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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문혁전)

골든 트라이앵글의 무국적부대

by 중은우시 2009. 11. 10.

글: 왕의명(王誼鳴)

 

"골든 트라이앵글"은 북으로 중국-버마국경선으로부터, 서쪽으로는 사르온강, 남쪽으로는 태국의 치앙마이, 치앙라이, 동쪽으로는 메콩강 라오스삼림까지인데, 거꾸로된 삼각형 형태이며 면적은 20만평방킬로미터에 달한다. 전세계 마약의 주요한 생산기지로 이름이 높다. 태국, 버마, 중국, 라오스의 접경지역에 위치하고 있는 이 곳은 마약 이외에도 잊혀진 일군의 중국인들이 살고 있다.

 

버마 경내에 자리잡은 국민당군의 잔여부대는 원래 국민당군 제8군과 제26군의 일부 병력들이다.

 

1949년 12월초, 장개석은 운남으로 도망간 육군총참모장 탕요(湯堯)를 육군부총사령관에 임명하고, 운남에 주둔하던 제8군과 제26군을 지휘하고록 하였다. 인민해방군이 운남으로 진입하기 전에 운남을 장악하고 있었다.

 

1950년 1월 25일, 국민당 제8군 주력이 섬멸당한다. 탕요를 비롯한 제8군, 제9군의 군장 및 6천여명이 포로로 잡힌다. 잔여부대는 버마국경을 넘어 도망친다. 주로는 두 부대였는데, 제8군 237사단 709단의 단장인 이국휘(李國輝)가 이끄는 700여명의 병사들 및 버마 차불 남쪽의 원 원정군 제6군 93사의 200여명이 한 무리이고; 제26군 93사 278단의 부단장 담충(譚忠)이 이끄는 600여명이었다.

 

4월, 이 두 잔여부대는 버마의 동북에서 '부흥부대'라는 기치를 내건다. 이국휘가 총지휘관 겸 709단 단장을 맡고, 담충이 부총지휘관 겸 278단 단장을 맡는다. 일시에 운남에서 도망쳐온 패잔병, 토비, 지주무장세력들이 속속 이들의 아래에 집결한다. 잔여부대는 금방 1500여명에서 3000여명으로 늘어난다. 이리하여 라오스,태국,버마국경지역에서 최대의 무장세력으로 등장한다.

 

다만, 버마정부는 그들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전투가 시작된다. 비록 잔여부대이기는 하지만, 그들은 버마정부를 이십년간이나 괴롭혔다. 버마정부는 이 잔여부대와 여러번 전투를 하면서 패배한다. 그후에 유엔에 호소한다: "그들은 미국식 선진무기를 보유하고 10년간 군벌혼전을 거치고, 8년의 항일전쟁을 거치며, 3년간 내전의 경험이 있는 부대이다"

 

이 잔여부대의 휘황한 전투전력은 단지 스스로 출로를 찾기 위한 것이었고, 생존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생존을 위하여 그들은 현지에서 아편을 생산하는 장삿꾼들을 호송해주기 시작한다. 3000명으로 버마정부의 12000명의 군대와 대치하게 된 것이다.

 

1950년 9월, 장개석은 전 제8군군장 이미(李彌)를 버마북부로 파견하여, 잔여부대를 끌어모으고, 각 무장세력을 재편한다. 이렇게 하여 "운남인민반공구국군"을 결성한다. 이때부터 이들은 중국의 운남성을 맹렬하게 공격하여 운남의 4개 현성을 함락시킨다. 그러나 나중에 해방군 3개 사단에 포위되어 결국은 패배하고 만다. 그리하여 다시 버마로 되돌아간다.

 

국민당 잔여군은 이때 타격을 입은 후에 다시는 대륙으로 진입하려 하지 않았다. 그저 버마에서 자리잡고 생존하는데 주력한다. 1년여의 휴식과 대만에서의 원조를 받아, 버마로 도망친 잔여부대는 급속히 1만여명으로 증가한다. 이리하여 부대는 전성기를 맞이한다.

 

국민당의 잔여부대는 버마북부에서 장기간 머물면서 다른 곳으로 가지 않았지만, 세력은 점차 강대해졌다. 버마정부에 있어서는 크나큰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이때의 버마군은 이미 인도와 합의를 체결하여, 인도가 병력을 출동시켜 버마를 도와 국민당 잔여부대를 토벌하고자 했다. 이 전투는 악전고투였다. 그러나 국민당 잔여부대가 최후의 승리를 거둔다. 참혹한 승리였다. 국민당은 만명도 되지 않는 병력으로 인도, 버마연합군을 물리친 것이다. 나중에 유엔의 결의로 국민당의 잔여부대는 대만으로 돌아간다. 이미는 노약자, 환자, 장애자를 철수하도록 요구하고, 주력부대는 남겨둔다. 국민당의 노약자, 환자, 장애자 3300명이 대만으로 철수한다. 그래도 약 2500명의 장병들이 남아서 대륙회복의 기지로 남겨두었다. 그러나 다시 대륙을 공격하지는 못했다. 그들은 대륙으로 돌아가고 싶어했지만, 중국정부가 동의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골든 트라이앵글에는 조국이 없는 부대가 남아있게 된다.

