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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남북조)

염위(冉魏): 2년간 존속했으나 중국역사를 바꿀뻔한 소국

by 중은우시 2010. 1. 3.

글: 노위병(路衛兵)

 

중국고대사에서 '염위'는 그다지 유명하지 않다. 존속한 기간도 아주 짧다. 350년초에서 352년 초여름까지 2년여에 불과하다. 중국에서 문자로 기록된 5천년의 역사에서 2년의 기간은 그저 불꽃 한송이 혹은 물 한방울에 불과하다. '염위'가 당시 지배한 영토면적도 크지 않았다. 겨우 '업성(鄴城)'부근이었다. 여러나라가 난립하고 군웅이 할거하던 5호16국시대에 이는 그다지 두드러진 것도 아니다. 건국에서 멸망까지 겨우 황제 1명이 있었다. 심지어 한 나라로 취급해줄 것인가 아니냐에 대하여도 논란이 있어왔다. 북위의 최홍(崔鴻)은 <<십육국춘추>>에서 이 소국을 16국 안에 포함시키지도 않았다. 그러나, '염위국'은 확실히 평범한 소국은 아니었다. 오호가 북방에 널리 퍼져있을 때, 그것은 '한인(漢人)'이 중원에 건립한 유일한 나라였다. '염위'는 일대의 패주인 후조(後趙)를 멸망시켰을 뿐아니라, 갈호족(胡族)을 거의 멸족시켰다. '염위'의 출현은 중원북방 분쟁의 분수령이었다. 하마터면 중국역사의 방향을 바꿀 뻔했었다.

 

이야기는 너무나 참혹했던, "업성지변(鄴城之變)"부터 시작해야겠다. '업성'은 지금의 하남성 한단시 임장현의 경내에 있다. '업성'은 '염위'라는 소국과 마찬가지로 고대의 수도들 중에서 그다지 유명하지는 않다. 장안, 낙양처럼 호화스럽지도 않고, 남경, 북경처럼 중후하지도 않다. 그러나, 특수한 지리적 위치로 인하여 역대이래로 병가필쟁지지(兵家必爭之地)였다. 여기서는 시간순서에 따라 조위(曹魏), 후조(後趙), 염위, 전연(前燕), 동위(東魏), 북제(北齊)등 6개왕조가 들어섰다. 그리하여, '삼국고지(三國故地), 육조고도(六朝古都)"라는 아름다운 이름이 붙어 있다. 조조가 있을 때, 이 곳에는 동작대(銅雀臺)를 만들어서 널리 이름을 떨쳤다. '건안풍골(建安風骨)'은 지금까지도 중국문학사상에 전해지는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업성'은 역사상 여러번 창상을 겪고, 여러번 유린을 당했다. 조조가 원상을 공격하면서 일찌기 미친듯한 도살을 자행한 바 있다. 오호십육국시대에 업성은 더더욱 군웅들이 서로 차지하려는 요지였다.

 

'업성지변'의 도화선은 염민(冉閔)과 석씨집단(石氏集團)의 갈등에서 비롯된다. '염민'은 바로 나중에 '염위'를 건립한 사람이다. 염민의 부친인 염첨(冉瞻)은 어려서부터 석호(石虎)의 부친인 석륵(石勒)이 거두어 길렀다. 석륵은 석호에게 염첨을 양자로 삼게 한다. 그러니, 염민은 석호의 양손자가 된다. 그는 '신장이 팔척에 모략과 책략에 능했다'고 한다. 후조의 영토를 확장하는데 큰 공로를 세운다. <<진서>>의 기록에 따르면, 영민은 '용맹하고 힘이 세어 공격함에 앞에 거칠 것이 없었다'고 한다. 당시 '오랑캐나 중원의 장수들이 그를 꺼려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석호가 요동이 모용씨를 공격할 때, 부대가 궤멸하는데, 오로지 염민의 부대만 온전했다. 이를 보면 그는 확실히 용맹한 맹장임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염민은 후조의 태조인 석호의 인정을 받는다.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염민이 원래 석씨를 멸망시킬 의도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두 가지 사건이 염민으로 하여금 도살을 일으키게 하였다고 할 수 있다. 하나는 석준(石遵)의 식언이다. 석호가 죽은 후에, 태자인 석세(石世)가 즉위한다. 석세의 형인 팽성왕 석준은 이에 불복하여, 염민으로 하여금 선봉을 서게 하고 업성으로 쇄도해 들어간다. 그리하여 석세를 폐위시키고 그 자신이 황제가 된다. 석준이 거사를 일으킬 때, 염민에게 약속한 바 있다. '일이 성공하면 너를 태자로 삼겠다' 그러나 나중에 그는 자신의 조카인 석연(石衍)을 태자로 삼는다. 염민은 도독중외제군사.보국대장군에 봉한다. 염민은 화가났고, '내외의 병권을 장악하고' 대거 자신의 사람을 발탁한다. 그리하여 조정의 정권을 독점한다. 석준은 이때 염민을 제거하려는 생각이 있었다. 그리하여 의양왕 석감(石鑒), 낙평왕 석포(石苞), 여양왕 석곤(石琨), 회남왕 석소(石昭)등과 상의한다. 염민이 갈수록 버릇이 없어지니, 이제 그를 죽이고자 한다. 어떠냐고 말한다. 그러자 석감등은 '좋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회의의 내용이 누설된다. 석감은 표면적으로는 회의의 의도를 관철하려는 것처럼 보였지만, 몰래 사람을 보내어 염민에게 이를 알려준다. 그리하여, 염민의 일당은 다시 사공 이농(李農)등과 연합하여, 제2차 업성정변을 일으키고, 석준을 죽이고 석감을 황제에 올린다.

