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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삼국)

실가정(失街亭): 마속(馬謖)의 피할 수 없었던 패배

by 중은우시 2009. 1. 8.

 

 

 

작자: 미상

 

가정의 패전을 얘기하자면, 이 전투의 배경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제갈량의 초출기산(初出祁山)에서 도대체 이 전쟁에 참가한 제갈량의 병력은 얼마였고, 마속의 병력은 얼마였던가 하는 문제를 덮어두고 넘어갈 수는 없다.

 

당연히, 많은 사람들은 제갈량이 이끌고 간 병력이 적으면 적을수록 좋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어쨌든 패전이라는 것은 쓰라린 것이니까. 사람들은 대다수가 제갈량이 우세한 병력으로 실패했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은 바라지 않을 것이다. 다만, 어쩔 도리가 없다. 자료에서 분석해보면 이번 전투에 제갈량은 10만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첫째, 우리가 보는 <<삼국지. 유선전>>에 인용된 <<제갈량집, 후주조서>>에 따르면, "...보병, 기병 20만을 이끌고...환란을 제거하고, 옛땅을 되찾으라..." 이곳에서 가장 과장된 부분은 그가 제갈량에게 20만의 병력을 수여했다고 하는 것이다! 당연히 이것은 뻥튀기된 것이다. 다만 이곳의 20만은 조조가 적벽대전에 이끌고 왔다는 80만과 같은 반열에서 얘기할 수는 없다. 조조가 적벽에서 80만이라고 큰소리친 것은 손권에게 보낸 서신에서이다. 거기에는 겁주려는 의도가 있다; 그러나 유선이 제갈량에게 내린 것은 조서이고, 자기 사람에게 보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약간의 과장은 있을지라도 그다지 크지는 않을 것이다.

 

당연히, 여기서 소위 20만의 병력은 촉한의 전병력일 것이다. 이 병력을 모조리 제갈량에게 주어서 북벌하도록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일부는 남겨서 수도를 지키고, 주, 현에 주둔해야 하고, 변방도 지켜야 한다. 그러나, 많은 사학자들의 분석에 따르면, 이번에 북벌한 제갈량에게는 또 하나의 목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바로 촉한 내부의 모순갈등을 해소하는 방편과 함께 병권을 완전히 장악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제갈량의 북상시 절대로 병력을 적게 데려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점에서 보면 10만이라는 설은 지나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족한 숫자로 보인다.

 

다음으로, 우리는 두 가지 글을 보자. 하나는 <<제갈량전>>에 인용된 <<한진춘추>>인데, 제갈량이 이 전투후에 "대군은 기산, 기곡에 있었고, 모두 적보다 많았다. 그런데도 적을 이기지 못하고 적에게 졌으니, 이 병은 병력이 작은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에게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최소한 기산+기곡의 병력은 장합+조인의 병력보다 많았다. 좋다.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조금 더 양보해서, 최소한 기산의 병력은 장합의 병력보다 많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이 점에 대하여는 아무도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장합의 병력은 얼마인가? <<자치통감>>의 기재에 따르면, "그때 병마 보병기병 5만을 이끌고, 우장군 장합에게 주어 이끌고 서쪽에서 제갈량을 막도록 했다" 장합은 5만을 데리고 왔다. 그렇다면, 제갈량 본대의 병력은 당연히 5만이상일 것이다. 가정의 패전후에 제갈량이 퇴각한 이유는 진격해서 차지할 곳이 없다는 것이지 병력이 적보다 약하다는 이유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당시 마속은 병력을 얼마나 데리고 있었는가? <<마속전>>의 기록에 따르면, "제갈량은 여러 사람의 의견을 물리치고 마속을 선발했다. 무리를 이끌고(統大衆) 앞으로 나가서, 위나라장수 장합과 가정에서 싸웠는데, 장합에게 패배했고, 병사들은 흩어졌다" 그냥, "통대중"이라고만 되어 있지 구체적으로 알마인지는 나와있지 않지만 분명히 그리 적지는 않을 것이다. 1만-2만정도는 그래도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계산해보면, 기곡에 있는 조운(趙雲)이 이끄는 의병(疑兵), 그리고 열유성(列柳城)의 고상(高翔)의 수비군까지 하면, 총병력은 10만가량이 된다고 보아서 크게 차이는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많은 분석글레서 10만이라는 설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인정되는 것이다.

 

다시 되돌아가서, 제갈량은 마속으로 하여금 무리를 이끌고 앞으로 나아가 가정에 주둔하여 지키게 하였는데, 당시의 병력으로 보아,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마속부대의 병력은 최소한 1-2만의 사이였다(만일 총병력이 10만이라면, 마속이 지휘하도록 준 병력이 2만을 넘어서지는 않을 것이다), 당연히 1만이든, 2만이든, 장합의 5만정예보병,기병과 비교하자면 너무나 적은 수이다. 그렇다면, 마속의 패배는 피할 수 없었다: 중과부적이었다.

