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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남북조)

북위 궁중의 피바람: 아들이 태자가 되면 생모는 죽인다

by 중은우시 2009. 9. 22.

글: 유병광(劉秉光)

 

태자를 세우기 전에, 먼저 그 생모를 죽인다.

 

이런 잔인한 황위계승방식을 사학계에서는 "입자살모(立子殺母)" 혹은 "자귀모사(子貴母死)"라고 부른다. 이를 시작한 사람은 한무제이다. 제도로 형성한 것은 탁발씨(拓跋氏)이다. 한무제의 "입자살모"는 서한시대에 단 1건 분이다; 그러나 탁발씨의 '자귀모사'는 북위에서 계속 시행되었다.

 

<<위서. 황후전>>을 뒤적여보면, "자귀모사"에 관한 기록에 놀라게 된다: "도무선목황후 유씨, 황후는 명원을 낳았다....황후는 '구법(舊法)'에 따라 죽었다" "명원밀황후 두씨....태무를 낳았고...태상5년에 죽었다." "태무경애황후 하씨....경목을 낳고, 신하원년에 죽었다." "경목공황후 욱구려씨....문성황제를 낳고 죽었다." "문성원황후 이씨, 헌문을 낳고....고사(故事)에 따라 죽었다." "헌문사황후 이씨...효문제를 낳고, 황흥3년에 죽었다." "효문정황후 임씨, 황자 순(恂)을 낳고...구제(舊制)에 따라 죽었다." "효문문소황후 고씨, 황후는 선무를 낳고...갑자기 죽었다"

 

이 사망자 리스트를 보면 한가지 기괴한 현상이 발견된다. 문성원황후 이씨는 '고사'에 따라 죽었다고 할 수 있고, 효문정황후 임씨도 '구제'에 따라 죽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앞머리에 이름이 오른 유씨는 왜 '구법'에 따라 죽었다고 나오는 것일까? 이 의문을 가지고, 자세히 <<위서. 서기>>를 뒤져 보았다. 그랬더니 이전에 이런 법이 있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가 없었고, 또한 이런 유형으로 죽임을 당한 사례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는 결국 북위의 '자귀모사'제도를 만든 사람은 개국황제인 탁발규(拓跋珪)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탁발사(拓跋嗣)의 모친인 유씨는 바로 그 첫번째 희생자이다. 그렇다면, 북위의 '자귀모사'제도는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탁발규는 왜 이런 잔인한 제도를 만든 것일까?

 

보편적으로 알려진 바로는 탁발규가 한무제에게 배웠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모두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군주가 어리고 그 모친이 한창나이이다(主少母壯)"와 "여자가 마음대로 주재하면 나라가 어지러워진다"는 것이 한무제의 '입자살모'의 이유이다. 그중에서 전자는 후자의 기초이고, 후자는 그 증상이다. 당시, 유불릉은 아직 7살이었고, 생모인 구익부인은 26살이었다. 한창때였다. 한무제는 이미 69세로, 살 날이 얼마남지 않았다. 한무제는 스스로 생명이 얼마남지 않았음을 잘 알고 있었다. 구익부인을 사사한 것은 바로 그녀가 제2의 여후(呂后)가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와 비교하자면, 북위에서 유씨가 죽을 때, 탁발규는 39살이어서 한창 장년이었다. 탁발사는 16세로 혈기방장한 나이였다. 북방유목민족의 남자들이 조숙했다. 탁발규는 16살에 이미 나라를 세웠다. 게다가 탁발규의 죽음은 순전히 예상못한 사건이었다. 만일 비정상적인 사망이 아니라면, 그는 10년이상 살아있을 수 있었고, 탁발사는 충분히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를 보면, '자귀모사'는 절대로 '입자살모'를 그대로 모방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북위의 '자귀모사'제도가 나타난데는 또 다른 숨은 배경이 있는 것이다.