 

둘째는 석감의 이중성이었다. 위에서 이미 석감의 이중적인 태도가 나타났지만, 거기에는 자신이 황제가 되고 싶은 사심이 있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는 염민을 도와준 것이었다. 석감은 염민에 대하여 안심하지 못했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어 염민을 암살하고자 한다. 용양장군 손복도, 유수등이 갈족 병사 3천을 데리고 매복하여 염민을 죽이고자 한다. 그러나, 거꾸로 염민에게 당한다. 당시 시신이 서로 베고 누워있고, 흘린 피가 도랑을 이루었다고 한다. 아주 참혹한 상황이었다. 이로 인하여 제3차업성정변이 일어난다. 이번에는 염민이 급했다. 내외의 육이(六夷)중 병장기를 들 수 있는 자는 모조리 죽이라고 명한다. 그리고 오랑캐 머리 하나를 봉양문에 가져오면, 문관은 3등의 자리를 주고, 무관은 아문의 직위를 준다고 했다. 업성내에서 갈족을 주살하기 시작한다. '갈족은 귀천을 불문하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조리 죽였다. 죽은 자가 이십여만에 이르렀고, 시신이 성밖에서 들개와 승냥이가 먹어치웠다" 비록 이러했지만, 영민은 석감을 죽이지 못하고 그를 수감한다. 나중에 여양왕 석곤이 업성을 공격할 때, 석감은 염민이 성을 나가 싸우는 틈을 타서, 사람을 보내어 소식을 전한다. 무군장군 장심이 그 틈을 타서 업성을 공격한다. 이리하여 염민을 화나게 하여, 염민은 석감을 죽여버린다. 그리고 석호의 자손 38명을 같이 죽인다. 석씨의 씨를 말린 것이다. 이로 인하여 석씨와는 철저히 등을 돌린다. 그리고 350년 봄에 황제에 오르고 국호를 대위(大魏)라 한다. 역사에서 '염위'라고 부르는 왕조가 탄생한 것이다.

 