 

그럼 다음 문제를 보자: 가정의 지형은 어떠했는가?

 

스타크래프트나 워크래프트를 해본 사람은 "수구(守口, 입구방어)"라는 말을 알 것이다. 즉, 좁은 입구를 점거하여, 적군이 진세를 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형우세를 이용하여 적군을 막고 섬멸하는 것이다. 다만, 가정이라는 곳은 전통의미상의 좁은 입구가 아니었다. 가정은 북으로 남산(남산은 가정의 남쪽이 아니라, 산맥의 방향이 그렇다는 것이다)이 있고, 청수하(淸水河)가 가까이 있다. 즉 상대적으로 평탄하고 개활적인 지세이다. 이런 토지에서 "수구"는 확실히 쉬운 일이 아니다. 요새를 쌓아서 포진하지 않는다. 다만, 그렇게 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살소(薩蘇)선생이 쓴 대작 <<마속의 가정>>이라는 글에 따르면, 장합은 마속보다 이틀 늦게 가정에 도착한다. 이것은 정사에 기록이 없다(혹은 필자가 찾아내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한가지는 분석해볼 수 있다. 제갈량은 1월부터 출병했다. 2월초에는 서현 일대에 도착했을 것이다. 동시에 조예도 장안으로 갔다. 그러므로, 장합의 부대와 마속의 부대는 거의 동시에 가정을 향하여 진격했을 것이다. 미성에서 가정까지는 약 500리이고, 서현에서 가정까지는 약 300리이다. 마속군은 보병이 위주이고, 장합군은 기병이 위주이다. 기산의 일선이 위급한 상황이므로, 용병술이 노련한 장합은 아마도 정예기병을 이용하여 빠르게 달려왔을 것이다. 그랬다면, 2일의 차이라는 설은 완전히 가능하다. 심지어 그보다 더 짧았을 수도 있다.(당초 조조가 유비를 추격할 때, 5천의 호표기가 하루밤낮에 300여리를 달렸다). 이틀의 시간은 가정에 전면적으로 장합의 정예부대를 막을 요새를 형성하는 것은 실로 너무나 짧다. 마속이 현재의 공병부대를 밤낮으로 재촉하여야 겨우 완성할 수 있을 정도일 것이다. 그러므로 마속의 실패는 또 하나의 요소가 있다: 시간부족

 

여기에 어떤 사람은 이견이 있을 수 있다. 촉한군은 하이테크에 강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노(弩)는 보병이 기병을 제압하는 가장 좋은 무기이다. 이 견해는 사실 간단하게 뒤집을 수 있다. 노는 직선공격무기이다. 잉글랜드의 장궁(長弓)과는 다르다. 후자는 포물선을 그리면서 쏘아서 집단공격이 가능하지만, 노는 반드시 정면에서 사격해야만 최고의 효과를 볼 수 있다. 그리고 노를 발사하는 속도가 그다지 빠르지 못하다. 여기에 노의 유효사거리는 50미터를 넘지 못한다. 그러므로 개활지에서, 만일 병력이 상대방보다 적다면, 노는 기병에 대하여 억제효과를 발휘하기 힘들다. 아마도 노병은 두번째 발사를 하기도 전에, 상대방의 기병이 이미 눈앞까지 닥쳐와 있을 것이다. 그후에는 바로 일방적인 도살이 뒤따른다.

 

병력부족, 준비시간부족, 마속은 실제로 개활지에서 정면으로 순식간에 다가운 장합의 부대를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어떡할 것인가? 이때 병법에 익숙한 마속은 분명히 <<손자병법>>의 군쟁편(軍爭編)을 생각해 냈을 것이다: "용병의 법은 고지의 구릉에 있는 적을 향하여 공격하지 말고, 언덕을 등진 군대를 공격하지 말고, 패배한척 도방가는 적을 추격하지 말고, 정예부대를 공격하지 말지어다(用兵之法, 高陵勿向, 背丘勿逆, 佯北勿從, 銳卒勿攻)"

 

높은 구릉을 점거하고, 언덕을 등지고 포진하는 것은 장합군에게 진퇴양난의 고민을 안길 것이다. 공격하자니 위를 향하여 공격해야 하고, 멈추자니 기세가 꺽이고, 그냥 지나가자니 포위될 수 있다. 더더구나 이번 행동의 최종목적은 견제이다. 만일 장합의 군대를 며칠만 묶어둘 수 있다면, 제갈량이 기산일대를 평정한 후, 후원권이 도착해서, 상하에서 협공하면 장합은 절대 승리를 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

 

다만, 상황은 마속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전투경험이 풍부한 장합은 시간이 급하다고 하여 마속의 군대를 못본척 하고 직접 통과하지도 않았고, 산아래에 군영을 차리고 대치하지도 않았다, 더더구나 병법에 위배되는 방식으로 고지를 향해 공격하지도 않았다. 그는 산위의 물길을 찾아서, 마속군의 물공급을 끊어버리고, 동시에 산아래의 몇군데 중요한 통로를 봉쇄해버렸다.

