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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남북조)

양무제(梁武帝)와 아들들 (II)

by 중은우시 2008. 6. 21.

양무제는 아들을 너무 닉애(溺愛)하였다. 사실 그는 전체 사대부를 닉애하였다. 그러나, 일반 백성들에게는 가혹했다. 당시에 어느 노인은 양무제가 놀러나가는 가마를 막고 상소를 올려, 황제의 통치방식을 바꿀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후경(侯景)의 난도 양무제의 종용으로 인하여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후경이 막 강을 건넜을 때는 십여명이 7,8개의 무기를 들고서 한 작은 성을 점령한 것이다. 그리고 그 곳에서 병마를 모았는데도, 황제는 못들은척 못본척 한다. 생각해보라, 적국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장수가 투항해 와서, 자기의 성을 점령하고 병마를 모으는데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니, 후경이 야심을 가지는 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후경에 대하여는 사람들이 잘 알고 있다.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이유는 그가 이후 3년간의 전란을 야기시켰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강남의 인민들에게 유례없는 고통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경이 겨우 800명의 잔병을 이끌고 의거를 일으키고, 장강을 건너서 곧바로 달려와 건강을 습격하였고, 겨우 7개월만에 태성을 무너뜨리고 양나라를 끝장낸다. 이러한 놀라운 전과는 비록 양무제 소연(蕭衍)의 우매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지만, 후경의 전술이 뛰어나고, 판단이 정확하며, 심기가 뛰어나고, 전략을 잘 운용하는 지휘재능이 있는 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후경에 대하여 우리는 그가 비열한 자로만 알고 있지만, 그의 군사적인 재능은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후경의 난때, 상동왕 소강은 형주자사로 형,옹,상등 9주의 군사도독이었다. 즉 장강중류를 차지하고 있었다. 후경이 태성을 포위했을 때, 소강은 상,옹,강,영등의 병사를 보내어 지원했다. 그러나 자신은 상징적으로 장남 소방등으로 하여금 군대를 이끌고 가게 했을 뿐이다. 나중에 여론의 압력으로, 어쩔 수 없이 병력 3만을 데리고 동쪽으로 간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후경이 태성을 포위한지 4개월이나 지난 후였다. 비록 이러했지만 여전히 허장성세였다. 실제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양나라와 후경이 잠시 맹약을 맺은 후 원래 태성으로 들어갈 생각이 없던 각로의 지원군은 속속 퇴각한다. 이 동안 소강은 수중의 권력을 이용하여 사방의 각진을 공격해서 자기의 세력을 확장한다.

 

소강의 세력은 우선 서쪽으로 넓혀간다. 당시 그의 서쪽에는 그의 당질인 신주자사(호북파동) 계양왕 소조의 세력이 있었다. 소조는 일찌기 소강의 지휘를 받아 후경을 토벌하러 간 적이 있고, 후경과 양나라가 화의한 후 군대를 되돌렸던 것이며, 잠시 강릉(호븍)에 머물고 있었다. 이때, 상주자사(호남장사)인 장찬이 소조와 상주자사 하동왕 소예(蕭譽, 소명태자 소통의 둘째아들), 옹주자사 소찰(蕭, 소예의 동생)간에 갈등이 있었다. 그리하여 아직 강릉으로 돌아가지 아니한 소강에게 편지를 보낸다. 소강은 원래 소조등에 대하여 의심을 하고 있었으므로 가장 빠른 속도로 강릉으로 돌아가며, 강릉으로 돌아가자마자 소조를 죽인다. 이어서 소예와의 전쟁을 벌인다.

 

처음에 소강은 구주도독의 신분으로 군대를 이끌고 후경을 치러갈 때, 먼저 사람을 상주로 보내어 소예의 의견을 듣는다. 소예에게 원수의 지위를 양보할테니 형주의 병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토벌을 나서자는 것이었다. 소예는 자신이 막 상주에 와서, 할일이 많다고 생각해서, 병사를 이끌고 싸우고자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거절한다. 오래지 않아 소강이 다시 사람을 보내온다. 자신이 병사를 이끌고 토벌할 테니 상주에서 일부 병력과 군량미를 내라는 것이었다. 이것도 소예는 거절한다. 이와 동시에 소강은 사람을 옹주에 보내어 소찬에게도 일부 병사를 내서 동쪽으로 토벌하러가자고 한다. 소찬도 서위를 방어해야 한다는 핑계를 대며 출병하지 않는다. 소강은 명을 내려도 듣지 않자, 두 사람에게 불만이 커지게 된다. 소조를 죽인 후에 상.옹 두 주로 병사를 움직인다.

