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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문혁전)

구원(九院): 중국에서 가장 신비한 양탄(兩彈) 연구기지

by 중은우시 2009. 10. 15.

글: 조아휘(趙亞輝)

 

구원(九院)이라는 이름을 들어보았는가?

바로 중국에서 가장 신비한 양탄(원자폭탄, 수소폭탄)연구기지이며, 현재의 이름은 중국공정물리연구원(中國工程物理硏究院)이고 장소는 사천성 면양(綿陽)에 있다.

 

1958년 1월 8일, 핵무기연구설계의 조직지휘업무를 강화하기 위하여, 제3기계부 9국이 성립되었다(1958년 2월 二機部 9局으로 개칭됨). 5개월이후, 중앙정부의 비준을 받아, '221공장'으로 명명된 핵무기연구기지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공장부지는 청해성 해안현 금은탄(金銀灘)이었다.

 

7월 13일, 범상치 않은 과학연구기관인 북경제9연구소가 정식성립되었다. 중국에서 의미가 남다른 핵무기개발을 위한 전투가 조용히 시작하였다. 왕감창(王淦昌), 등가선(鄧稼先), 주광아(朱光亞), 진능관(陳能寬), 곽영회(郭永懷)등 국내외에 저명한 과학자들이 고난에 가득차고 도전적인 비밀역정을 시작했다.

 

1962년말, 과학자들은 장성 아래의 구포장(舊砲場)에서 자연조건과 생활조건이 아주 열악한 청해로 옮겨간다; 1964년 2월, 이기부 당조직은 구국(九局), 구소(九所)의 기구를 취소하고, 제9연구원(第九硏究院)을 만든다. 이때부터 '구원'이라는 이름이 전해지기 시작한다.

 

1964년 10월 16일 오후 3시, 중국서부지역 신강  로브노르(Lob-nor, 羅布泊)의 상공에 중국의 첫번째 원자폭탄폭발이 만들어낸 거대한 화구와 버섯구름이 고비사막에 피어올랐다. 첫번째 원자탄실험이 성공한 것이다. 바로 이를 전후하여 중앙은 새로운 정책을 내놓는다. 명칭번호를 "902공정"이라고 붙인 핵무기연구제조기지를 사천성 면양과 광원(廣元)의 두 시의 산구(山區)에 두기로 한다.

 

1967년 6월 17일, 중국은 다시 한번 세계를 놀라게 한다. 성공적으로 첫번째 수소폭탄실험에 성공한다. 이번 실험은 중국이 첫번째 원자폭탄실험에 성공한 후, 핵무기발전측면에서 또 한번의 비약이었고, 중국핵무기발전이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1969년, 구원은 서북을 떠나서 조건이 열악한 "902"지역에서 업무를 전개한다. 1983년 9월, 국무원, 중앙군위가 사천면양시 근교에 새로운 과학연구기지를 건설하기로 결정하고, "839공정"이라고 이름지으며, 장애평(張愛萍) 상장이 친히 구원의 부지를 현재의 부지로 확정할 때까지 그곳에 있었다. 1985년, 신시대의 신형식에 적응하기 위하여, 그리고 대외교류를 확대하기 위하여, "구원"은 대외적으로 "중국공정물리연구원"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사용하게 된다.

 

1990년, 중국공정물리연구원은 관리체제를 조정하여, 국가계획에서 독립항목으로 구분된다. 동시에 점진적으로 신기지 과학성(839지구)로 이전한다. 장기간 산골짜기에 머물던 과학연구원들은 이때부터 산을 빠져나와 면양시로 들어가게 된다.

 

현재의 중국공정물리연구원은 양원 원사(院士) 23명, 전문기술인원 8000여명, 그중 고급전문기술인원 2000여명을 보유하고 있다. 과학연구기지의 주체는 부강(涪江)의 가에 위치하고, 점유면적은 4천여무이며, 건축면적은 150여만평방미터이다. 시설이 완비되고, 문명적이고 아름다운 현대화 과학도시이다. 도시에는 양호한 생활시설이 있는데, 법원, 검찰원, 공안국을 포함한 각종 기구도 설치되어 있다.

