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노위병(路衛兵)
선비족(鮮卑族)이 중원에 들어온 것은 흉노족(匈奴族)과 갈족(羯族)의 뒤를 이은 것이다. 그러나 선비족은 부락이 아주 많고, 분포도 아주 넓었기 때문에, 시작은 비록 늦었지만, 중원에서 할거해서 차지한 기간은 가장 길었다. 가장 먼저 굴기한 모용씨는 한때 북방에서 가장 강성했다. 선비족은 차례로 전연(前燕), 후연(後燕). 서연(西燕), 북연(北燕), 남연(南燕)의 여러 국가를 건립했다. 오호난화가 약 130년간 이어졌는데, 모용씨가 건국했던 기간을 합치면 100년여가 된다. 이렇게 "오호(五胡)"중에서 건립한 정권의 존속기간이 가장 긴 부족이다.
선비족은 동호(東胡)의 후예이다. <<진서(晋書)>>에서는 그들이 "읍어자몽지야(邑於紫蒙之野, 자몽의 들에 모여 산다)"라고 하였는데, 바로 오늘날 내몽고의 동쪽 영성현(寧城縣) 일대에 해당한다. 진한(秦漢) 시대에 흉노에게 패배하여 무리들이 선비산으로 쫓겨나서 살았다. 그래서 스스로 '선비'라고 이름한 것이다. 그런데, 선비산이 지금의 어디인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그저, 대흥안령의 어느 곳일 것으로 추측한다. 모용씨는 선비족중에서 가장 먼저 중원에 진출한 한 갈래이다. 모용씨의 근거지는 요동이다. <<삼국지>>에는 "선비족은 모돈(冒頓)에게 패배한 후, 멀리 요동의 새외로 도망갔다."고 하였는데, 거기에 모용씨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곳의 토지는 비옥하여 농사를 짓기에 적합했다. 그리하여 부족의 발전이 비교적 빨라진다. 나중에 부족중 걸출한 인물이 나타나는데, 이름이 모용외(慕容廆)였다. 그는 스스로 선비대선우(鮮卑大單于)가 되어 한 지방에 할거한다. 그의 아들인 모용황(募容皝)의 대에 이르러, 연(燕)나라를 건국하고, 황제가 된다. 이어 고구려를 무찌르고, 선비족의 우문부(宇文部), 단씨(段氏)와 부여국(扶餘國)을 멸망시키고, 북방에서 웅기한다.
모용씨가 중원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염위(冉魏)의 황제 염민(冉閔)의 "살호령(殺胡令)"의 덕을 많이 입었다. 북방한족들은 염민의 호소하에 "오랑캐를 대거 주살한다" 중원의 흉노족과 갈족은 기본적으로 모조리 죽임을 당했다. 이때 모용황의 아들인 모용준(慕容㒞)이 중원이 빈 틈을 타서 중원으로 들어와 하북, 산서 일대를 장악한다. 그리고 352년 염민을 주살하고, 염위를 멸망시킨다. 전연은 이때부터 중원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흉노와 갈족이 이미 모조리 죽어버렸으므로, 갈족의 지배를 받던 저(氐), 강(羌)도 기회를 틈타서 굴기하고 각자 정권을 수립한다. 특히 동진의 병권을 장악하고 있던 저족은 이 기회에 전진(前秦)정권을 건립하는데, 세력확장이 무척 빨랐다. 그리하여 전연의 주요한 적수로 등장한다. 중원은 이제 전연과 전진의 대치상태에 접어들게 된다.
그러나 전연은 내부에서 분화가 일어나게 된다. 모용준이 죽은 후, 나이 겨우 12살된 아들 모용위(慕容暐)가 즉위하고, 모용각(慕容珏)이 보정(輔政)이 된다. 모용각은 병력을 이끌고 동진의 하남, 회북의 땅을 침입하여 점령하니, 국력이 전성기에 이른다. 모용각이 죽은 후, 모용평(慕容評)과 모용수(慕容垂)가 공동보정이 되는데, 두 사람은 서로 다투게 되어 전연의 정국이 불안해진다. 특히 동진의 환온(桓溫)이 북벌을 감행하자, 모용수는 방두(지금의 하남성 준현 동남쪽)에서 진군을 대파한다. 명성이 크게 오르게 되자 그는 모용평의 질시와 배척을 당하게 된다. 그리하여 모용수는 전진으로 도망간다. 전연은 이로 인하여 국력이 크게 쇠약해진다. 전진은 부견(苻堅)이 정사를 돌보게 되면서 한족을 등용하고 정치개혁을 진행하며 군대를 강화하여 국력이 크게 신장된다. 전진은 결국 전연을 멸망시키고 북방의 패자가 된다.