 

태청3년(549년) 6월, 소강은 어린 아들 소방구(蕭方矩)를 상주자사로 임명하여 소예를 대체한다. 그리고 장남 소방등(蕭方等)으로 하여금 정예병사 2만을 이끌고 호송하게 한다. 소방등의 군대가 마계(지금의 호남 임상)에 이르렀을 때, 소예가 이끄는 7천의 정예병사와 맞닥뜨린다. 쌍방은 교전을 벌이나 형주병사들이 대패하고, 소방등은 물에 빠져 죽는다. 소방구는 잔여병사를 이끌고 강릉으로 되돌아온다. 소강은 다시 경릉태수 왕승변, 신임 신주자사 포천을 보내어 상주를 공격하게 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당일로 떠나게 한다. 왕승변은 며칠만 기간을 달라고 하는데, 소강은 그가 마음 속에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칼을 뽑아 목을 치려고 한다. 좌우대신들이 말리는 바람에 왕승변은 죽음을 겨우 면한다. 포천은 놀라서 얼른 병사를 데리고 떠난다.

 

포천능 명을 받아 병사를 데리고 남하하는데, 진군속도가 빨랐고, 연이어 승리를 거두었다. 금방 장사성에 이른다. 소예는 사정이 위급한 것을 보자, 사람을 보내어 소찰에게 도와달라고 한다. 소찰은 소식을 듣자 바로 보병 2만과 기병 2천으로 강릉을 진공한다. 강릉은 소강의 근거지이다. 소찰이 공격해온다는 말을 듣고, 소강은 크게 놀라서, 즉시 병사를 끌어모아 성을 지킨다. 소찰은 비록 병력은 적지 않았지만 연일 큰 비가 오는데다, 평지에도 물이 3,4척의 깊이가 되어, 군대가 진군하기 매우 어려웠다. 동시에 소강측에서는 소찰의 부하장수에 대한 항복권유활동을 벌이면서 다른 한편으로 양양을 기습했다. 소찰은 후방이 위급해지자 할 수 없이 군대를 이끌고 퇴각한다.

 

소찰이 퇴각한 후, 소강은 단기간내에는 다시 강릉으로 쳐들어올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왕승변을 포천을 대신하여 도독으로 보내어, 상주에 대한 공격을 포강화한다. 소예는 장기간 포위된 데다가, 소찰의 지원도 받지 못하여, 아주 형세가 위험했다. 왕승변은 군대를 이끌고 공격을 강화하여, 장사성은 금방 무너진다. 소예도 전란중에 사망하고, 수급은 강릉으로 보내어진다. 이렇게 하여 소조를 이어 소강은 다시 그와 황위를 다툴 인물을 하나 더 제거했다.

 

소찰은 형인 소예를 도와주다가 소강과의 갈등이 격화되었다. 그는 소강이 상주를 점령한 후 그를 제거하려고 할까봐 걱정했다. 그리하여 서위(西魏)에 투항해버린다. 부인과 장남을 인질로 보내고 지원을 요청한다. 서위의 승상인 우문태(宇文泰)는 이것이 확장의 좋은 기회라고 여기고, 소찰의 요구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대장 양충(수문제 양견의 부친)에게 군대를 딸려보내어 지원해준다. 양충이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는데, 파죽지세로 의양(하남 신양), 수군(호북 수현), 안륙(호북 운몽)등지를 점령했다. 그리하여 한수의 동쪽지방은 서위의 손에 들어간다. 일찌기 태성원군대도독을 맡았던유중례도 안륙을 지원하다가 양충에게 붙잡혀 죽임을 당한다. 이어 서위는 소찰을 양왕(梁王)에 임명하고, 소찰은 서위의 조정에 입조한다.

 

양충은 승리의 기회를 틈타 석성(호북 종상)으로 진공하고 강릉으로 진공할 준비를 한다. 대군이 밀려오자 소강은 어쩔 수 없이 서위에 화평을 구한다. 그리하여 어린아들 소방략(蕭方略)을 장안에 인질로 보낸다. 이리하여 소강과 소찰의 갈등은 잠시 쌍방이 서위에 의탁함으로써 일단락지어지게 된다.

