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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남북조)

북조십칠봉(北朝十七鳳)은 왜 불가에 귀의했는가?

by 중은우시 2009. 5. 28.

글: 유아독존(唯我獨尊)

 

황제를 용(龍이라 하고, 황후를 봉(鳳)이라고 하고, 황천후토(皇天后土), 용봉정상(龍鳳呈祥)등은 모두 황제와 황후의 존귀함을 나타내는 말이다. 황제의 마누라로서 하고 싶은 일은 황상을 제외하고는 막을 사람이 없다. 그러나 멀쩡한 황후를 하기 싫다고 하면서 대규모로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었다면 그것은 보통일이 아니다. 하물며 100여년간 위(魏), 제(齊), 주(周)의 11명의 황제를 거치는 동안, 문명황태후 풍씨, 선무황후 고씨, 효명황후 호씨, 공제황후 약간씨 및 서위문황후 을불씨등이 출가했다; 선무영황후 호씨는 더더구나 불법을 위하여 출가하여 비구니가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편안하게 지내는 생활이 싫증난 것인지 아니면 좀더 쿨한 것을 원한 것인지는 좀더 고민해봐야 겠다.

 

그렇다면, 왜 이들 황후들은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려고 했을까? 그것을 알려면 먼저 불교부터 얘기해야 한다.

 

동한의 명제때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다. 처음에는 낙양에서 시작한다. 한나라말기 조위(曹魏)시대에 하남지역에서 처음 전파되기 시작한다. 서진16국시기에는 더욱 많이 발전되고 전파된다. 그러다가 북위때 전성기에 달한다. 불교가 중국고대발전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므로, 양무제는 불교를 국교로 하였고, 4번이나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던 황제이다. 일찌기 출가하여 불문에 귀의한 황후도 적지 않다. 그러나 북조의 후기처럼 여러 황후가 대거 출가하여 비구니가 된 것은 보기 드문 현상이다.

 

북조때, 북위의 각 황제는 불법을 널리 알렸고, 거의 모든 황제들이 이를 주창했다. 그리고 불경이 번역을 주도하고, 절을 만들고 불상을 만드는 일들을 했다.

 

당시 사원은 특수한 지위를 지니고 있었다. 각 황제가 불교를 숭상하므로 여러 사원이 줄줄이 만들어졌다. 북위때, 수도인 낙양에는 1367개소의 절이 있었다고 한다. 강북 전체로는 3만여개의 절이 있었다. 출가하여 승려가 된 사람만도 200만명에 달했다. 승려가 이렇게 유례없이 많아지고, 이와 동시에 사원에서는 생산활동을 하지 않고, 명문거족의 지주계급으로서의 특권을 누렸다. 그들은 임대를 하거나 농민들에게 일을 시켰고, 상어베 종사하고 고리대금을 주었다. 그렇게 많은 노동인민들을 착취했고, 재물을 긁어모았다. 당시 무신론자인 범신이 쓴 <<신멸론>>에는 이런 현상을 폭로하기도 했다: 백성들은 가산을 탕진하면서 부처에게 절하고 기도한다. 양식은 백수로 놀고먹는 승려들이 다 먹어버리고, 재물은 호화사치스러운 절에서 다 써버린다. 이것도 황후가 출가하여 비구니가 된 원인의 하나이다. 이외에 다른 원인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첫째, 신체를 잘 보양해서 장수를 누리고자 한 경우: 황후의 건강이 나쁜 경우에는 출가하여 절로 들어가는 것이 신체건강을 위하여 유리했다.

둘째, 모든 의욕을 잃고 궁에서 쫓겨난 경우: 황제의 총애를 잃은 후에 출궁하여 비구니가 되었다.

셋째, 왕조가 바뀌면서 부득이하게 출가한 경우: 황위가 바뀌거나 왕조가 바뀐 희생물이 된 것이다.

넷째,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패자가 출가한 경우: 어린 황제가 등극한 후 복수의 황후간에 정권다툼을 벌이다가 패배한 사람이 절로 들어갔다.

다섯째, 마지막으로는 정치적인 피난으로 선택한 경우

 

북조의 중후기에는 사원세력이 통치자의 지원하에 급속히 성장한다. 승려의 수가 엄청나게 많았다. 황후를 가장 많이 수용한 곳은 요광사(瑤光寺)였다. 황후가 출가한 절은 절이라고는 하시만 실제로는 편안히 지내는 별원과 같았다. 생활대우가 궁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생활적으로 보면, 냉궁으로 쫓겨나는 것보다 출가하는 것이 훨씬 나았다.

 

역사적으로 여러 황후는 비록 일인지하의 존귀한 신분이지만, 평생을 고독하게 산 경우가 많다. 이는 확실히 절에가서 조용하고 깨끗하게 사는 것만 못하다. 출가는 아주 괜찮은 선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