 

북위가 건국되기 전에 탁발선비는 아직 씨족공동체해체기에 처해 있었다. <<위서. 서기>>를 보면, 부인을 '천녀'라고 하고, "힐분황제는 처가가 없고, 역미황제는 외가가 없다"는 내용이 있다. 이는 부계씨족사회에서 부녀의 지위가 상당히 높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소성...논의하였으나 결론이 나지 않았다. 황후가 이를 듣고....논의가 끝난다" "평문이 죽었다. 황후가 국사를 관장했다. 당시 사람들은 여국(女國)이라고 불렀다. 황후는 성격이 강맹하고 투기심이 있어, 평문의 죽음은 황후가 저지른 것이다." 이를 보면 당시에 부녀들이 조정에 간여했음을 알 수 있고, 정권을 농단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다가 동호의 일족으로 선비족의 혈맥에는 '선모이후부(先母而後父, 모친이 먼저이고 부친이 나중이다)", "화가나면 부친과 형은 죽이지만, 모친은 끝까지 해하지 않는다"는 유전인자가 흐르고 있다. 북위가 전제국가가 되고, 부자가 천하를 다스리려면, 반드시 낡은 습속은 버려야 했다. 그중에서도 강력한 '모권제'에 대하여 피비린내나는 개혁이 필요했다. 탁발규가 유씨를 사사함으로써 탁발사가 이후 모친의 간여을 받지 않으면서 독재황제가 될 수 있도록 해주려는 것이, '자귀모사'제도를 만든 근본원인일 것이다.

 

역사적인 문제 이외에 현실상황도 탁발규의 우려를 불러일으켰다. 탁발부가 나라를 다시 세울 수 있었고, 북위가 약소국에서 강대국으로 변모할 수 있었던데는 모족(母族)인 하란부(賀蘭部)의 적극적인 도움과 처족(妻族)인 독고부(獨孤部)의 절대적인 지원도 한 몫을 했다. 그러나, 적대정권을 하나하나 정복하고, 북위의 국세가 날로 강성해지나, 중원의 역사에 조예가 깊던 탁발규로서는 외척세력의 위협을 민감하게 느꼈다. 탁발규는 정치가이다. 개국황제이다. 그리고 망국의 고통도 겪었다. 잃었다가 다시 찾은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그는 미연에 모든 것을 방지할 필요가 있었다. 탁발사가 일단 황위를 승계하면, 생모인 유씨, 즉 독고부 출신인 황태후는 아마도 독고부의 외척세력이 북위황권에 간여하게 하는 교량역할을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왕망의 황위찬탈과 같은 역사적비극이 북위에서 다시 나타나지 말라는 법이 없다. 탁발규는 유씨를 사사함으로써 외척세력이 황권에 간여하는 것을 막으려고 했고, 외척세력을 멀리함으로써 황권이 약화되는 것을 막으려고 했던 것이다. 이것이 '자귀모사'제도가 나타난 주요한 원인이다.

 