 

소강이 상,옹 2주에 대한 전쟁을 일으킬 때, 그의 여섯째인 소릉왕 소륜도 세력을 확장했다. 후경이 광릉을 점령한 후,소륜은 회계에서 강하(호북 무창)으로 도망친다. 영주자사 남강왕 소략(蕭略, 양무제의 조카)은 소륜을 가황월,도독중외제군사로 추대하고, 제도에 따라 백관을 둔다. 그때는 마침 소강이 왕승변을 보내어 포천을 대체하고 소예를 공격할 때였다. 소륜은 소강에게 서신을 보낸다. 대적이 앞에 있고 원수를 갚지 못했으니, 형제조카간에는 이전의 원한을 접고, 함께 적에 대항하자는 내용이었다. 만일 계속하여 종실내에서 내부싸움을 벌인다면 국가가 멸망할 위험이 있었다. 그러나, 소륜이 좋은 뜻에서 한 제안을 소강은 못들은 척 한다. 소강은 여섯째 소륜이 대량으로 무기를 준비하는 것을 보고는 자기와 황제자리를 다투려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하여 소륜에 대하여도 전쟁을 일으킨다. 대보원년(550년) 8월, 소강은 왕승변, 포천등으로 하여금 수군을 이끌고 동하(東下)하여, 말로는 후경을 토벌하고 소륜을 강릉으로 모셔오겠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영주(호북 악성)를 습격한다. 대군이 밀려오자 소륜은 병사를 불러모은 후, 눈물을 흘리면서 "내가 무기를 준비한 것은 원래 다른 뜻이 없고, 그저 국가를 위하여 힘을 다하고, 도적을 토벌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상동왕(소강)은 그런데 나의 이러한 목적이 황제위를 다투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여 사람을 보내어 나를 공격하니, 일편단심으로 나라에 보답할 길이 없다" 그는 소강과 싸우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영주에서 물러나 여남(하남 식현) 일대로 물러난다.  대보2년(551년) 2월, 서위의 대장군 양충은 여남성을 격파하고, 소륜은 피살된다. 서위는 소륜을 죽였는데, 실제로는 소강을 위하여 또 다른 경쟁상대를 없애준 것이다.

 

소강을 소륜을 쫓아내고, 영주를 점령한 후, 공격의 창끝을 장상상류에 있던 여덟째 익주자사 무릉왕 소기를 향하고자 한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후경의 대장인 임약, 송자선등의 병력이 강주, 영주로 밀려온다. 후경본인도 병력을 이끌고 서쪽으로 올라왔다. "20만이라고 칭하면서 깃발이 천리에 달하였다. 강우(江右)에 수군이 이렇게 많은 적은 없었다" 이런 상황하에서 소강은 할 수 없이 후경을 상대하는데 전력을 기울여야 했다.

 

대보원년(550년) 9월, 임약등은 연이어 서양(호북 황강 동남쪽), 무창(호북 악성)등지를 점령한다. 기세가 대단했다. 소강은 진주자사 서문성등을 보내어 막아본다. 11월 서문성은 패기(호북 황강 부근)에서 임약을 대파하고 승리를 틈타 대거구(호북 황강의 북쪽)에 주둔한다. 나중에, 후경은 송자선으로 하여금 군대 2만을 이끌고 임약을 도와주게 한다. 소강도 호군장군 윤열등으로 하여금 2만의 군대를 이끌고 서문성의 지휘를 받도록 한다. 다음 해 3월, 서문성은 무창을 회복하고 노주(호북 악성의 서쪽)로 진군한다. 임약은 후경에게 위급함을 알리고, 후경은 왕위로 하여금 건강에 남아서 지키게 하고, 자기는 황태자 소대기(蕭大器)를 인질로 데리고, 대군을 이끌고 강의 서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하여 서문성과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한다. 후경은 영주가 비었다는 말을 듣고, 송자선, 임약으로 하여금 정예기병 400인을 이끌고 기습하게 하여, 일거에 영주성을 점령한다. 영주자사 소방제(蕭方諸)와 주행사 포천등은 모조리 포로로 붙잡힌다. 서문성은 이 소식을 들은 후 싸워보지도 않고 궤멸한다. 서문성 본인도 낭패하여 강릉으로 도망친다.

 

4월, 소강은 왕승변을 대도독으로 하여, 파주자사 순우량, 정주자사 두감, 의주자사 왕림등을 이끌고 후경을 치게 한다. 파릉(호남 악양)에 군대를 주둔시킨다. 파릉성은 비록 적지만, 견고하여, 왕승변등은 이일대로(以逸待勞)의 전술로 기다린다. 그리하여, 후경은 비록 매일 공격하였지만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오래지 않아, 소강이 무맹장군 호승우와 신주자사 사육법을 보내어 지원한다. 후경은 대장 임약으로 하여금 5천을 이끌고 막게 한다. 양군은 적정(호남 화용 서남)에서 만난다. 호승우는 임약을 공격하고, 임약은 패하여 포로로 잡힌다. 후경은 이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란다. 그리하여 군영을 불태우고 도망친다. 도중에 예주자사 사순랑의 습격을 받아서 낭패하여 건강으로 도망친다.