 

물...강회출신에, 항상 촉중에 거주하던 마속으로서는 한번도 물이 문제되리라고는 생각해보지도 않았었다. 다만, 이때 이곳에서는 서부의 건조한 곳에서는 물의 중요성이 다른 어느 요소보다 중요했다. 산을 오를 때 황급히 올라갔으므로, 마속의 군은 금방 물이 바닥났을 것이다(물은 사실 행군때 보급품의 하나이다. 마속의 군이 물을 조금도 안가지고 싸우러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장합은 물이 있는 곳에 늘어서서 진형을 펼쳤다. 다만 산위로 공격하지는 않았다. 그저 수주대토(守株待兎)할 뿐이었다. 마속군이 스스로 죽으러 찾아오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물을 잃은 마속은 원래 배수진을 펼칠 수도 있었다. 친히 화살과 돌을 무릎쓰고 부대를 이끌고 산아래로 뚫고 내려갈 수 있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선지 마속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마도 실제전투를 많이 해보지 않아서 마음 속으로 거리낌이 있었던지, 아니면 한번 밀고 나가봤지만, 손실이 너무 커서 포기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마속은 건곤일척의 승부를 겨뤄 죽을 각오로 싸우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물이 끊긴 후유증은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 나타나기 시작했다(정상적인 상황하에서라면 최소한 1일이상일 것이다. 서부의 건조한 기후를 고려하면 반나절이나 그보다 더 짧을 수도 있다). 그리고 갈수록 심해졌다. 마속은 여전히 방법이 없었다. 적을 막아내야 하므로, 철수하는 것은 임무실패를 의미한다. 그리하여 마속에게는 오로지 한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죽어라 싸우는 것이다. 아쉽게도 마속은 손책이 아니었다, 장료가 아니었다, 조인이 아니었다. 그가 망설이는 동안 시간은 흘렀다. 촉군의 사기와 체력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이와 동시에 제갈량의 후원군이 오기에는 아직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았다.

 

장합은 성공했다. 마속의 군은 철저히 와해된다. 멋진 용병의 법이다. "고릉물향"후의 몇구절은 바로, "위사유궐(圍師遺闕, 포위하였을 때는 도망갈 구멍을 남겨둬라)"이다. 장합은 모조리 죽여버리지 않았다. 마속에게 살 길을 한 군데 터준다. 다만 이 활로는 마속이 진정으로 살아나는 길이 아니었다. 귀대한지 얼마되지 않아, 마속은 제갈량의 칼아래 죽는다...

 

만일 단순히 병법으로 말한다면, 마속은 정말 잘못한 것이 없다. 고지를 점거하고, 대치를 이루었다. 완전히 약세인 병력을 이용하여 장합의 대군을 견제한 것이다. 그리고 고지는 "사지(死地)"가 아니다. "사지에 들어가서 삶을 구한다(置之死地而後生)"이라는 것은 그저 소설에서 아무렇게나 지어낸 말이다. 그리고 정사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마속이 당시에 직면한 상황은 산으로 올라가지 않으면 아마도 금방 장합의 강력한 기병부대에 궤멸되었을 것이다. 만일 마속이 정말 잘못한 부분이 있다면, 내 생각에 가장 큰 원인은, 아마도 마속이 평지에 병영을 둘 것인지, 산에 의지하여 포진할 것인지를 놓고 망설였다는 것일 것이다.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던 마속은 결국 산꼭대기에 주둔하는 부대에 충분한 물을 준비할 시간도 잃어버리고 만다. 그리하여, 물이 없는 위기가 너무나 빨리 닥쳤다. 그리고 장합군의 예기를 꺽기도 전에, 자신의 부대가 먼저 기세를 잃었다.

 

이 전투에서 패배한 결과, 마속은 어떤 의미에서는 속죄양이 되었다. 왜냐하면 가정에서 실패한 동시에, 열류성의 고상도 곽준에게 궤멸당했고, 기곡 일선의 조운도 이미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곡내로 되돌아오면서, 한중의 문호를 활짝열어두는 것을 피하려고, 조운은 부득이 잔도를 불태워서 위군이 한중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았다. 여러 위기속에서 제갈량은 부득이 이번 북벌의 전과를 포기하고, 초췌한 몰골로 전군에 퇴각명령을 내린다. 비록 전후에 많은 사람들이 징계받고 강등당했지만, 처결된 것은 마속과 그의 부하인 몇몇 장수들 뿐이었다. 제갈량은 전체북벌의 실패를 마속 한 사람의 책임으로 몰아갔고, 가정의 실패는 거의 피하기 힘든 것이었다는 점은 전혀 고려해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