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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삼국)

저산자(褚蒜子): 역사상 세번 수렴청정한 여인

by 중은우시 2009. 5. 8.

글: 노위병(路衛兵)

 

수렴청정(垂簾聽政)이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전국(戰國)시대이다. 국왕이 젊어서 죽어 후계자의 연령이 어리면, 그 모친이 정사들 도와주는데, 당시의 궁중규정에 따르면, 황태후는 신하나 백성들과 아무렇게나 얼굴을 맞댈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발을 늘어뜨려서 신하들과 갈라놓았다. 그리하여 수렴청정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황태후의 수렴청정은 중국역사상 여러번 나타났다. 그러나 일국의 황태후로서 일생동안 다섯 황제와 함께 하고, 세 번이나 수렴청정을 하였으며, 매번 서로 다른 역할을 했다:즉 모친, 숙모, 당숙모였다. 세번이나 황제를 세우고, 국가의 대사는 모조리 "황태후조령"의 형식으로 반포하고 시행했다. 3번이나 수렴청정을 하면서, 세번이나 물러났다. 그녀는 탄복할만한 담량과 모략을 지녔고, 보기드문 흉금을 지녔다. 이는 중국역사상 유일무이한 경우이다. 동진(東晋)의 강제(康帝) 사마악(司馬岳)의 황후(皇后)였던 "저산자(蒜子)"가 바로 그녀이다.

 

"저산자(324-384)", 명문집안출신이다. 저씨집안은 대대로 관료를 지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리했으며, 기품과 견식이 남달랐다. 그리하여 낭야왕 사마악이 왕비로 선택한다. <<진서>>의 기록에 따르면, "총명하면서도 도량과 견식이 있었다. 어려서 명문가출신으로 낭야왕비가 되었다"고 한다. 342년, 진성제 사마연이 병사하고, 그의 아들이 아직 어렸기 때문에 황제위를 사마악에게 넘겨준다. 그리하여 19살된 저산자는 당연히 황후에 책봉된다.

 

어린 아들을 안고 첫번째 수렴청정을 하다.

 

사마악은 황제가 된지 2년만에 죽어버린다. 2살된 어린아들 사마담(司馬聃)이 즉위하니, 저산자는 황태후가 된다. 사마담이 나이가 어려 국정을 돌볼 수 없게 됨에 따라, 조정대신들이 글을 올려 저산자로 하여금 수렴청정을 하도록 요청한다. 저산자도 시세의 흐름를 따라서 그들의 요청을 받아들인다. 어린아들을 안고 첫번째 수렴청정을 하게 된다. <<진서>>에는 "황태후(저산자)가 하얀비단장막을 태극전에 걸어두고, 어린황제를 안고 정사에 임했다" 그녀의 통치하에, 동진은 완전히 면모를 일신한다. 군사력도 크게 증가된다. 이 기간동안 대장 환온(桓溫)은 서남의 성한(成漢)세력을 멸망시키고, 촉의 땅을 거둬들인다. 다시 세번이나 북벌을 진행하여 동진의 군사위력을 널리 떨친다. 환온은 신하로서 지위와 권력이 강해지자 점차 교만해진다. 그리하여 저산자의 이후 통치에 화근을 심게 된다.

 

357년, 사마담이 15살이 되자, 저태후는 아들에게 정권을 물려준다. 사서에는 "승평원년 정월 임술삭, 황제가 원복을 입고, 태묘에서 하늘에 고하다. 이때부터 친히 만기를 다스리고, 황태후는 숭덕궁에 거주하다"  그녀는 조서를 내려 신하들에게 국가사직을 중히여겨 전력을 다해서 어린 황제를 보좌하도록 요청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저산자의 흉금이 넓음을 알 수 있고, 그녀의 민감한 정치적두뇌를 엿볼 수 있다. 저산자가 숭덕궁으로 은퇴한 후, 환온은 점차 더 방종해졌다.

 

국가위기에 명을 받아 두번째 수렴청정을 하다.