이번 중원의 변고에 하나의 중요한 요소가 빠진 것같다. 동진(東晋)이다. 염민이 염위를 건국한 후, 동진에 구원을 요청한다. '오랑캐들이 중원을 어지럽혀, 이제 그들을 죽였다; 같이 토벌할 것이면, 군대를 보내달라' 그러나 동진은 거들떠보지 않는다. 사실 동진은 중원을 회복할 뜻이 없었다. 포홍(蒲洪)을 대표로 하는 씨족세력이 동진에 투항하고, 동진에서는 그를 정북장군(征北將軍)에 임명한다. 그리고 양주자사 은호(殷浩)와 함께 북벌을 한다. 그러나 포홍은 그 자신의 생각이 있었다. 난리를 틈타 관중을 차지하려고 하였지, 중원으로는 들어가고자 하지 않았다. 은호도 병사를 일으키는 것이 이롭지 않다고 보았다. 나중에 환온(桓溫)이 여러번 상소를 올려 북벌을 청하지만 모두 승인하지 않는다. 환온은 화가 나서, '병사 4,5만을 데리고 강물을 따라 내려와서 무창에 주둔했다" 조정에서는 겨우겨우 환온을 진정시킨다. 동진 상층부의 이러한 태도는 필자가 보기에 여러가지 복잡한 원인이 있었던 것같다. 포홍을 보내어 북벌하게 한 것은 오랑캐로 오랑캐를 제압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그저 앉아서 호랑이 두 마리가 싸우는 것을 구경하겠다는 취지이다. 이것이 그 첫째이다; 환온을 꺼려했다. 그가 큰 공을 세워 군주를 누르게 되는 것이 싫었다. 이것이 둘째이다; 은호의 북벌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사기가 급격히 하락했다. 이것이 그 세번째이다; 더욱 주요한 것은 동진의 최고지도자층은 중원을 수복하겠다는 믿음이나 사기가 부족했다. 동진은 오랫동안 편안하게 지내면서, 점점 보수적이고 안락을 추구했다. 은호가 북벌할 때 중군장군 왕희지는 그에게 이렇게 권한 바 있다. '회하를 지키려는 것은 우리의 힘이 미치지 못한다. 장강을 지키려고 하는 것이 낫다' 이는 강남조차도 지키기 힘든데 회하까지 지키려고 하는가? 차라리 힘을 모아서 장강이나 지키자는 것이다. 이와 같은 왕희지의 생각은 당시 동진의 많은 사람들의 주류의견을 대표하는 것이다.

 

동진이 관망하면서, 염위는 형세에서 수세에 몰리게 된다. 신흥왕 석지(石砥)는 양국(襄國)에서 황제에 오른다. 후조의 잔여세력을 끌어모아서 염위와 대치한다; 요과중(姚戈仲)을 대표로 하는 강족(羌族)세력, 및 후조의 잔여세력이 한 지방에 할거하고, 염민을 토벌하고자 한다; 요동에 웅거하고 있는 선비족 모용씨는 후조의 내란을 틈타 병력을 3길로 나누어 중원으로 진군했다. 필자가 보기에, 만일 당시 동진이 염위를 도와주었더라면, 중원회복은 가능했을 것이다. 염위의 군대는 전투력이 강했다. 석지를 정벌할 때, '염민의 부대는 병졸이 삼십여만으로 깃발과 북이 백여리에 걸쳤다. 비록 석씨가 강성했지만, 염민보다 못했다" 염민은 사방에 있던 한족 우두머리들에게 호소를 한다. '한인은 갈족오랑캐를 죽여라' 한족들이 이에 호응하니, 졸지에 코가 높거나 수염이 많은 자들중 억울하게 죽은 자들이 절반이었다. 그후 한족은 강족과 서로 공격하면서 싸우지 않는 달이 없었다. 그리하여, 강족, 호만(胡蠻)등 수백여만이 모두 본토로 돌아갔다" 오랑캐들이 퇴각한 것이다. 도중에 길이 엇갈려 서로 죽이고 굶어죽거나 병들어 죽는 자가 열에 둘, 셋이었다. 이리하여 오호의 중원에서의 세력이 크게 약화된다.

 

그러나, 동진의 관망태도에, 모용씨의 침입으로 중원의 형세는 역전된다. 석지는 염위를 당해내지 못하고 황제의 칭호를 버리고, 모용씨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모용씨는 일찌감치 중원을 노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당당하게 진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 염민을 죽이고 염위를 멸망시킨다. 염민은 '살호령(殺胡令)'을 내린 것때문에, 현대인들에게 오해를 받고 있다. 그는 민족통합을 파괴한 사람이라고.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이러한 견해는 가소롭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옛사람들을 형량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아주 황당한 결과를 낳는다. 1500년전의 염민이, 민족대단결의 사상을 가질 수는 없다. 그는 아마도 복수의 일념이었을 것이고, 이기적인 일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실상 한족의 영웅이다. 당시 북방의 호족들은 수량에 있어서 한족을 넘어섰다. 관중의 백만인 중에서 융적(戎狄)이 절반이었다. 염민이 후조를 멸망시킨 후, 오호중에서 가장 사나웠던 갈족이 멸족된다. 그리고 당시 흉노의 세력도 약화된다. 이리하여 오호의 중원에서의 세력이 크게 감퇴한다. 아마도 그가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오호는 번성하고, 갈수록 강해져서 나중에 강남을 먹어삼켰을지도 모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