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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삼국)

사안(謝安): 중국역사상 가장 풍류적인 재상(宰相)

by 중은우시 2009. 6. 9.

글: 유아여(劉雅茹)

 

중국역사상 유명한 재상들은 각자 독특한 점들이 있다. 모두 그 나름대로의 독특한 트레이드마크가 있다. "국궁진췌(鞠躬盡)"라면 누가 제갈량(諸葛亮)을 따라올 것인가?; "예의개혁(銳意改革)"이라면 왕안석(王安石)만한 사람이 없다; : "좌우봉원(左右逢源)"이라면 왕도(王導)를 꼽아야 할 것이고; "돈적거기(積居奇)"라면 여불위(呂不韋)를 말해야 하며; "구밀복검(口蜜腹劍)"은 이임보(李林甫)를 따를 자가 없다....트레이드마크는 각양각색이고, 그 중 아무나 한 사람을 고르더라도, 그 인생의 오묘함을 연구하려면 몇년은 최소한 걸릴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혹은 IQ가 아주 뛰어나고, 혹은 흉금이 남달리 넓은 엘리트들 중에서 유일하게 한 명상(名相)은 트레이드마크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 그리고 사람들의 부러움을 많이 사는데, 그는 바로 "풍류(風流)"라는 두 글자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동진(東晋)의 재상 사안(謝安)이다.

 

"풍류"라는 단어는 고대에는 보통 단어가 아니었다. 풍우란(馮友蘭) 선생의 해석에 따르면: "풍류라 함은 인격의 지극한 아름다움(至美)이고, 그것은 일쫑의 지고(至高)한 인생의 경지이다. 사안에 있어서 그것은 바로 커다란 공명을 당대에 거두면서도 자신의 진실한 성정(性情)을 잃지 않은 것이다. 이는 중국의 수천년동안 문인들의 마음 속에서 가장 완벽한 이상향이었다. 단지 이런 인생을 몇 사람이나 살았는가? 바로 사안은 그들의 꿈을 이룩한 사람이다. 과연, 이태백이 사안이라면 바로 고개를 숙이고, 일생동안 그를 우상으로 삼았다는 것도 이해가 된다. 소동파, 육우, 왕안석등등도 그들의 시사에서 사안에 대한 존경을 드러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얼마전에는 이중천(易中天) 선생이 삼국지를 감상한 후 글을 써서 "오로지 사안 만이 진짜 천인(天人)이로다"라고 감탄한 바 있다.

 

의심의 여지없이, 사안은 동진왕조의 거목이다. 앞에는 "좌우봉원"의 왕도가 있고, 뒤에는 "풍류소쇄(風流瀟灑)"의 사안이 있다. 그리하여 백년왕조가 지탱하였던 것이다.(주석: "소쇄"라는 두 글 자는 왕희지의 아들 왕헌지가 사안에 대하여 한 찬사에 나오는 말이다. '당신은 원래 가장 소쇄로운 사람이다.' 아마도 소쇄라는 말의 어원이 여기가 아닐까?) 사안의 일생에서 가장 휘황한 두 번의 시기가 있다. 환온(桓溫)의 반역음모를 담담하게 저지한 것과, 진나라의 백만대군을 웃으면서 격퇴한 것이다. 이것들은 이미 역사서에 기록되어서 후세인들이 서로 앞다투어 칭송하는 것이 되었다.

 

373년, 동진천하를 빼앗으려고 마음먹은 대사마 환온은 병력을 이끌고 조정에 들어와서 성밖에 홍문연을 벌였다. 그리고 그는 이번에 온 것은 바로 "왕사(王謝)를 주살하고, 진정(晋鼎)을 옮기"기 위한 것이라고 공언했다. 바로 사안과 또 다른 중신 왕탄지(王坦之)를 죽여버리고, 진나라로부터 나라를 빼앗겠다는 말이다. 그를 영접하러 갔던 대신들을 혼내서 쫓아보내니, 모두 얼굴이 흙색이 되었다. 왕탄지도 등에 식은 땀을 줄줄 흘렸고, 내용을 기록하기 위하여 손에 들고 있던 수판(手版)을 거꾸로 들기까지 하였다. 오로지 사안만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앞으로 걸어나가서, 낭랑한 목소리로 환온에게 물었다: "환공! 내가 듣기로 도리를 아는 제후라면 마땅히 나라를 위하여 사방을 지켜야 하는데, 그대는 어찌하여 병사를 장막의 뒤에 두었는가?" 환온은 졸지에 멍해졌다. 원래 조정의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해서 제압했다고 생각했고, 황제가 최소한 그를 섭정왕에 봉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사안이 이렇게 나오자 그의 원래 속셈을 이루기 어렵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안의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죽는 것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태도를 보자, 그는 한참을 어떻게 대응해야할지 모르게 되었다. 마침내, 환온은 웃음띤 얼굴을 하고는 사안의 손을 끌어당기면서, 그와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조정의 모든 대신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동진의 한바탕 위기는 이렇게 넘어갔다.

