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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선진)

구정(九鼎)은 아마도 허구일 것이다

by 중은우시 2009. 2. 4.

 

 

 

글: 정계진(丁啓陣)

 

현재는 "정(鼎)"이라는 말을 하면, 사람들은 금방 "구정(九鼎)" 혹은 "문정(問鼎)"과도 같은 단어를 생각해낼 것이다. 그리고 자고이래로 '정'은 전국보기(傳國寶器)로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물건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이런 견해에 대하여 계속 의심을 품어왔다. 왜냐하면, "정(鼎)"이라는 것은 원래 음식을 끓여먹는 물건으로 오늘날의 솥에 해당하는 것다. 한 나라가 어찌 이처럼 일상적으로 쓰이고,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기물을 전국의 보물로 삼고, 황권의 상징으로 삼았겠는가? 필자가 생각하기로는 "종(琮)", "용(龍)", "봉(鳳)", "기린(麒麟)"과 같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아니하거나, 실재로 일상생활에 사용되지 않는 물건이야말로 국보가 되고, 황권을 상징할 자격이 있다.

 

최근에 발견했는데, 사실 송나라때 사람인 홍매(洪邁)가 일찌감치 이런 의문을 품었었다. 홍매는 그의 명저 <<용재삼필>>의 "십팔정(十八鼎)"에서 이렇게 말했다: 하나라의 우임금이 구정을 주조했다는 내용은 그저 <<좌전. 선공3년>>의 기록이 있을 뿐이고, 나중에 사마천의 <<사기>>에 보정(寶鼎)을 사수(泗水)에 빠트렸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역사문헌에서, 진나라가 주나라에 구정에 대하여 물었다는 기록이 없다: 주난왕(周王)때 주나라가 망하면서 주나라가 가진 모든 보물은 진나라에 귀속되었다. 그런데, 거기에 구정은 보이지 않는다. 홍매는 구정이 그렇게 존귀한 것이라면, 진나라에 와서는 왜 그렇게 소리소문없이 사라져버렸는지에 의문을 품었다.  "사수"는 동주왕조의 국경범위를 벗어나 있는데, 누가 구정을 거기까지 옮겨갔단 말인가? 설마 한 사람도 그 소식을 진나라에 알려주지 않았단 말인가? <<주례>>, <<예기>>, <<의례>>등의 3가지 경전을 보면 각종 예기(禮器)에 대하여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한번도 구정을 언급하지는 않고 있다. 홍매의 결론은 "이로서 추측해보면, 그러한 물건이 있었다고 할 수가 없다." 그는 상고시대에 근본적으로 사람들이 전국보물로 인식하는 구정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보았다.

 

당연히 어떤 사람은 이렇게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은허(殷墟)에서 일부 상(商)나라때의 정(鼎,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라면 司母戊 방정이 될 것이다)이 있지 않은가라고.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는 "정"이 상나라때의 전국보물이라고 얘기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일상적으로 음식을 만드는 기물이 무덤 속에 배장품으로 들어가는 일은 상고시대에 얼마든지 그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즉, 고대묘에서는 통상적으로 나타나는 형상이다. 고고학계에서 "정"을 포함한 음식을 끓여먹는 기물을 모두 "예기"로 취급하고 있는데, 그것이 반드시 정확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먼저, "구정"에 대하여 기재된 내용을 한번 살펴보자. <<좌전. 선공3년>>에는 대체로 아래와 같은 내용이 있다:

 

"초장왕이 친히 군대를 이끌고 낙수유역의 '육혼'이라는 오랑캐를 토벌하러갔다. 초나라병사들이 낙수에 이르자 병력을 펼쳐놓고 주나라의 강역을 바라보았다. 이때 주정왕은 왕손인 만(滿)을 보내어 초장왕의 노고를 치하하게 했다. 초장왕은 정의 대소경중을 물어보았다. 만은 이에 대합하여 말하기를: 중요한 것은 덕이지, 정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옛날에 하나라는 덕이 있어서 먼 곳에서 물건을 바쳤다. 우왕은 바친 구리를 가지고 정을 아홉개 만들게 하였다. 천자의 덕이 있다면 작은 정이라도 무겁게 버티고 이쓴 것이고, 천자의 덕이 흐려지면 큰 정이라도 가볍게 옮길 수 있으니, 정은 항상 덕이 있는 곳으로 옮겨졌다. 하나라의 걸왕은 덕이 없었기에 구정은 하왕조를 떠나 은왕조로 옮겨갔고, 그후 6백년이 지나 은왕조도 망하게 된다. 은왕조 역시 주왕이 부덕하여 다시 구정은 주왕조로 옮겨왔다. 이처럼 천자의 덕이 아름답고 빛날 때에는 정이 작더라도 반드시 무거우며, 천자의 덕이 간사하고 혼란스러울 때는 정이 아무리 크더라도 반드시 가벼운 법이다. 주왕조의 덕이 아무리 쇠퇴하였더라고, 아직 천명이 끝나지 않았다. 따라서 초장왕께서는 아무리 덕이 있다고 하더라도 정의 경중을 물어서는 안된다."

