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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남북조)

왕숙(王肅): 유가경전을 위조한 깡패학자

by 중은우시 2009. 3. 3.

글: 유가리(劉珂利)

 

사람들은 이규(李逵)와 이귀(李鬼)를 구분하고, 진짜 가짜 당승(唐僧)도 구분한다. 유학경전의 권위적인 지위도 잘 안다. 그러나 위진(魏晋)시대에 일찌기 가짜 유가경전이 나타났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김용(金庸)이 자신을 사칭한 무협소설을 보고 화가나서 그의 블로그에 이렇게 쓴 적이 있다: "내가 비록 재주가 없고, 글을 잘 쓰지는 못하지만, 이 정도로 엉망으로 쓰지는 않는다." 유감스럽게도, 공자(孔子)는 블로그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블로그에서 가짜라고 일축해버릴 수가 없었다. 비록 그가 그의 이름을 사칭한 책을 세상에 내놓더라도.

 

한무제가 "파출백가, 독존유술(罷黜百家, 獨尊儒術)"을 확립한 이래로, 학자들은 대부분 유학의 큰틀내에서 경쟁을 했다. 동한 말기, 왕숙(王肅)이라는 문제아가 등장한다. 그는 명문세가에서 태어났고, 부친인 왕랑(王郞)은 당시의 학술원회원급의 학자였다. 그 본인도 삼국시대 위나라의 저명한 경학의 일대종사였다. 왕숙은 도가의 사상과 유가의 사상을 결합시켜서, 독특한 경지의 학술사상을 만들어냈다. 고대문인들은 대부분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좋아하였는데, 왕숙도 학문에서 성취를 거둔 후에 사회로 나아가 자신의 정치적 포부를 실현하고자 했다.

 

행운이었던 점이라면, 왕숙의 딸이 당시의 권력자인 사마소(司馬昭)에게 시집을 갔다는 점이다. 왕학(王學, 왕숙의 학설)은 이러한 관계를 활용하여 당연스럽게 당시 후기지수의 신분으로 관학(官學)의 지위를 얻는다. 그리하여, 당시 명성이 높았던 정학(鄭學, 정현의 학설)과 맞서게 된다. 정학이 유명한 것은 당연히 그 나름대로의 독특한 점과 깊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왕학이라는 권력자와 관계가 범상치 않은 학문에도 밀려서 추풍낙엽처럼 몰락할 리는 없다. 그래서 쌍방은 대결자세를 갖추고, 자고이래로 멈춘 적이 없는 학술논쟁을 벌이게 된다.

 

사실상, 왕학은 확실히 정학의 일부 부족한 점을 메워주는 측면이 있었다. 예를 들어, 정학에서 해석할 수 없는 이슈의 하나는 "천의(天意)"였다. 이에 대하여 왕학은 비교적 실용적인 해결방법을 내놓았다. 문제는 왕숙은 너무 지나쳤다는 점이다. 이는 마치 너 정학이 동쪽을 가리키면, 나 왕학은 죽어라 서쪽을 가리키겠다. 내가 뚱뚱한지 아닌지는 관계없지만, 너는 뚱뚱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과 같았다.

 

기나긴 학술생애에서, 왕숙은 <<상서>>, <<시경>>, <<논어>>, <<좌전>>등 경전에 주(註)를 달았다. 이들 고전작품에 대하여 그는 아주 잘 알았고, 이들 고전경전을 완벽하게 소화하엿으므로, 어느 날 하나의 영감이 떠오른다: 공자의 말을 위조하면 어떨까? 그렇게 해서 정학과 말싸움할 때 써먹으면 어떨까? 그래서, 한번 시작한 것 끝을 보자는 심정으로 왕숙은 그의 아주 창조적인 위조사업을 시작한다.

 

그는 먼저 <<공자가어(孔子家語)>>를 위조한다. 이어서, <<공총자(孔叢子)>>를 위조한다. 전자는 실전된 고서(古書)이고, 후자는 왕숙이 <<좌전>. <<국어>>, <<순자>>, <<예기>>등의 책의 내용을 이것저것 긁어모아서(특히 정학과 견해가 다른 부분들만 골라서), 재결합하여 자기의 사상에 따라 편집해서 이루었다. 예를 들어, 원문이 "선위형벌, 즉성인자래(善爲刑罰, 則聖人自來)"라고 되어 있는 것을 그는 "崇道貴德, 則聖人自來(숭도귀덕, 칙성인자래)"라고 바꾸었다. 이렇게 자신의 사상을 억지로 공자의 말 속에 쑤셔넣었다.

 

이 두 권의 책은 정학과 논쟁을 벌일 때 사용하기 위하여 만든 맞춤작품이었다. 왕숙은 또 한 권의 책을 쓴다. <<성증론(聖證論)>>이라는 책이다. 바로 이 책이 최종목적이었던 것이다. 이 책에는 대량의 앞의 두 권의 내용과 관점이 인용된다. 이를 통하여 정현의 학설을 비판한다. 이 방법은 절묘했다. 왕숙은 득의양양하게 자신이 위조한 공자의 책을 갖고 정현의 학설을 비판했다: "보라, 나만 그렇게 얘기한 것이 아니지 않느냐. 공자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지 않느냐?"

 

이뿐만이 아니었다. 왕숙은 <<공자가어>>에서 공자가 일찌기 노자를 스승으로 모시고 함께 열국을 주유하며 현지를 고찰하고 학습한 적이 있다고 날조했다. 이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이런 생각을 갖게 한다: 노자가 공자를 이끌어주었고, 노자의 가르침하에서, 공자는 마침내 자신의 유가사상을 완성한다. 그리고 학문을 완성한 후에 노나라로 돌아가고, 명성을 크게 떨치고, 제자가 구름처럼 몰려든다. 나아가 이런 내용도 말한다: 유가사상의 창시자인 공자는 도가사상의 창시자인 노자를 승계하였다. 이렇게 하여 왕숙은 그의 왕학, 즉 도가사상을 유가사상에 주입하기 위한 이론적 근거를 마련한 것이다.

 

왕숙은 반평생을 자신의 학문분야에서 깊이있게 연구하는데 바치지 않고, 주요한 정력을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다른 사람을 짓밟는데 쏟았다. 비록 위진시기의 사상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지만, 왕숙의 학술은 정도에서 너무나 많이 벗어났다. 그리고 후세에 전해지는 주옥같은 작품도 남기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그의 학문은 후대에 대가 끊기게 되고, 그저 웃음거리와 두권의 위작을 남겼을 뿐이다. 그때 왕숙이 길을 열고나서, 무수한 학자문인들이 그 뒤를 따랐고, 위진시대에는 가짜서적이 판을 치게 된다. 현대에 이르러, 또 다시 무수한 새로운 왕숙들이 나타나서 학문영역에서 표절, 위조를 하는 것이 끊이지 않는다. 심지어 일종의 새로운 산업까지 나타난다. 가짜학문잡아내기(學術打假). 이 업종에서 일하는 사람이 방주자 한 사람이 아니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