워의 심복이었던 허버트는 "우리는 이 비밀을 반드시 지켜야 했다. 당시 일단 이것이 드러나면, 우리는 거대한 압력에 부닥칠 것이고, 우리는 러시아와 전쟁을 한판 벌여야 했다"

 

1992년 6월, 러시아는 이 민감한 화제를 공개하기 시작한다. 옐친은 미국상원의 전쟁포로 및 실종자조사위원회에 보낸 서신에서, "우리는 1309대의 미군비행기가 북한상공에서 격추되고, 262명의 미군조종사들이 구조된 것으로 안다"고 하였다. 서신에서 옐친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이들 조종사들은 소련공군에게 격추된 것이다. 그리고 중국, 소련, 북한 공군이 공동으로 격추한 것이다.

 

한국전쟁 전문가인 단츠 브라사이는 소련군의 자료를 자세히 검토한 후에 한국전쟁의 상공에서 소련군조종사의 출동이 약 70%를 점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들의 역할은 결정적이었다. 북한은 공군역량이 없었다. 소련의 도움은 절대적이었고 압도적이었다"

 

중국이 기밀유지는 가장 잘했다. 2000년 2월이 되어, 1급전투영웅이며 전공군사령관인 왕해(王海) 상장이 <<나의 전투생애>>라는 책에서 비로소 이렇게 썼다: "전쟁초기, 중국인민지원군 공군은 아주 젊고 약소했다. 공군전은 주로 소련공군이 싸웠다. 나중에 대형기합동작전 특히  F-86대형기합동작전에도 여전히 소련공군이 주역이었고, 중국인민지원군공군은 그들을 도와서 작전임무를 수행했다...소련공군의 지원이 없었더라면, 중국인민공군은 이렇게 빨리 발전하지 못했다. 지원군 공군이 이렇게 휘황한 전적을 취득할 수 없었다."

 

소련공군의 전과는 어떠한가?

 

1999년 7월,<<양자만보>>에 한가지 소식이 나왔다. <<소련4만군인이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이 소식은 러시아 국방부 전사연구소에서 편찬한 관련 기밀해제자료에서 나왔다. 이들 문건에서는 소련군이 전쟁의 전과정에 중국과 북한영내에 진입했으며, 그중 가장 적극적인 역할을 한 것은 조종사들이다. 소련공군의 최정예인 근위군 1, 2, 3사단이 모두 중국에서 윤번제로 참전했다. 가장 많았을 때는 1952년으로 병력이 2.6만에 달했다.

 

2000년 7월, <<해방일보>>의 뉴스에서는 소련의 퇴역 조종사인 크라마룬커(나이가 근 80)가 친히 그 숨겨진 비밀을 언급했다고 밝혔다. 그는 50년전에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스탈린의 명령에 따라, 개략 2000명의 소련조종사가 중국에 들어갔다. 그리고 비밀리에 북한에 잠입해서, 미군비행기를 타격했다. 전쟁이 한창일 때는 매일 수십대의 소련전투기가 하늘로 날아가서 전투에 투입되었다.

 

현재, 세계군사사와 한국전쟁사에 소련공군의 참전은 이미 받아들여지고 있다. 다만 적지 않은 공백이 있다. 소련공군은 2년8개월의 한반도상공에서의 공중전에서 어떤 전과를 거두었는지에 대하여 아직 공인된 결론이 없다. 소련군조종사의 희생자수도 수수께끼이다.

 

1995년 3월 21일, 러시아 <<크라스타야 즈베즈다(공산단기관지>>에 <<제트기전투의 에이스조종사>>라는 글에서, 이런 데이타를 제공해준다: 진정한 제트비행기전투는 1950년대 한반도에서 전개되었다. 한측은 미국과 그 동맹국의 조종사이고, 또 다른 측은 소련, 중곡과 북한의 조종사였다. 첫번째 제트기 에이스조종사는 소련군의 상위 사바노프였다. 참전때로부터 1951년 5월 20일까지 그는 제트기를 몰고 6대의 적기를 격추시켰다. 그중 5대는 제트기였다. 1951년 6월 17일부터 1952년 2월 2일까지 Nikolai Vasiliyevich Sutyagin 대위는 전투비행 49회에 공중전 66회, 적기격추 22대였다. 이는 한국전쟁에서 최고기록이다."

 

위 글에서 제공된 전적을 합쳐보면, 171대나 된다. 소련공군은 휘황한 전적을 얻은 동시에 참혹한 댓가를 치른다. 로보프 중장이 나중에 토로한 바에 따르면, 쌍방의 비행기손실비율은 4:1이었다고 한다.

 

[* 수치는 중국/소련측의 것이므로...정확성에 의문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