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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남북조)

도연명(陶淵明)의 은거이유

by 중은우시 2008. 9. 20.

글: 위경화미(爲卿畵眉)

 

도연명이 관직을 버리고 은거하여 깊은 산속으로 가서, 술을 마시고 시를 짓고, 국화를 감상하며, 남산에서 유유자적하였다는 이야기는 자고로 '고결(高潔)'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정치하는 자들과 함게 더럽게 어울리지 않는 품격은 역대 이래로 사람들의 숭앙을 받았고, 그에 대하여 시를 짓고 노래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시단에 대한 공헌은 별론으로 하고, 은거의 원인에 대하여 대부분은 사족(士族) 지주가 정권의 암담한 현실에 불만을 품었기 때문이며, 더욱 직접적인 원인은 팽택현령으로 있을 때, "다섯말의 쌀을 위하여 허리를 굽히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도연명의 출신과 위진시대의 정치배경을 살펴보면 이러한 통설에 의문이 생기게 된다.

 

위진남북조시대에 관리를 선발하는 제도는 "구품중정제(九品中正制)"라고 불렀다. 평가기준은 품행(品行), 재능(才能), 가세(家世)였다.

 

동한 말기의 조조는 '재능이 있어야 등용한다(惟才是用)'는 원칙에 따라 재능을 핵심기준으로 하였다. 조조가 죽은 후에는 조비가 사족의 지지를 얻어, 220년에 '구품관인법'을 시작한다.

 

'재(才)'에서 '관(官)'으로 변화한 것에서 그 기준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재능"은 점차 덜 중시되고, "품행"의 기준은 그저 '삼강오륜'에 지나지 않았다. 이 모호한 범주는 여론조작이 가능한 것이어서 공정한 기준이 되기 힘들었다. 이외에 당시에 채용을 책임진 사람을 "중정"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명문세가출신이다. 자신과 집단의 이익을 위하여 그들은 자기의 세력으로 여론을 통제하였다. 평가의 결과는 '상품에는 한미한 가문출신이 없고, 하품에는 명문세가출신이 없다"는 결과가 나오게 되었다. '구품중정제'의 평가기준은 결국 '가세(집안)'배경이 핵심으로 되었다.

 

당시에 관직은 "청(淸)"과 "탁(濁)"의 두 유형으로 구분했다. "청"은 지위는 중요하지만 실제책임은 지지 않는 것이고, "탁"은 실무업무에 종사하는 것을 하급관리들이 맡았으며, 한미한 집안출신들을 위하여 준비한 것이었다. 청, 탁의 구분은 당시아 아주 중요했고, 뿌리깊은 관념이었다. 황제조차도 이를 어찌할 수 없었다.

 

사족계층은 이런 관리선발제도를 통하여, 통치계급내부의 특수계층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지위는 세습되었다. 그러므로, 당시 사회는 혈통을 아주 중시했다. 비록 가문이 몰락하더라도, 고귀한 혈액이 흐르는 자는 여전히 '서인'출신의 부자를 무시했다. 이러한 유형의 사례는 당시에 수도 없이 많았다. 그들의 뼛속에는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다는 우월감이 있었다. 도연명이 바로 그러한 사람이었다.

 

도연명의 증조부는 도간(陶侃)인데, 일찌기 무창태수(武昌太守)를 지냈다. 사족의 명문집안출신이라고 할 만했다. 나중에 집안이 몰락하였지만 도연명에게는 집안대대로 전해내려오는 우월감이 남아 있었다. 나중에 그는 "주주부(州主簿)"의 직에 추천받았지만, 그 직위는 '탁'직이라고 생각하여 받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참군(參軍)"의 직위를 받았지만, 여전히 그다지 '청'직이라고 생각하지 아니하여 받지 않았다. 나중에 '팽택현령'의 직을 내렸을 때 비로소 자신에 어울린다고 생각하여 관직을 받아 취임했다.

 

그런데, 부임한지 얼마되지 않아, 현의 관리가 그에게 보고했다. 상급기관인 군의 독우(督郵)가 오니 의관을 정제하고 예의로 맞이하여야 한다고. 그런데, "독우"는 현재의 감찰유형의 직위로 '리(吏)'에 속하고, '탁'직이었다. 그 직을 맡은 자들은 대부분 한미한 집안출신이었따. 도연명은 스스로 '사족'이라 자부하고 있었으므로 아주 불쾌했다. 그리하여 이렇게 말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다섯말의 쌀 때문에 허리를 굽힐 수 없다. 시골의 소인에게 절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는 관인을 걸어놓고는 떠나버렸다.

 

이로써 볼 때, 도연명이 관직을 버리고 은거한 이유는 청고(淸高)한 점이 전혀 없지는 않지만, 근본적으로 당시 시대배경하에서 그의 뼛속에 흐르고 있던 '사족'계급관념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당시에 '독우'를 접대하려고 하지 않았던 관리는 아주 많다. 그러나, 도연명처럼 불같이 화를 내고 관직을 버린 경우는 드물었다. 나중에 남진(南陳)시대에 이르러 '독우'의 직은 철폐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