 

이번 전투는 후경이 발전하다가 쇠퇴하는 전환점이 된다.

 

6월, 소강은 왕승변은 정동장군, 상서령으로 삼아, 호승우와 함께 병사를 이끌고 동으로 내려가게 한다. 왕승변은 영주를 함락시키고, 후경의 대장 송자선, 정화를 생포하고, 강릉으로 데려와 죽인다. 7월, 왕승변은 동으로 내려가 분성(강서 구강)으로 가서 소강의 부하인 강주자사 진패선이 이끄는 3만명과 만나고, 군량을 보충하니 기세가 대단했다. 소강은 그로 하여금 잠시 그 곳에 머무르게 한 후, 여러 병사들이 집결하기를 기다렸다.

 

후경은 파릉에서 패배하여 건강으로 돌아온 후, 대세가 이미 기울었다고 여기고, 황제노릇이나 해보려고 한다. 대보2년(551년) 8월, 후경은 간문제 소강(蕭綱)을 폐위시키고, 예장왕 소동(蕭東, 소명태자 소통의 손자)을 황제로 세운다. 10월, 후경은 왕위등을 보내어 생일축하의 명목으로 소강을 연회에 초청한다. 그가 취하기를 기다려, 사람을 시켜 백근 무게의 흙포대로 소강의 몸을 누르게 하여 질식사하게 한다. 이어서, 소강의 몇 아들도 후경에게 죽임을 당한다. 11월, 후경은 소동을 폐위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며 연호를 태시(太始)라 하고 국호를 한(漢)이라 한다. 동시에 소동과 그의 두 동생을 밀실에 가두어둔다.

 

이 후경은 일개 무부(武夫)였고, 3년전에 수양에서 병사를 일으킬 때는 그저 원한을 풀겠다는 생각에서 였다. 그 자신도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그래서 예의법도를 전혀 몰라서, 여러가지 우스개거리를 제공한다. 왕위가 천자칠묘(天子七廟)를 세워야 한다고 하자, 후경은 "칠묘가 뭐냐?"고 묻는다. 왕위가, "천자는 7대조까지 제사를 지내므로, 칠묘라고 합니다"라고 하고, 후경에게 칠대조까지의 이름을 얘기해달라고 한다. 그러자, 후경은 "조상의 이름을 난 모른다. 내가 아는 건 아버지의 이름이 후표(侯標)라는 것뿐이다. 그도 이미 죽은지 여러해이고, 삭주(산서 삭현)에 묻었다. 천리멀리 있는데, 건강에서 지내는 제사를 어떻게 받을 수 있단 말인가" 여러 신하들은 그가 이렇게 말하자 몰래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왕위는 어쩔 수 없이 그냥 아무렇게나 이름을 적어 넣었다.

 

승성원년(552년) 정월, 소강은 왕승변등에게 계속 동진하라고 명령한다. 2월, 군대가 당양(강서 구강)을 출발하여, 전선이 수백리에 이어진다. 진패선은 갑사3천, 선박2천을 이끌고 남강(강서 감강)에서 장강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왕승변과 상락주 서쪽의 백모만에서 만나, 함께 후경을 토벌하기로 한다. 왕승변등은 무호(강서)에 이른다. 후경은 대장 후자감으로 하여금 고숙(남주, 안휘 당도)를 지키게 하여 왕승변의 군대를 막는다. 그는 사람을 보내어 호자감에게 말하기를 "형주군은 수전에 능하니, 그들과 물에서 싸우지 말아라. 작년에 임약이 패한 것도 바로 수전에서 패배했기 때문이다. 너는 강안에 병영을 만들고 방법을 강구하여 그들과 육전을 벌여라" 후자감은 명에 따라, 배를 버리고 강안으로 오른다. 그리고 병영에서 나오지 않는다. 왕승변은 무호에서 10여일을 머문다. 후경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한다. 그는 형주군대가 자기를 두려워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 후가감에게 수전을 준비하도록 한다.

 

3월 초9일, 왕승변은 고숙에 도착한다. 후자감은 작은 배 천척으로 왕승변의 수군을 공격한다. 왕승변은 매복이 있는 것을 보고는 작은 배는 뒤로 물리고, 큰 배를 강안에 정박시킨다. 후자감은 왕승변의 수군이 도망치려는 것으로 생각하고, 맹렬히 쫓는다. 왕승변은 튼 배로 이들의 퇴로를 막는다. 그리고는 북을 울리면서 앞으로 전진한다. 양군이 장강의 가운데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데, 결과는 후경의 군대가 패배한 것이다. 죽은 병사가 수천이었다. 후자감은 겨우 목숨만 건진다. 왕승변은 승리를 틈타 건강으로 진격하여 포위한다.

