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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남북조)

풍태후(馮太后)와 독고황후(獨孤皇后): 선비혈통의 황후들

by 중은우시 2009. 4. 28.

글: 문재봉(文裁縫)

 

중국역사상 북위(北魏)는 중화민족의 발전에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는 왕조이다. 북위의 역사를 살펴보면, 선비(鮮卑)혈통을 지닌 한 여인이 북위의 굴기에 있어서 진정한 최대공신임을 알 수 있다. 그녀가 바로 북위왕조의 풍태후이다.

 

풍태후는 원래 한족(漢族)이다. 할아버지인 풍굉(馮宏)은 북연(北燕)의 마지막 황제이다. 북연은 북위의 태무제(太武帝) 탁발도(拓跋燾)에게 멸망당한 후, 풍굉은 고구려도 도망치는데, 고구려의 국왕이 그를 죽여버린다. 그녀의 부친인 풍랑(馮朗)은 북위에 귀순하여, 서역군공(西域郡公)에 봉해지며, 진주(秦州)와 옹주(雍州)의 자사(刺史)를 지낸다. 나중에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피살된다. 그녀의 부친이 죄인이었으므로 풍태후는 5살때 붙잡혀 북위의 궁중에 들어간다.

 

452년, 문성제(文成帝)가 즉위한 후, 14살된 풍씨는 귀인(貴人)에 봉해진다. 18살에는 황후에 오른다. 같은 해 2살된 문성제의 아들 탁발홍(拓跋弘)은 황태자가 된다. 북위황실은 잔인한 규정이 하나 있었다. 황자가 태자에 오르면 그 생모는 반드시 죽여버린다는 것이다. 태자가 나이어린 것을 기화로 생모와 외척이 정치에 간여하거나 황위를 찬탈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입자살모(立子殺母)"의 규정에 따라, 척발홍의 생모인 이귀인(李貴人)은 죽임을 당한다. 풍황후는 척발홍을 부양하며 태자를 친아들처럼 키웠다.

 

문성제가 죽은 후, 헌문제(獻文帝) 탁발홍이 황위에 오르는데, 나이가 겨우 12살이었다. 풍황후는 황태후가 되고, 승상인 을혼(乙渾)이 조정을 총괄한다. 을혼은 황위를 찬탈하고자 도모하다가, 풍태후의 계책에 말려 체포되고 죽임을 당한다. 이후, 조정은 풍태후 1인이 장악한다. 헌문제가 점차 성장하면서, 모자간의 갈등도 갈수록 커졌다. 471년, 18살된 헌문제는 강압에 못이겨 5살된 아들 탁발굉(拓跋宏, 즉 孝文帝)에게 황위를 선양하고 자신은 태상황이 된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병사를 이끌고 남북으로 전장터를 누볐다. 이는 풍태후에게 위협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헌문제는 풍태후의 남총(男寵) 이혁(李奕)을 죽이기까지 했다. 그리하여 풍태후는 476년, 나이 겨우 23살인 헌문제를 독살한다.

 

헌문제가 죽은 후에 풍태후는 태황태후의 신분으로 다시 조정을 장악한다. 그녀는 개혁사상을 지닌 인물들을 기용하고, 일련의 개혁을 추진한다. 반록제(班祿制)를 시행하고, 관리를 정돈하며, 도량형을 통일하고, 삼장제(三長制), 균전제(均田制)를 시행한다. 풍태후의 개혁조치는 선비족의 낙후한 국면을 완전히 뒤바꿔놓았다. 나중에 효문제의 개혁에 기초를 닦는다. 그리고 효문제에게도 큰 영향을 끼친다. 이 점만 보더라도, 풍태후는 중국역사상 가장 대단한 여성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선비족정권에 한족황후가 존재했을 뿐아니라, 이후 한족정권에서도 선비족의 황후가 존재했다.