모용씨의 제2차굴기는 비수지전(淝水之戰)이후이다. 전진이 동진에게 패배하여 결국 멸망하고, 전진의 지배를 받던 부족들은 일시에 모두 속속 독립하여 나라를 세운다. 그리하여 북방은 다시금 사분오열의 국면으로 진입한다. 전진의 군대내에서 있던 모용수는 기회를 틈타 거병을 하고, 중산(中山, 하북성 정주)을 수도로 정하고 후연을 건립한다. 모용영(慕容永)도 장자(長子, 지금의 산서성 장치의 남쪽)에 도읍을 정하고 서연을 세운다. 나중에 모용수는 서연을 멸망시키고, 다시 적위(翟魏)등 군소정권을 멸망시켜서 기본적으로 전연의 판도를 회복한다. 그리하여 다시금 중원의 강국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런데, 이때 강족(羌族)이 건립한 후진(後秦)이 다시 중원의 서부지방에서 굴기한다. 후진은 겨우겨우 연명하던 전진을 멸망시킨 후, 다시 후량(後凉), 서진(西秦)을 공격하여 멸망시킨다. 결국 후연과 나란히 병립하는 북방의 강국이 된다. 단순히 후진과 대치하고 있었더라면, 후연에게는 북방을 통일시킬 기회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선비족의 또 다른 부족인 탁발씨(拓跋氏)도 북방에서 흥기하고 북위(北魏) 정권을 건립한다. 탁발씨는 멀리 막북에 살고 있었는데, 남으로 내려온 후에도 거친 기상이 남아 있었다. 그리하여 후연의 북방최대의 적수가 된다. 후연은 북위와 매년 전쟁을 벌이지만 불리하게 되고, 참합피(지금의 산서 양고의 경내)에서 참패하게 된다. 그리하여 하북의 군현을 모조리 잃는다. 후연은 북연과 남연으로 분단되고, 남연은 나중에 유송(劉宋)에 멸망당한다. 북연은 결국 북위에 멸망한다. 이렇게 하여 모용씨는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게 된다.
모용씨가 두번이나 북방을 통일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는데, 필자가 보기에, 여기에는 외부적인 요인과 내부적인 요인이 모두 존재한다. 종합해보면 4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좋은 시기를 만나지 못했다. 모용씨가 두번 굴기했을 때마다, 다른 민족들도 굴기하여 그들에 대적했다. 이렇게 강적들이 즐비하다보니 좋은 기회를 만들 수가 없었다.
둘째, 모용씨는 후계자들이 제대로 이어가지 못했다. 두번에 걸친 중원굴기는 모두 부족내에서 걸출한 인물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전연은 모용준, 모용각, 후연은 모용수가 있는데, 모두 전투에 능하고 지모가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후손들은 모두 무능했다. 수성의 재주가 없었다. 모용위는 친정을 시작하자마자 바로 후궁을 4천여나 두고, 엄청난 돈을 써댔다. 이렇게 호화사치를 즐기니 어찌 나라가 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셋째, 화근은 내부에 있었다. 전연 후기에 모용수가 배척받으면서 분열되고 망국에 이르렀다. 그런데, 모용수가 죽은 후에 네번의 후임자는 모조리 찬탈과 살육 속에서 죽어갔고, 누구 하나 평온한 임종을 맞이하지 못했다. 내분이 끊이지 않은 것이다. 조정이 이렇다보니 국세가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넷째, 병력이 점차 약화되었다. 모용씨가 중원에 들어온 후 시간이 흐름에 따라, 한화(漢化)의 영향을 깊이 받게 된다. 그러다보니 부족의 거친 기풍이 사라지게 된다. 여기에 매년 전쟁을 벌이다보니, 병력이 점차 감소되었다. 이러다보니 나중에 북방의 거친 탁발씨와의 전쟁에서 연전연패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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