 

후경은 싸움에서 계속 패배하자 어쩔 수 없이 강동에서 얻은 두 아들을 가죽포대에 넣어 말안장에 매달고는 수백기의 기병과 함께 동쪽으로 도망친다. 왕승변은 부장 후신으로 하여금 정예병 5천으로 뒤쫓게 한다. 후신은 송강(강소 오현)에서 후경을 따라잡는다. 전투를 벌인 후에 후경의 부대는 겨우 수십명만 남았다. 후경은 어쩔 수 없이 두 아들은 강물속으로 밀어넣고,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

 

후경이 건강을 함락시킬 때, 양간의 딸을 첩으로 받아들였는데, 양간의 아들 양곤을 고직도독으로 삼고 아주 잘 대해주었었다. 이번에 도망치는데도 양곤이 그를 따르는 자의 하나였다. 그는 후경의 대세가 기운 것을 보고는 후경이 잠든 틈을 타서 배를 모는 자들에게 경구(강소 진강)로 가도록 한다. 경구에 도착했을 때 후경은 놀라서 깨었다. 양곤은 검을 뽑아들고, "여러 해동은 우리는 대왕을 위하여 적지 않은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런 지경에 처하게 되니 정말 가슴이 아픕니다. 이제, 우리가 당신의 수급을 가지고 가서 부귀를 얻고자 합니다"

 

후경은 그제서야 깨달았다. 급히 허리에서 칼을 뽑으려 하였으나, 칼집밖에 남지 않은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강에 몸을 던지고자 하였으나, 양곤의 손이 빨랐다. 칼을 휘두르니, 선혈이 그의 얼굴에 온통 튀었다.

 

양곤은 후경의 시신을 소금에 절여 건강으로 보낸다. 왕승변은 후경의 사지를 분해하게 하고, 그의 수급을 강릉으로 보낸다. 그리고 그의 두 손은 북제(北齊)로 보낸다. 동시에 머리없는 시신은 길거리에 던져서 사람들이 보도록 한다. 후경에 대한 민중의 원한은 컸으므로, 백성들은 그의 시신에 화를 풀었다. 하루도 지나지 않아, 그의 시신의 살은 사람들이 모두 먹어버렸다. 버려진 뼈는 사람들이 불에 태웠고, 이전에 그에게 화를 입은 자들은 그의 뼈를 갈아서 술과 함께 먹었다.

 

이렇게 되어, 3년여에 걸친 후경의 난이 마침내 평정되었다.

 

왕승변이 강릉을 막 출발할 때, 일찌기 소강에게 지시를 요청하였다: 후경의 난을 진압한 후에 간문제를 어떻게 대할 것이냐의 문제였다. 소강의 답변은 "육문내에 병사의 위엄을 떨치라"는 것이었다. 당시 태성은 6개의 성문이 있었는데, 소강이 이렇게 왕승변에게 답변한 것은 후경을 죽인 후 살륙을 하라는 것이고, 이는 간문제도 피살대상이라는 것이었다. 왕승변은 황제를 죽이는 일을 자기가 할 수는 없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을 시켜 후경을 공격하라고 답변했다. 소강은 그가 원치 않는 것을 보자, 선맹장군 주매신(朱買臣)에게 밀명을 내린다: "후경의 난이 평정되는 날이 바로 간문제등이 죽는 날이다" 건강을 수복했을 때, 간문제는 이미 후경에 의하여 죽임을 당했다. 소동의 형제 3명은 유폐된 곳에서 도망쳐 나왔다. 어떤 사람들이 그들의 자물쇠를 부숴버린 것이다. 두 동생은 기뻐서 "이제 죽음에서 벗어났다"고 말했다. 그러나 소동은 화인지 복인지 알 수 없다고 말한다. 나중에 그들은 주매신을 만나는데, 주매신은 그들을 배에 태우고, 배에서 연회를 베풀어 환대한다. 연회가 끝나기도 전에 그들은 강바닥에 가라앉았다.

 

이 해의 11월, 소강은 강릉에서 즉위한다. 즉 양원제(梁元帝)이다. 즉위전에 쓰던 태청 연호를 계속 썼다.

 

소강이 후경을 물리친 후, 다시 강소절강일대의 군소세력을 소멸시키고, 기본적으로 국면을 안정시킨다. 근심거리를 정리한 후, 소강은 다시 장강 상류의 여덟째 소기에게 창끝을 돌린다.