 

연구원의 산하에는 12개의 연구소가 있고, 100여개의 과학연구실과 30여개의 생산공장 그리고 3만여대의 각종 선진설비기기가 있다. 주로 충격파와 폭파물리, 핵물리, 플라즈마 및 레이저광기술, 공정과 재료과학, 전자학과 광전자학, 화학과 화공, 계산기와 계산수학등 학과영역의 연구와 응용에 종사하고 있다. 전공분야가 모두 갖추어져 있고, 선진적인 설비와 기술능력이 겸비된 과학연구생산기지이다.

 

중국공정물리연구원에 있는 과기관(科技館)에는 중국 최초의 원자폭탄의 제조에서 폭발에 이르기까지의 전과정을 사실대로 보여주고 있다. 폭발성이 울리자, 핵폭탄을 놓아두었던 철탑은 순식간에 기화하고, 주위에 검사를 위하여 놓아둔 비행기와 탱크도 분신쇄골하였으며, 집은 기와조각도 남지 않을 정도였다. 위력의 크기는 사람들이 믿기 힘들 정도였다. 작은 집안에 진짜 핵폭탄을 볼 수도 있다. 당시 핵실험을 할 때, 핵폭탄은 모두 같은 모양의 예비탄이 있었는데, 여기에 전시된 것들이 바로 예비탄이었다. 당연히 핵원료는 장전하지 않은 것이다. 그중 "팡팡"이라고 불리우는 한 핵폭탄은 300만톤짜리이고, 당시 미군이 히로시마에 투하한 원자탄의 150배의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일부 낡은 용품들이 주의를 끈다. 이것들은 바로 중국에서 첫번째 원자탄을 만들 때 사용한 '선진'적인 도구들이다. 폭약을 만드는데 썼던 알루미늄가마, 정확하게 계산하기 위해서 사용한 주산과 자, 이것들이 바로 그 정밀하고 복잡한 핵무기를 중국의 선배과학자들은 이러한 원시적인 도구를 가지고 만들어냈던 것이다.

 

4명의 조상(雕像)이 놓여 있는데, 그들은 바로 양탄원훈(兩彈元勳)인 오제림(吳際霖), 왕감창, 등가선, 곽영회이다. 일찌기 1940년대에 해외에서 이름을 날리던 물리학자 왕감창은 원자폭탄제조의 임무를 받은 후, 나라에 몸을 바치겠다는 결심으로 이름을 왕경(王京)으로 바꾸고 17년간을 신분을 숨기고 조용히 자신의 일생을 나라에 바쳤다; "와와박사"라고 불리우는 이론물리학자 등가선은 1950년에 귀국한 후 처음 한 일이 바로 천안문광장에서 신중국의 오성홍기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1958년 그는 원자폭탄연구행렬에 가담한 최초의 인원이 된다.

 

가장 감동적인 인물은 저명한 역학(力學)전문가인 곽영회이다. 조국으로 돌아오기 위하여, 그는 미국에서 공부할 때, 기밀업무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귀국전에는 그의 미완성 원고를 불로 태워버렸다. 이 역학전문가는 왕감창, 팽환무(彭桓武)와 함께 중국핵무기연구에서 최초의 3대지주가 된다. 1968년, 기밀핵실험자료를 가지고 북경으로 가는 도중에 곽영회가 탔던 비행기가 사고를 당한다. 사람들이 발견했을 때는, 그와 경비원은 함께 끌어안고 있었는데, 그들의 가운데, 기밀핵실험 원본자료가 남아 있었다. 그들의 시신은 누가 누구인지도 알아보기 힘들게 되어 있지만, 데이터자료는 완전하게 남겨주었다. 얼마후 이 데이타 자료를 기초로 하여 중국은 다시한번 핵실험을 성공적으로 마무리지을 수 있었다.

 

그때 왕감창은 아주 후회한다. 그와 곽영회는 나누어 북경으로 갔는데, 그는 기차를 탔고, 곽영회는 비행기를 탔다. 그때 헤어진 것이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은 몰랐다. 곽영회가 죽었을 때, 나이가 59세였다. 30년후인 1998년 왕감창도 사망한다.

 

과기성의 도로에는 조각이 하나 있는데, 바로 '구원'의 표지이다. 이름은 '춘뢰(春雷)'인데, 핵폭발시의 순간을 상징하는 것이다. 거의 모든 중국인들은 핵실험성공의 순간을 기억한다. 그러나, 그 배후에 숨은 고생, 집착, 고통, 내지는 희생은 많은 사람이 알지는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