 

만일 이번에 사안이 통상적인 문인의 담량과 풍류로 동진을 구했다고 말한다면, 10년후의 비수지전(水之戰)은 그가 구해낸 것은 단순한 동진왕조가 아니라 전체 천하였다. 심지어 수천년의 중국문화라고 할 수 있다.

 

383년, 전진의 천왕 부견이 친히 90만대군을 이끌고, 몇 개 방향으로 나누어 장강으로 밀고 내려왔다. 동진에서는 위로는 황제에서, 아래로는 문무대신에 이르기까지, 졸지에 어떻게 해야할지를 모르게 되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예 투항하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이때의 사안은 바로 대권을 손에 움켜쥐고 있던 재상이었다. 모든 사람의 눈이 그를 향했다. 그가 도대체 어떻게 이 난국을 수습할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안은 이전처럼 담담했다. 뭐 무서울 것이 있는가? 그는 바로 응전하기로 결정한다. "나는 국가의 역량을 집중하여 여기에서 끝장내버리겠다" 그 후에 다시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 대신들은 신경쓰지도 않고, 친구들을 이끌고 함께 별장으로 가서 바둑을 둔다. 사람들이 모두 안정되자, 사안은 다시 집으로 돌아와서 장수를 지명하고, 전략적인 배치를 한다. 비수지전이 진행되는 1달여동안 사안은 "진지이정(鎭之以靜)"의 책략하에 전체 동진은 보통때와 마찬가지로 평안했고, 백성들도 모두 안심하고 지냈다. 전혀 큰 전쟁을 치르는 나라같지 않았다.

 

금방 비수대첩의 소식이 전해진다. 사안의 조카인 사현(謝玄)이 동진의 가장 용감하고 전투를 잘하는 "북부병(北府兵)"을 이끌고 회하전선에서 적은 병력으로 많은 적을 물리친 것이다. 일거에 부견의 대군은 궤멸한다. 이때의 사안은 여전히 집안에서 손님들과 바둑을 두고 있었다. 그는 승리했다는 보고를 받아보고는 가볍게 한켠에 밀어놓고, 다시 바둑에 집중한다. 마치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았던 것처럼. 오히려 손님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물었다: "전선의 소식입니까?" 사안은 그제서야 담담하게 대답했다: "아이들이 이미 적군을 대파했다는군요..." 어쨌든 사안도 신선은 아니니까, 이때의 심정은 아마도 기뻐서 죽을 지경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러한 마음 속의 기쁨을 누르고, 방으로 돌아갔다. 발에 신고있던 나막신이 문턱에 부딛쳐서 부서졌는데도, 그는 전혀 깨닫지 못했다.

 

이 두번의 역사적인 휘황함은 사안의 일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들이다. 다만, 역사상 유일한 "풍류재상"인 사안에 대하여 후세인들이 가장 감탄하는 점은 이같은 불세출의 공적을 세웠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초연물외(超然物外)한 심정과 성정이 바로 후세에 1쳔여년간이나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것이다.