 

소기는 후경의 난 때, 관직이 도독익,량등13주제군사, 익주자사였다. 후경이 태성을 함락시킬 때, 소기는 장남 소원조(蕭圓照)에게 군대3만을 이끌고 동쪽으로 내려가게 한다. 그리고 그에게 상동왕 소강의 지휘를 받도록 명령한다. 소강은 소원조로 하여금 백제성(사천성 봉절현 동쪽 백제산상)에 주둔하게 한다. 양무제가 죽자, 소강은 사람을 성도에 보내어 부친의 사망소식을 소기에게 전한다. 소기는 군대를 이끌고 후경을 토벌하고자 하나, 소강이 다시 사람을 성도에 보내어, '촉지방은 움직이기는 쉬우나 안정시키니는 어려우니, 동생은 촉지방을 잘 안정시키고 있으면, 내가 알아서 멸망시키겠다" 그 외에 종이를 한장 붙였는데, 그곳에는 "땅이 손,유와 같으니, 각자 경계를 지킨다; 정은 노, 위와 같으니 서신은 항상 통한다" 이 말을 결국 위협이었다. 소기가 만일 남하하려고 하면, 그 동기가 무엇이든지간에 예전에 손권이 유비에 대항한 것처럼 싸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소강의 뜻을 소기는 잘 알아들었다. 형제 둘은 이렇게 결렬되었다.

 

당시, 소기의 둘째아들 소원정(蕭圓正)은 서양태수였다. 그는 후덕하고 잘 베풀어 많은 사람들이 그의 아래에 모였다. 병사가 1만에 달하였다. 소강은 그가 강성해지나, 대보2년(551년) 6월, 그를 평남장군으로 승진시킨다는 명목으로 그가 강릉에 답례인사하러 올 때 그를 붙잡았다. 그리고 그의 부대와 지역을 자기 것으로 했다. 소강이 소기의 아들을 붙잡은 것은 그들 형제의 갈등을 더욱 심화시켰다. 만일 후경이 강릉으로 밀고 오지 않았다면, 쌍방은 큰 전투를 벌였을 것이다. 소기는 양무제의 막내아들인데, 그도 항상 황제자리를 노렸다. 승성원년(552년) 4월, 그는 성도에서 황제에 오른다. 연호를 천정이라고 하고, 소원조를 황태자로 삼는다. 8월, 후경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수군을 데리고 동으로 내려가서, 강릉으로 진공할 준비를 한다(이때 후경은 이미 죽었다. 그러나, 아들 소원조가 숨겼으므로, 소기는 모르고 있었다)

 

소강은 그의 기세가 흉맹하자, 서위에 지원을 요청한다. 서위의 승상 우문태는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한수이동과 한중지역을 얻은 후에 소강은 다시 익주를 그에게 주었따. 그는 자연히 소씨형제의 내분을 틈타서 어부지리를 얻고자 했다. 그리하여 바로 소강의 요청을 응락한다.

 

승성2년(553년) 3월, 우문태는 대장군 위지형으로 하여금 갑사1만2천을 이끌고 익주로 진공하게 한다. 소기는 군대를 이끌고 파군(중경)으로 진격해 있었다. 위나라군대가 익주를 공격한다는 말을 듣고, 양주자사 초엄의 군대를 되돌려 구원하도록 한다. 동주자사 양건운의 조카인 양략은 양건운에게 소강, 소기 형제가 내분을 일으켜 싸우는 것을 보고, 더 이상 보좌하기 어려우니, "관중을 바치고 공명을 다 얻자"고 건의한다. 양건운은 그가 말하는 것이 맞다고 보고, 사람을 보내어 서위와 결탁한다. 이렇게 하여 위지형은 피한방울 묻히지 않고, 검각, 동주(사천면양)등지를 장악한다. 바로 성도에까지 밀려온다. 이때 성도의 수비군은 만명이 되지 않았다. 창고도 비어 있었다. 소기는 성도에 영풍후 소위로 하여금 지키게 하고 있었다. 위지형은 금방 성도를 포위하고 초엄의 구원군을 격퇴한다. 익주는 위기일발의 상태였다.