 

1950년대말, 중국정부는 버마정부와 합의를 이루어, 암중으로 운남-버마 국경지대로 출병하여, 잔여부대를 소탕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번 출병은 그다지 순조롭지 못했다. 국민당 잔여부대는 이미 운남-버마 변경지대에서 여러해동안 살아왔고. 지형이나 상황을 잘 알았다. 그리고 인민해방군은 국경을 넘어서서 전투를 하게 되었는데, 기후와 지리에 익숙하지 않았고, 보급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번 소탕작전은 그저 추격작전으로 변모하고, 해방군이 물러나면 잔여부대는 다시 돌아왔다.

 

1960년대, 버마, 라오스, 캄보디아등 국가에서 공산주의혁명운동이 발발한다. 버마공화정부군은 지속적인 전투를 시작한다. 이때, 93사의 국민당군장병은 버마정부의 거주승인을 받아내기 위하여 할 수없이 버마공산군과 다시 전투를 벌여야 했다. 나중에 93사의 잔여병력이 갈수록 줄어들었다. 운남, 태국, 버마변경지역에는 크고 작은 수십개의 무장세력이 존재하는데, 버마정부는 일찌기 국민당군 병력을 흡수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전투력을 강화시키고자 한 바 있다. 그러나 93사의 장병들은 조국을 버리려고 하지 않았고, 버마국적을 취득하려 하지 않았다.

 

나중에 계속되는 전란으로 보급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국민당 잔여부대는 '골든 트라이앵글'에서 집단적으로 아편을 재배하기 시작한다. 이리하여 세계 최대의 아편생산기지가 된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운남-버마변경지역에 있던 93사의 노병들은 이미 대부분 환갑이 된다. 그들은 자신의 조국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그러나, 여러가지 이유로, 중국정부는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할 수 없이 다시 버마에 거류할 것을 신청한다. 그러나 버마정부도 그들이 이전에 거절했다는 것을 들어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마침내 운남-버마변경지역에 40여년간 머물던 93사의 장병들은 조국이 없는 군대가 된다. 50여년이 지났지만, 그들은 이국타향에서 여전히 매년 구정을 보내고, 단오를 보내고, 중추절을 보낸다. 중국의 노래를 부르고, 중국말을 한다. 생존을 위하여 버마정부군과 전투를 할 수밖에 없었고, 인도버마연합군과도 전투를 벌였고, 흑방(黑幇)과도 전투를 벌였다.

 

60여년이 지났는데 현재 태국, 버마에 있는 93사의 잔여부대는 이미 제3대가 되었다. 그들은 대부분 태국북부에 있는 13개의 '자립촌' 혹은 '난민수용소'에 살고 있다. 상당한 사람들은 태국국적을 취득했다. 지금도 골든 트라이앵글에 남아있는 93사 잔여부대의 후손들은 개략 6만여명에 이른다.

 

가장 처참한 것은 1950년대에 버마에 들어간 국민당병사들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이미 환갑을 넘겼다. 기댈 데가 없기 때문에 그들은 죽어도 대만으로 가려하지 않는다. 소수의 사람들이 아편, 비취 판매로 재산을 모은 외에 대부분은 가난하기 그지없다. 옛날에 부상당한 병사들은 나이가 들었지만 의탁할 곳이 없다. 매월 그저 150 바트(21위안 4각에 상당함)의 생활비를 보조받고 있다. 사람들은 그들의 마을에서 구걸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그들은 아직도 완고하게 반공, 반사회주의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들의 숙소에는 아직도 청천백일기가 나부낀다. 벽에는 퇴색된 장개석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들은 공산당이 그들을 외국으로 쫓아낸 것을 욕하고, 국민당이 의리를 지키지 않고 그들을 내버려둔 것을 욕한다. 그들의 고국고향관념은 아주 뿌리깊다. 중화민족문화를 숭상하고 보존하고 있다. 그리고 깊은 민족감정을 지니고 있다.

 

주목할 것은 제3대의 사람들이다. 이들은 5,60년대에 버마, 태국에서 태어났다. 태국북부의 도시에서는 피부색이 비교적 흰 남녀를 자주 볼 수 있는데, 그들은 태국어도 할 줄 알면서, 중국어도 할 줄 안다. 그들중 상당한 사람은 중국-버마, 중국-태국 혼혈아이다. 소수의 고급장교 자녀들이 대학에 다니고 심지어 미국유학까지 한 것을 제외하고는 그들 대부분이 사회하류에 속한다. 그들중 일부는 중국어신문사에서 인쇄공, 교정공을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점원으로 일하기도 한다. 제3대인들의 정치색채는 이미 명확하지 않다. 그들은 어떻게 돈을 벌 것인가, 어떻게 하면 더 잘 살 수 있을 것인가에 더욱 관심이 있다.

 

최근들어, 태국정부는 93사 후손들에 대한 '태국화'정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아마도, 제4대, 제5대에 이르면 완전히 '태국화'하지 않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