 

361년, 나이 19살의 사마담이 병으로 급사한다. 이때 성제 사마연의 아들인 사마비(司馬丕)도 이미 자라서 어른이 되었다. 그리하여 저산자는 황위를 정통으로 되돌려 사마비를 황제로 삼는다. 누가 알았으랴. 사마비는 정사에 전혀 흥취가 없고, 그저 미신과 도사들과 놀아났다. 매일 밥은 먹지 않고, 금단과 단약을 먹었다. 그리하여 어린 나이에 벌써 병상에서 골골하게 된다. 대신들은 할 수 없이 상소를 올려 사마비의 숙모인 저태후에게 두번째 수렴청정을 요청한다. "황제가 황로(黃老, 황제 노자의 술)를 좋아하여, 곡기를 끊고 장생약을 먹으며, 지나치게 단약을 많이 먹어 중독에 이르러 만기를 친람할 수 없으니, 숭덕태후께서 수렴청정하여 정사를 돌보아주소서"

 

저산자는 다시 나와서 1년간 수렴청정을 한다. 사마비는 '등선(登仙)'했다. 저산자는 다시 황제를 책봉하는 태후조서를 내린다. 사마비의 동생인 사마혁(司馬奕)을 황제로 삼은 것이다. 이때 환온은 이미 공고개주(功高蓋主)의 지경에 이르렀고, 이미 황제위를 찬탈하려는 마음을 가졌따. <<진서>>의 기록에 따르면, "처음에, 환온은 신하로 남지 않으려는 마음을 가졌다. 먼저 하삭에서 공을 세워 명망을 얻었다" 그는 전공을 세워서 이름을 날림으로써, 황제위를 찬탈하고자 했다. 그러나, 일은 그가 마음먹은대로 되지 않았다. 369년, 환온이 전연(前燕)을 북벌하다가 방두(지금의 하남성 극현 동북쪽)에서 모용수(慕容垂)에게 참패한다. 환온은 이로 인하여 명성에 금이 갔다. 그리하여 그는 황제를 폐위시키고 다시 자신의 권위를 세우고자 생각한다. 그는 자주 "아름다운 이름을 백세에 남기지(流芳百世) 못할 것이면, 추악한 이름이라도 천고에 남기겠다(遺臭萬歲)"고 말했다. 이를 보면 그에게는 이미 황위찬탈의 마음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환온이 널리 유언비어를 퍼뜨리는데, 사마역이 실제로는 성능력을 상실한 병신이라는 것이었다. 그의 세 황자는 모두 그의 남총(男寵)인 상룡(相龍), 계호(計好), 주영보(朱靈寶)가 낳은 것이라는 것이다. 이들이 두 미인 전씨, 맹씨와의 사이에 세 아들을 낳았다고 했다. 환온은 저산자에게 사마혁을 폐위시키고 승상인 사마욱(司馬昱)을 황제로 올리자는 건의를 하게 된다. 저태후는 환온의 세력도 강했고, 사마혁의 위신도 이미 땅바닥에 떨어졌으므로, 요모조모로 고민해본 후에, 사마혁을 폐위시키는 조서를 내린다. 그녀는 국가대계를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이렇게 했다. 저산자는 다시 숭덕궁으로 물러나서 숭덕태후로 불리워진다.

 

대의를 펼치기 위한 세번째 수렴청정

 

사마욱은 환온의 허수아비였따. 하루종일 두려움에 떨며 살다가 8개월간 황제자리를 지키다가 죽어버린다. 죽기전에 유언으로 자신의 11살된 아들 사마요(司馬曜)에게 후사를 잇게 하고, 환온의 뜻대로 환온에게 황제위를 선양하지 않았다. 환온은 이로 인하여 홧병에 죽는다. 여러 신하들은 다시 상소를 올려, 숭덕궁에 은퇴해있던 저산자에게 다시 나와달라고 부탁한다. 50세된 저산자는 당숙모의 입장에서 다시 세번째 수렴청정을 한다.

 

이번에 그녀는 환온의 세력을 제거하고, 조정을 장악한다. 그리고 조서를 내려 백성들을 구휼하게 한다. 그녀는 정치를 잘하여, 사회경제가 발전하였다. 376년, 저태후는 다시 조서를 내려 은퇴한다. 효무제 사마요가 친정을 시작한다. 저태후의 수렴청정은 이로써 모두 끝났고, 궁궐에서 조용히 지냈다. 384년, 동진왕조에 잊을 수 없는 공헌을 한 위대한 여성이 병으로 죽는다. 향년 61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