 

무릉왕 소기의 군대가 파동(사천 봉절 동쪽)에 이르렀을 때, 후경의 난이 이미 평정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소원조에게 왜 거짓말을 했는지 물었다. 소원조는 사실대로 말했다: "후경은 평정되었지만, 강릉은 남아있습니다" 당연히 소강을 없애야 한다는 것이었다. 소기는 갈등에 빠진다: 위나라군대가 빈틈을 타서 치고 들어오므로 당연히 뿌리를 보호해야 했다. 그러나 이미 황제로 칭했으니, 다른 사람의 아래로 다시 들어갈 수는 없다. 소강은 그보다 7개월 늦게 황제로 칭한다(소강은 전해 11월 강릉에서 황제를 칭하니 역사에서 양원제로 부른다). 두 황제가 병립할 수는 없다. 그는 그래도 소강을 먼저 쳐야 한다고 결정한다. 이때 익주가 위급했으므로 병사들은 모두 되돌아가고 싶어했다. 여러 장수는 속속 소기에게 그래도 근본을 지켜야 한다고 권했다. 소기는 의사결정을 한 후에는 아무의 말도 듣지 않았다.

 

승성2년(553년) 5월중순, 소기의 군대가 서릉협에 도달한다. 소강이 파견한 육법화의 군대와 서릉협 입구에서 전투를 시작한다.

 

소강은 속으로 정신이 없었다. 포로로 잡은 후경의 대장 임약, 사답인을 모두 석방하여, 자기를 위하여 일하게 한다. 그는 임약에게 "너의 죄는 주살하여야 하나, 나는 죽이지 않았다. 원래 오늘을 위한 것이다" 그는 이들 포로들이 이지기 못할까봐 걱정했다. 그리하여 소기에게 서신을 보내어 그가 촉으로 돌아가도록 허락하며, 촉을 다스리도록 허락한다는 내용으로 적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소기는 당연히 그 말을 따르지 않는다. 이 때, 상주에서 육납의 난이 일어나는데, 왕승변, 왕림등이 평정한다. 난을 평정한 군대가 연이어 북상했다. 그리하여 소강은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다시 소기에게 서신을 보낸다. 말투가 완전히 바뀌었다. 편지에서, 내가 형이고, 난을 평정하는데 공이 있으니, 황제는 내가 해야 한다. 우리 두 형제는 이제 '다시 볼 날이 없을 것이며', '기뻐할 날이 끝날 것이다'. 그 의미는 소기와 생사의 결전을 하겠다는 것이다. 소기는 여러번 패전하면서 스스로 안된다고 생각하여 강릉에 사람을 보내어 화의를 구한다. 소강은 이때 이미 우세를 점했으므로 당연히 허락하지 않는다.

 

소기는 성도에서 출발할 때, 황금일만근, 백은오만근을 휴대하고 있었다. 이는 전투에 용감한 병사에게 줄 것이라고 하였는데, 한번도 지급하지 않았다. 장사들은 그가 이렇게 하는 것을 보고는 아무도 힘을 쓰려고 하지 않았다. 7월, 소기의 군대가 왕승변, 임약등에게 패배하여 궤멸한다. 장사 8,9천명이 물에 빠져 죽는다. 소기는 퇴로가 차단된 것을 보고는 어쩔 수 없이 동으로 내려간다. 그리하여 다시 소강 수하의 유격장군 번맹의 추격을 받아 포위된다. 이때 소강은 이미 번맹에게 밀명을 내린다: 전쟁터에서 소기를 죽여버리고, 살아서 돌아가지 못하도록 하라.

 

몇번의 전투후에 번맹은 여러 명을 죽이고, 소기의 배에 오른다. 소기는 이때 아직도 요행히 명을 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수중의 금부대를 번맹에게 던지며 소리쳤다: "내가 이 금으로 너를 살테니, 일곱째 형을 만나게 해달라" 그러자 번맹은 웃으면서 말했다: "천자를 어찌 너같은 자가 쉽게 만날 수있겠는가? 족하를 죽인다고 하여 금덩이가 어디로 도망간답니까?" 그리고는 칼을 휘두르니, 소기는 바로 바닥에 쓰러졌고, 목숨을 잃었다.

 

소기가 죽은 후, 소위는 성도성을 위지형에게 바치고 항복한다. 익주는 손쉽게 서위에 먹혀버린다.

 

소강은 소기를 격파하자, 자신의 황제자리를 다툴 경쟁적수를 또 하나 제거한 것이 되었다. 그러나, 그가 서위에 지원을 청한 것은 늑대를 불러들인 꼴이었다. 그때, 양양의 소찰은 이미 서위의 괴뢰였다. 한수이동은 이미 서위가 점령하고 있었고, 익주를 획득하자, 서위는 강릉에 대한 호형의 전략적포위를 완성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이 점을 보고 있었다. 당연히 건강으로 천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양원제 소강의 군신은 대부분이 형주사람이었다. 그들은 고향을 떠나기 싫어했고, 건강으로 천도하고자 하지 않았다. 양원제 본인도 건강은 후경의 난 때 이미 대부분 파괴되었으므로 건강으로 가고싶어하지 않았따. 그는 왕승변을 태위, 차기대장군으로 임명하여 건강을 수비하도록 한다. 그리고 진패선을 사공에 임명하여 경구를 지키도록 한다. 이렇게 하여, 양원제는 스스로 태평무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소기를 멸망시킨 다음 해에, 서위의 대군은 강릉으로 밀려온다.