당연히 북위에서 여인의 지위가 없었다면, 외척으로부터의 위협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황제들 중에서, 탁발규와 같은 우려를 가진 황제는 많지 않을 것이다. 제도가 순조롭게 시행되도록 하기 위하여, 탁발규는 무형적이면서도 강한 압력을 가할 필요가 있었다. 이렇게 하여 반대의 목소리를 막아야 했다. 그리하여, 그는 탁발부에는 "후궁이 아들을 낳고 그가 후계자가 되면, 그 모친을 죽인다"는 조상대대로의 법제가 있었다고 거짓말을 한다. 이렇게 하여 유씨를 '구법'에 따라 죽이는 것이다. <<위서. 태종기>>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탁발규가 아들에게 이렇게 교훈을 내렸다: 옛날에 한무제가 아들을 태자로 세우면서 그 모친을 죽였다. 이는 여인이 국정에 간여하지 못하게 함이고, 외척이 나라를 어지럽히지 못하게 함이다. 너는 장래 대통을 이을 것이므로, 내가 한무제를 본떠서 장기적인 계책으로 그렇게 한 것이다" '자귀모사'는 '입자살모'와 성격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탁발규는 왜 한무제를 들먹이면서 설명했을까? 아마도 북위는 한화(漢化)에 열중했었고, 탁발규가 '한무제를 본떠서' 그렇게 했다고 말한 것은, 바로 '자귀모사'라는 것이 예법에 맞는다는 겉옷을 입혀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탁발규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 제도때문제 자신이 목숨을 잃을 줄은. 유씨가 죽은 후에, 탁발사는 '울면서 스스로를 가누지 못했다' 탁발규는 그를 설득하려 했으나, 그는 오히려 '슬퍼하기를 그치지 않고, 밤낮으로 통곡했다" 이렇게 연약함을 보이자, 탁발규는 아주 실망하고 화가나서 한때 탁발사를 죽일 생각까지 한다. 탁발사는 놀라서 바깥으로 도망친다. 탁발사가 실종되자, 탁발규는 부득이 새로 태자를 세워야 했다. 그는 탁발소(拓跋紹)를 점찍었다. 그러려면 반드시 그의 생모부터 죽여야 했다. 생모는 하란부에서 온 하씨였다. 이 일에 대하여 <<위서. 도무칠왕>>에는 모호하게 처리해놓았다: "사마소의 모친인 부인 하씨는 잘못을 저질러서, 태조가 그녀를 궁에 유폐시키고, 죽이려고 하였다. 날이 저물도록 결정되지 않았다. 하씨는 몰래 아들 탁발소에게 말을 전한다: '너는 나를 어떻게 구해줄 것이냐'. 탁발소는 장하(帳下)와 환자(宦者) 수명을 데리고 궁궐로 쳐들어간다....태조는 놀라서 일어났다. 활과 칼을 찾았으나 얻지 못했다. 결국 죽는다." 가련한 도무제는 친아들의 손에 죽었다. 그리고 '자귀모사'제도의 간접적인 피해자가 된다. 이 제도는 처음부터 피비린내를 풍겼따. '태종은 바깥에 있다가 변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왔다...탁발소 모자를 사사했다." 그리고 탁발사가 즉위한다.

 

탁발사는 비록 '자귀모사'에 반대했지만, 그는 효도로 유명했다. 결국 무조건적으로 '자귀모사'제도를 받아들여 시행한다. 탁발규로부터, '자귀모사'는 이미 북위왕조에서 황제가 교체될 때마다 관례가 된다. 이 방식은 비록 비인간적이지만, 북위의 초기에는 황권을 강화하고 봉건화를 진척시키는데 역할을 했다. 내부를 안정시키고, 황위계승질서를 잡는데 도움을 주었다. 북위때 부자간의 황위계승과정에서 큰 투쟁이 벌어진 적은 없다. 다만, 이 제도는 그 자체적으로 결함을 안고 있었다. 예를 들어, 탁발황과 원순(元恂, 탁발씨는 원씨로 성을 고침)의 두 태자는 부친보다 먼저 죽는다. 결국 그들의 생모는 괜히 죽은 꼴이 된다. 여기에다가, 생모가 죽은 후에는 나이어린 태자를 보모에게 양육하도록 맡긴다. 태자가 즉위하면, 보모의 양육해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그녀들을 보태후(保太后)로 모셨다. 어떤 경우는 심지어 황태후로 모시기도 했다. 그녀들의 자식이나 조카는 모두 고관을 받는다. 심지어 왕이나 공에 봉해지기도 한다. 이렇게 하여, 생모는 권력을 행사하지 못했지만, 보태후들이 조정에 간여하기 시작하였다. 더욱 무서운 일은 그 후에 벌어진다.

 

봉건화가 진척됨에 따라, 북위후궁은 거의 한족여인들의 천하로 변모한다. 그녀들은 원래 조정에 간여할 수도 없었고, 강대한 외가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자귀모사'제도는 이미 존재가치를 상실했다. 그러나, 그 제도는 계속 이어지고, 고착화된다. 그리고 후궁들이 적수를 제거하는 수단이나 권력쟁탈의 가장 좋은 핑계거리로 전락한다. 탁발준(拓跋濬)의 귀비 이씨의 죽음이 바로 그러한 예이다. <<위서. 황후전>>에 따르면, 이씨는 입궁전에 남자가 있었다. 이로 인하여 보수적인 상태후는 그녀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가 임신하자, 상태후는 친히 가서 확인까지 한다. 황제의 자식이 맞는지. 탁발홍(拓跋弘)을 낳은 후, 이씨는 보통부인에서 귀인에 오른다. 귀인은 황후의 바로 다음 가는 자리이다. 황후 풍씨(馮氏)는 두려움을 느낀다. 그리하여 이씨를 대하는 문제에서는 상태후와 풍황후의 의견이 일치하게 된다.