 

사안은 일찌감치 소쇄한 풍도로 이름을 날렸따. 그러나 그는 근 20년이나 은거한 후에 관직에 나섰따. 이 이십년동안, 관료사회가 어떻게 억지로 그를 끌어들이려 하거나 유혹하더라도 그는 못들은 것처럼 살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의 인생목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가족의 책임을 부담하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관직에 나서게 된다. 사안이 관직을 맡은 것은 어쩔 수 없이 떠맡았다고 할 수 있다. 그의 불세출의 공적은 원래 그가 필요로 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정말 동진천하를 떠받쳤고, 그는 관직에서도 시원시원하게 있으면서 아주 허약한 나라를 잘 버티게 해왔던 것이다. 마지막에는 그가 개세의 공적을 세우고, 사마씨 왕실이 불안해하고 있을 때 그는 대권을 손에쥐고, 병력을 움켜쥔 상황하에서, 아무런 미련도 없이 모든 대권을 버려버린다. 황제가 바라보는 가운데, 그는 시원스럽게 경성을 떠난다.

 

이렇게 태산보다 큰 권력을 그는 왜 버릴 수 있었을까? 왜냐하면 그의 심경은 원래 훨씬 더 크고 넓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렇게 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자연"이 무엇인지를 진정으로 아는 인물에게는 모든 외물은 작게 보인다. 그래서 가족이든 국가이든 이런 중대한 책임이 항상 사안의 머리를 짓눌렀지만, 사람들은 그가 비분강개하거나 놀라고 당황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들이 본 것은 항상 시원스럽고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사안은 항상 자아중심적인 사람이었다. 은거하고 있을 때, 그는 하고싶은대로 나날을 보냈다. 아마도 은거라면 다른 사람에게는 청빈의 대명사이겠지만, 사안에게 있어서는 "은(隱)"이라는 것이 소쇄한 것이다. 소쇄할 뿐아니라, 화려하기도 하였따. 그는 어려서부터 음률을 좋아하고, 어른이 되어서도 이를 떠나지 못했다. 그는 약간의 가기(歌妓)들을 길렀고, 자주 그녀들과 손을 잡고 숲으로 샘으로 놀러가거나, 노래하고 악기를 연주했다. 조정에 관직을 맡은 후에도 집안에는 여전히 노래와 춤이 끊이지 않았다. 국가와 집안에 상을 당했을 때도 그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관리들의 의론이 분분했다. 모두 그가 예법에 어긋난다고 손가락질했다. 사안은 그들과 다투지 않았고, 아예 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가 커다란 공을 세우자 사방에서 유언비어가 난무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왕망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래도 그는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고, 매일 여전히 성대한 연회를 집안에서 베풀었다. 매번 바깥나들이할 때면, 가마는 화려하고 헌앙했다. 그가 보기에 조건이 허락하는 하에서 그는 최대한 자신의 심령의 자유와 만족을 누리고자 한 것이다. 원래 이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다. 원래 자신의 성격대로 생활한 것이다.

 

민녀 축영태가 회계 양산백을 위하여 목숨을 바쳤다는 이야기를 듣자, 사안은 감동했다. 그는 즉시 황제에게 글을 올려, 축영태에게 "의부(義婦)"라는 칭호를 내리게 하고, 그후에 친히 글을 써서 그녀의 묘를 "의부총(義婦塚)"이라고 하였다. 그녀를 천하 여자의 모범이 되도록 했다. 양산백,축영태의 이야기는 이리하여 천고에 전해지게 된 것이다. 사안의 마음 속에 있는 이 "의부"를 보자: 딸이었을 때 남장을 하고 돌아다녔고, 부모가 그녀에게 짝지어준 혼인을 마다하고 그녀는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 그후 사랑하는 낭군이 죽자, 그녀는 명분도 버리고 신분도 버리고, 함께 한 곳에 묻힌다...이것이 고대에 떠받들던 "정결열녀(貞潔烈女)"인가? 오히려, 완전히 봉건적인 예교에 반항하는 전형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사안은 이런 여인을 마음에 들어했다. 사실 그것은 결국 하나로 귀결된다. "진(眞)". 사안의 마음 속에 이것이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사안과 왕도를 나란히 놓고 얘기하기를 즐겼다. 그들은 강좌의 두 "풍류재상"이다. 그러나, 남조에 이르러, 왕도승상의 후대인 상서복야 왕검(王儉)은 이렇게 말한다: "강좌의 풍류재상은 오로지 사안 한 사람뿐이다." 사실 전체 중국역사에서 재상에게 "풍류"를 얘기하자면 사안을 따를 사람이 없다. 그는 "풍류"를 마음 속으로 가져간 사람이다. 그의 "풍류"는 바깥의 외물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