 

승성3년(554년) 3월, 북제와 서위의 사신이 모두 강릉으로 온다. 양원제는 북제의 사신에게 아주 우호적으로 대했다. 그러나, 서위의 사신에게는 무례하게 대했다. 그리고 서위에 점령한 땅을 돌려달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서위의 불만을 샀다. 서위는 막, 양주, 익주의 두 주를 얻었고, 나아가 양나라를 멸망시킬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양원제가 무례하니, 양나라를 멸망시킬 핑계를 잡은 셈이었다. 10월, 서위의 승상 우문태는 상산공 우근, 중산공 우문호, 대장군 양충으로 하여금 5만의 병력을 이끌고 강릉을 공격하게 한다. 이때, 양원제는 아직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 오래지 않아, 그는 서위가 진공한다는 정보를 얻는다. 그러나, 영군장군 호승우, 대부경 황라한등은 모두 양나라와 위나라는 "서로 관계가 좋고, 서로 통하니" 절대 서위가 아무 이유없이 공격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양원제는 이들의 말을 믿고, 수비준비를 게을리한다. 오래지 않아, 서위군이 번성에 도착한다. 소찰도 병력을 이끌고 회합한다. 사태는 더 이상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양원제는 급히 왕승변을 대도독, 형주자사로 부르나, 이미 늦었다.

 

11월, 서위군대가 한수를 넘어 연이어 무녕, 황화등의 중요도시를 함락시키고, 금방 강릉성에 도착한 우근은 정예기병을 보내어 먼저 강진을 점령한다. 이리하여 강남의 지원군이 강을 건널 수 없게 한다. 그 후에 포위망을 형성하고 성을 공격한다. 양나라의 장병은 죽어라 저항하였지만, 중과부적이었고, 결국 강릉은 함락된다.

 

성이 함락될 때, 양원제는 사인 고선보를 시켜, 강릉궁중에서 소장하고 있는 고금의 도서 14만권을 모두 불태우게 한다. 많은 진귀한 책들이 이때 불타버리고 없어진다. 중국문화는 다시 회복할 수 없는 손실을 입은 것이다. 양원제가 책에다 화풀이한 이유는, 바로 그의 생각으로 그를 망친 것이 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국가가의 패망은 책을 너무 많이 읽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책이 무슨 죄인가? 정말 멍청하기 그지 없는 짓이었다. 책을 불태울 때, 그는 검을 뽑아 기둥을 치면서, "문무의 도는 오늘 모두 불타 없어진다"고 하였다. 그의 의미는 주문왕과 주무왕으로부터 일맥상전되던 중국정통이 그의 실패로 끝장났다는 의미이다.

 

이때의 양원제는 여전히 순국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흰옷을 입고 흰말을 타고 동문으로 나와 항복한다. 나가기 전에 그는 다시 검을 꺼내서 문을 치며 탄식했다: "생각도 못했구나. 나 소세성(양원제의 이름은 강이고, 자는 世誠임)이 이런 지경에 처할 줄이야" 그러나 그는 목숨을 구하지 못했다. 갖은 모욕을 당한 후에, 위나라사람들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다. 그의 형을 집행한 것은 조카 소찰이 보내온 상서 부준이었다.

 

강릉이 함락된 후, 위나라군대는 강릉의 백성중에서 남녀 10만여명을 뽑아 노비로 삼아, 삼군에 나누어주고, 관중으로 돌아간다. 그중 어리고 약한 자는 모두 죽임을 당했고, 화를 면한 것은 겨우 300여가에 불과했다. 통치자의 다툼에서 패배하면, 곤란을 겪는 것은 항상 인민이다.

 

서위가 강릉을 함락시킨 후, 인민들을 모두 데려가고, 비어진 성은 서위의 괴뢰 소찰이 양나라의 도성으로 삼는다. 파괴되지 않은 옹주는 서위의 군현으로 흡수된다. 소찰은 도와주었지만, 오히려 옹주를 잃는다. 할 수 없이 비어있는 강릉으로 가게 된다. 이 비어있는 성도 역시 서위에서 파견되어 온 강릉총관이 그를 감시했다. 그는 회한에 젖어 얼마되지 않아 우울하게 죽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