 

이외에 풍씨에게는 다른 목적도 있었다. 풍씨는 보태후에게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자신이 태자를 기르게 되면 장래의 황제를 통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풍씨는 '자귀모사'제도를 이용하여 전후로 3명의 모친을 죽여버린다. 즉, 탁발준의 귀비 이씨, 탁발홍의 처 이씨와 탁발굉(拓跋宏)의 처 임씨가 그들이다. 이런 비열한 수단을 통하여, 풍씨는 탁발홍과 탁발굉이라는 두 황제를 자신의 손아귀 아래에 두고, 오랫동안 조정을 독단한다. 그리고 탁발홍은 역사상 가장 나이어린 태상황으로 밀려나게 만든다. 그리고 결국에는 탁발홍을 죽여버린다. 풍씨의 조카가 입궁한 후 그녀의 행동거지도 풍씨와 똑같았다. <<위서. 황후전>>의 기록에 따르면, "효문문소황후 고씨, 황후는 선무를 낳았다. 풍소의는 총애를 받아서, 속으로 양모가 되어 태자를 키우려는 생각을 가졌다. 황후는 갑자기 죽었다. 혹은 풍소의가 저지른 짓이라고 하였다." 자신에게 아들이 없거나, 아들을 낳지 못하는 경우에는 '생모를 죽이고, 그 아들을 기른다.' 이렇게 하여 미래 황제의 부양권을 빼앗아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하여 조정에 참여하기 편하게 만든다. 풍씨부터, '자귀모사'제도는 더더욱 비인간적으로 변모한다. 북위궁중은 음독하고 공포적인 분위기로 둘러싸인다.

 

'자귀모사'의 검은 그림자 아래에, 원각(元恪)의 시대가 도래한다. 이제 궁중에서 서로 왕이나 공주를 낳으려고 할 뿐, 태자를 낳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런 국면이 되어 낙태가 성행한다. 그리고, 황후 고씨가 투기심이 강하다보니 원각은 후손이 끊어질 위기에 처한다. 이때 호씨가 아들을 낳으면 죽을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고 원익이라는 외동아들을 낳아준다. 황통의 대계를 위하여 원각은 비로소 '자귀모사' 제도를 철폐한다. 어떤 사람은 자귀모사제도가 탁발굉에 의하여 폐지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풍씨가 반대하여 시행되지 못했었다. <<자치통감. 양기>>에도 북위에서 '자귀모사'제도를 폐지한 것에 대하여 "천감11년(512) 겨울, 십월...을해, 위나라는 황자 익을 태자로 세우고, 이때부터 모친을 죽이지 않기 시작한다"고 하였다.

 

천사6년(409년)부터 연창원년(512년)까지, '자귀모사'는 북위에서 7대 100여년간 지속되었다. 이 제도는 씨족사회가 봉건사회를 만나면서 나타난 산물이다. 북위에서는 사회전환의 촉진제가 되었다. 그러므로 이는 그저 일시적인 대책에 불과했다. 비록 일정한 합리성은 지니고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부녀의 정치간여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 사실상, 북위에는 여강자들이 많이 출현한다. 예를 들어, 두태후, 상태후, 풍태후, 고황후, 호태후가 그들이다. 자세히 헤아려보면, 이 시기에 부녀들이 정치에 간여한 현상은 북위건국전보다 심하면 심하지 덜하지 않았다. 봉건전제제도가 폐지되지 않는 한, 후궁의 정치간여현상은 단절될 수 없었다. 이것이 바로 서한에서 '입자살모'를 딱 1번만 시행하고 그만둔 이유이다. 그런데 다른 속셈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제도와 현실의 차이를 이용해서, 오히려 부녀가 정치에 간여하는 도구로 삼았다. 이는 탁발규의 원뜻에 위배될 뿐아니라, 북위정권의 쇠퇴와 분열을 가속화한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