 

581년, 북주의 승상 양견(楊堅)은 주정제(周靜帝)를 폐위시키고, 선비족 북주왕조를 찬탈하여 수(隋)왕조를 건립한다. 그러므로 수왕조는 실질적으로 선비족국가의 기초위에서 건립된 것이다. 양견이 북주에서 찬탈하여 수나라를 건립하였으므로, 선비족 북주의 통치집단은 기본적으로 그대로 남아있게 된다. 수나라조정에는 선비족 관리가 수두룩했고, 수문제의 독고황후도 선비족이다. 그러므로, 수나라의 국가정권의 구성과 민족구성을 보면, 선비족의 비중이 아주 높았다. 민족성분으로 말하자면, 수나라는 선비족과 한족이 공동으로 창조한 위대한 왕조이다.

 

독고황후의 이름은 독고가라(獨孤伽羅)이다. 북주의 대사마(大司馬) 독고신(獨孤信)의 딸이다. 독고씨는 14살때 양견에게 시집가는데, 그때 양견은 평생 첩을 두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양견은 이렇게 맹세한다: "다른 여자와의 사이에 아이를 낳지 않겠다" 독고씨는 글을 알고 역사를 알았다. 스스로 겸손하면서 공경하고 효도를 다하면서, 양견을 적극 도왔다. 581년, 양견이 황제가 되고 수나라를 건립하여 수문제가 된다. 독고씨는 황후가 되고, 장남 양용(楊勇)은 황태자가 된다.

 

수문제는 중국역사상 세번째로 중국을 통일한 황제이다. 세계에 영향을 준 100인에서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는 독고씨와 큰 관계가 있다. 일찌기 양견이 북주에서 관리로 있을 때, 주선제는 여러번 그를 죽여버리려고 하였따. 모두 독고씨가 그를 도와주어 겁난을 피할 수 있었다. 나중에 황위찬탈도 독고씨가 내놓은 아이디어였다. 독고황후는 자신의 남편으로 하여금 첩을 들이지 못하도록 하였을 뿐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첩을 들이는 것도 막았다. 그녀는 매번 조정의 선비나 왕들 중에서 첩을 두어 자식을 낳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수문제에게 그를 내치도록 권했고, 중용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수문제가 조회에 나갈 때면 독고황후도 같은 연(輦)을 타고 갔다. 조회가 끝나고 돌아올 때면 역시 같은 연을 타고 침궁으로 돌아왓다. 수문제를 가까이서 꼭 지켜보았고, 그가 다른 여인과 접촉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독고황후는 근검했고, 사치하지 않았다. 유주총관 음수(陰壽)가 일찌기 황후에게 주보를 한 갑 바친 적이 있었는데, 황후는 그 주보를 금전으로 바꾼 후에 변방의 장병들에게 보내어 주었따. 독고황후는 외척에게도 엄격했다. 그녀의 사촌동생인 최장인(崔長仁)이 부녀를 간음하여 붙잡히게 되었다. 수문제는 황후의 체면을 보아서, 원래는 죄를 사해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황후는 사사로운 정은 돌보지 않고 최장인을 사형에 처하게 한다. 궁중의 상하가 모두 그녀를 존경했고, 그녀를 수문제와 함께 "이성(二聖)"으로 받들었다.

 

중국인들이 자부심을 가지고 자랑스러워하는 당나라는 실제로 역시 선비족과 한족이 공동으로 창조한 또 하나의 위대한 왕조이다. 독고황후의 가족은 그녀를 포함하여 3명의 황후와 1명의 황태후를 배출하는데, 그녀의 언니는 북주 주명제(周明帝)의 황후이고, 그녀의 큰 딸은 북주 주선제(周宣帝)의 황후이다. 그녀의 자매중에는 당고조 이연(李淵)의 생모도 있다. 그녀의 선비가족은 성격이 강인하고 세력이 강대해서 북주, 수, 당의 3개 왕조에 큰 영향을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