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개주(李開周)
한무제(漢武帝) 유철(劉徹)은 대단한 여행가였다. 그는 정권을 장악한 이후, 바깥으로 순유(巡遊)를 다니는 것을 특히 좋아했다. 그리고 매번 순유를 나갈 때마다 현지에 행궁(行宮)을 하나씩 만들었다. 원풍(元豊) 원년, 한무제는 산동(山東) 견성(鄄城)으로 순유를 나갔다. 전혀 예외없이 그는 견성에도 행궁을 하나 만들어 투숙했다. 이 행궁도 다른 행궁들과 마찬가지로, 건축시에는 엄청나게 많은 돈을 들여서 지었고,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지만, 그 후에 유철이 하루 이틀 묵고 간 다음에는 빈 채로 남겨두게 되었다.
삼십년후, 유철이 죽고, 더 이상 순유를 오지 않았다. 그가 견성에 남긴 행궁은 영원히 버려지게 된다. 점차, 정원에는 잡풀들이 자라고, 담장위에도 풀들로 가득찼다. 기둥과 서까래가 이어지는 곳도 헐렁해지고, 지붕도 몇몇 군데 비가 새기 시작했다. 다 알고 있겠지만, 사람이 살지 않는 주택은 금방 망가져버리는 법이다.
삼백년이후, 한나라조차 없어졌다. 조위(曹魏)정권이 들어섰다. 조조의 아들인 조비가 황제에 오른다. 이제, 유철이 재위할 때 만들었던 행궁들은 거의 전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어떤 곳은 천재지변으로, 어떤 곳은 전쟁의 참화로, 더 많은 경우는 인근 백성들이 벽돌과 기와를 빼내가서, 결국은 빈 터만 남아버리게 되었다. 유일하게 세상에서 질긴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곳은 산동 견성의 그 행궁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이것이 남아있게 된 연유는 바로 조비가 내린 명령때문이다: 한무제가 견성에 남긴 행궁은 반드시 보호하라. 어떤 자나 어떤 기관도 풀하나 나무하나 건드려서는 안된다.
우리는 역사연표를 조사해볼 필요가 있다. 유철은 기원전 140년에 황제가 된다. 그의 제1차 산동순유는 기원전 110년이다. 그러므로, 견성행궁을 만든 시간은 아무리 빨라야 기원전 140년이고, 아무리 늦어야 기원전 110년이다. 기원전 110년이후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은 없다. 이 시기와 조위정권의 성립시기간에는 330년이라는 시차가 있다. 이는 강희제시대와 현재와의 시차에 상당한다. 그러므로 조위시대 사람들에게 있어서, 유철이 견성에 남긴 행궁은 문화재적 가치가 있을 뿐아니라, 역사가 유구한 것이기도 하다.
문화재적 가치도 있고, 역사도 유구하니 그 행궁은 유적지이다. 유적지는 인류에게 아주 중요하다. 그것은 우리들에게 과거를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주고, 우리들이 그 속에서 대체불가능한 정신적인 고양과 정신적인 위안을 받을 수 있게 해준다. 이런 이유로 조비가 그것을 보호하라고 하였을까?
당연히 아니다. 사실 조비라는 인간은 고건축을 철거하는것을 가장 좋아했다. 그리고 그것이 문화유적에 대한 후안무치한 파괴라고 생각지도 않았다. 그는 말했다: 하나라가 멸망한 후, 상나라의 탕왕은 하왕의 궁전을 철거시켰고; 상나라가 멸망하자 희발(姬發)은 상왕의 궁전을 철거했다; 주나라가 멸망하자, 제후들은 주나라천자의 궁전을 철거했고; 육국이 멸망하자, 영정(진시황)은 자신의 궁전을 제외한 나머지 군주들의 궁전을 모조리 철거했다. 현재 한나라가 망하였으니, 내가 그 몇 개의 행궁을 철거한다고 하여 무슨 대수냐? 그래서 그는 등극하자마자 옛 궁전들을 사방에서 철거했고, 철거한 목재를 허창(許昌)으로 운반해서, 자신의 더욱 크고 호화로운 궁전을 짓는데 사용했다. 그러나 그가 견성행궁을 철거하려 하였을 때, 갑자기 머리가 아파서 땅바닥을 데굴데굴 구를 정도가 되었다. 신관을 찾아서 물어보니, 신관은 한무제의 행궁을 철거하니 한무제가 화를 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조비는 미신적이어서, 감히 더 이상 철거하라고 하지 못했다. 그리고 견성행궁을 보호하라는 명령을 내리기에 이른다.
만일 동기를 보지 않고, 결과만 본다면, 조비는 견성행궁의 보호에 공로가 있고, 아주 현대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다른 행궁을 모조리 철거했고, 단지 1개의 기념적인 건축물만 남겨놓아서 우상화했다. 이는 현대의 유적지보호사업중에서 상해신천지 모델과 아주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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