 

이것이 유명한 "문정", "구정"의 출처이다. 그리고 "정"이 전국보물이라는 주요한 문헌적 증거이다. 이 글을 보면, "정"의 존귀한 신분이라는 것이 그저 상고의 전설이고, 그러한 전설도 주나라의 대신인 '만'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초장왕이 정의 경중대소를 묻는 것은 아마도 그냥 언어도발일 것이다. 즉, 주왕조에 대한 멸시를 담은 것이다. 여기에 왕손 만의 대답은 약간은 허장성세의 성분이 들어있다. 그리고 즉석에서 임기응변적으로 꾸며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많다. 즉, 초장왕은 주나라조정의 '정'의 대소경중이 어떠냐고 물었는데, 그 의미는 단지 초나라사람들은 인구수량이 훨씬 못미치는 주왕조를 무시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초장왕의 물음을 요즘 말로 번역하자면, "너희 주나라의 밥그릇은 얼마나 크고 얼마나 무게가 나가는가?" 결국 주나라의 인구수량은 초나라에 훨씬 못미친다는 것을 담고 있다. 주나라의 인구가 초나라에 못미친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초장왕의 이런 도발적인 물음에 대하여 왕손 만은 정면으로 대답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허황된 소리를 한바탕 지껄이는 것이다. 만일 필자의 이런 해석이 정확하다면, 아마도 구정이라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은 허구의 것일 것이다.

 

나중에 제왕의 기업을 "정조(鼎祚)"(송서.사령운전, 진서.여남왕량등전, 송서.무제기중등의 사서), "정업(鼎業)"(양서.무제기상등 사서)으로 부르고, 삼공,재상등 고귀한 지위를 "정귀(鼎貴)", "정위(鼎位)", "정석(鼎席)", "정갑(鼎甲)", "정보(鼎輔)"등으로 불리웠는데, 이것들은 모두 왕손 만이 임시로 만들어낸 말에서 와전되어 이루어진 결과라고 할 것이다. 그중 삼공과 최고급별의 과거시험에서의 3위이내를 의미하는 "정위" "정석" "정갑"등은 세발달린 솥인 "정"의 특징에서 나온 것으로 '셋'을 의미하는 것이지 왕손 만의 대답과는 실제로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구정이 상고의 전국보물이 아니라는 또 하나의 유력한 증거는 "정"이라는 단어는 '음식을 끓이는 기물"이라는 의미로 시종일관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주례.추관장객>>, <<묵자.칠환>>, <<장자.서무귀>>, <<사기.화식전>>, <<국어.주중>>, <<한비자. 난언>>, <<전국책.초책사>>, <<진서.조적전>>등에서 모두 그런 의미로 쓰였다.

 

중국의 문화전통을 보면, 어떤 물건이 전국보물로 확정되면, 그것은 더 이상 민간에서 일상생활의 도구로 존재하지 못한다. 이 점에 대하여는 박물관, 고궁 혹은 제왕종묘를 가서 아무렇게나 둘러보아도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중국문화에는 하나의 전통이 있는데, 제왕의 물건과 민간의 물건은 확실히 구분되고, 절대 섞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홍매는 진정으로 "구정"이 나타난 것은 무측천때부터라고 한다. 무측천은 일찌기 "구정"을 주조하여, 통천궁에 둔 바가 있다. 그러나, 언제 이 "구정"이 훼손되었는지는 모른다.

 

송나라 휘종 숭녕3년(1104)에 방사 위한진의 건의를 받아 "구정"을 주조한다. 다음해 3월에 완성하여 "구정"을 안치하는 궁전을 별도로 만드는데, 이 궁전의 이름은 서예를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있는 바로 그 "구성궁(九成宮)"이다. "구정"의 명칭은 각각, 중앙에 있는 정은 "제내(帝)", 북방의 정은 "보정(寶鼎)", 동북의 정은 "모정(牡鼎)", 동방의 정은 "창정(蒼鼎)", 동남의 정은 "망정(罔鼎)", 남방의 정은 "동정(鼎)", 서남의 정은 "부정(阜鼎)", 서방의 정은 "정정(晶鼎)", 서북의 정은 "괴정(魁鼎)"이라고 한다. 정화6년(1111)에 또 다른 방사의 건의를 받아, 구정의 이름을 고친다. 그중 "제내"는 "융정(隆鼎)"으로 바뀐다. 정화7년에 다시 신소구정(神九鼎)을 만든다. 각각의 이름은: 태극비운동겁지정, 창오사천저순지정, 산악오신지정, 정명동연지정, 천지음양지정, 혼돈지정, 부광동천지정, 영광황요연신지정, 창귀대사충어금륜지정이다. 이로써 송나라에는 18개의 정이 있게 되는 것이다.

 

"구정"이 전국보물이라는 주장은 유래가 길고, 널리 퍼져있다. 한편의 글로써, 수천년간의 주장을 뒤엎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일순간에 드는 느낌을 가다듬지 않고 그냥 써버렸다. 그 이유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바로 토론을 이끌어내는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고고, 문물등 분야의 전문가 학자들이 이에 대하여 깊이있고 진지하게 연구를 해서, 대중들에게 최신의 학술결과를 알려준다면 그것은 더더욱 바라마지 않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