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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남북조)

양무제(梁武帝)와 아들들 (I)

by 중은우시 2008. 6. 21.

 

양무제에게는 8명의 아들이 있었다. 순서대로 소통(蕭統), 소종(蕭綜), 소강(蕭綱), 소적(蕭績), 소속(蕭續), 소륜(蕭綸), 소강(蕭絳), 소기(蕭紀)이다.

 

이중 둘째아들 소종은 예장왕에 봉하는데, 그는 스스로 제동혼후 소보권(蕭寶卷)의 아들이라고 의심하여, 보통6년(525년)에 위(魏)나라로 도망치게 된다. 그리하여 작위가 박탈되고, 호적에서 삭제되며 성을 패(悖)로 바꾸게 된다. 그러나, 소종이 죽은 후 누군가 그의 묘를 파헤쳐서 영구를 양나라의 수도인 건강까지 가져오자, 양무제는 여전히 예에 맞추어 매장해주었고, 아들로 인정했다.

 

양무제는 즉위전에 처첩을 많이 두었지만, 자식은 아주 늦게 보았다. 양양에서 기병하던 때(제동혼후 영원3년, 502년)에 그의 나이는 이미 38세였는데, 비로소 장남 소통을 낳는다. 양무제가 즉위한 후에 소통을 황태자로 봉하니, 그가 바로 유명한 소명태자(昭明太子)이다.

 

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소통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였고, 3세때 효경, 논어를 읽었고, 5세때 오경을 다 읽었다고 한다. 10세때는 경의에 모두 통했다. 그는 책을 읽을 때 한번에 10줄씩 읽었으며 한번만 보면 외웠고, 시부사를 읊는 등 못하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책을 보물로 여겨 궁중에 주보비취를 보관하지 않고, 책 3만여권을 보관했다. 그는 관대하고 후덕하며 인자했으며 아주 속이 깊어 희노애락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 아랫사람을 처벌한 적도 없었다. 한번은 식사를 하는데, 요리에 벌레시체가 발견되었다. 주방장이 처벌을 받을까봐 부들부들 떨고 있는데, 그는 죽은 벌레를 몰래 접시 아래에 넣어두었다. 그가 14살때 양무제를 도와 조정의 업무를 처리하게 하자, 친히 정사를 보면서 전혀 지겨워하지 않았다. 매일 조회에 참석할 때 오고전에 전각밖에서 기다렸다. 그는 일처리에 조심스러웠고, 백성을 잘 보살폈다. 매번 큰 비나 눈이 내리면 반드시 좌우를 보내어 마을을 둘러보게 했고, 빈한한 백성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병약한 자는 치료해 주었다. 그리하여 민심을 많이 얻었다.

 

다만, 조야에서 현명하다고 이름난 태자는 다른 사람의 무고로 양무제의 의심을 받게 되고, 결국 우울하게 죽고 만다. 그 경위는 이렇다: 보통7년(526년) 태자 소통의 생모인 정귀빈이 병으로 죽는다. 소통을 사람을 보내어 묘지를 산다. 안장하려 할 때, 땅을 판 사람이 환관 유삼부를 찾아가서 그에게 300만에 자기 땅을 팔 수 있으면 그 중 100만을 주겠다고 한다. 유삼부는 돈에 눈이 멀어 양무제에게 밀고한다. 태자가 선택한 매장지는 황제에 불리한 곳이며, 누구누구의 땅은 황제에게 아무런 해가 없으니, 정귀빈을 매장하기 좋을 거라고. 양무제는 만년에 미신에 빠져서 유삼부의 말을 들은 후 사람을 시켜 유삼부가 추천한 땅을 사게 한다. 정귀빈을 매장한 후, 한 도사가 소통에게 말했다. 장지가 장남에게 불리하니 화를 면하려면, 묘의 곁에 장남의 자리에 밀랍거위등 여러 물건을 넣어서 지세를 눌러야 한다고 했다. 이것은 미신인데, 소통은 그대로 따라했다.

 

태자궁에는 두 명의 태감, 포막지와 위아가 있었다. 두 사람은 원래 소통의 신임을 받았다. 나중에 포막지는 일을 잘못처리해서 소통이 멀리하게 된다. 포막지는 마음 속으로 불만을 품고, 양무제에게 무고한다. 위아가 도사와 결탁하여 저주등의 술법으로 폐하의 수명을 다 하지 못하고, 태자가 하루빨리 등극하게 해달라고 하며, 그렇기 때문에 정귀빈의 묘 옆에 밀랍거위등 물건을 묻어두었다고.

 

양무제가 사람을 보내어 정귀빈의 묘지를 파보니 과연 밀랍거위등이 나왔다. 양무제는 태자의 이러한 행위에 아주 화를 냈다. 그리하여 이 일을 끝까지 추궁해보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중인 서면이 그만두게 권해서, 그냥 도사만 죽였다. 그러나, 이후부터 태자를 좋아하지 않게 된다.

 

이 사건이 발생한 후, 소통은 매일 우울하게 지낸다. 그러다가 우울증으로 대통3년(531년)에 죽게 되니 나이 겨우 31살이다.

 

태자 소통이 죽은 후에 옛날의 계승제도에 따르면, 태자의 장남인 소환(蕭歡)이 황태손(皇太孫)이 되어 나중에 황위를 이어야 했다. 그러나, 양무제가 태자를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그의 아들인 소환도 싫어했다. 태자가 죽은 후 1개월여만에 양무제는 정귀빈이 낳은 두번째 아들인 소강(蕭綱)을 황태자로 삼는다. 비록 소강도 평판이 좋았기는 했으나, 이렇게 태자를 세우는 것은 관례에 어긋났다. 그리하여 태자의 여러 아들과 소강의 다른 형제들이 불만을 가지게 된다. 다른 사람들도 소강과 마찬가지로 후계자가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소강을 미워하게 된다. 이런 모순이 겹쳐서 어느 도화선만 있으면 언제든지 폭발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양무제의 여덟아들중 소종을 제외하고 넷째아들 소적은 남강왕에 봉해지는데 대통3년(529년)에 사망한다. 다섯째아들 소속은 여릉왕에 봉해지는데 태청원년(547년)에 죽는다. 소속이 죽은 후 남아 있는 아들은 태자 소강, 여섯째아들 소릉왕 소륜, 일곱째아들 상동왕 소강(蕭絳), 여덟째아들 무릉왕 소기의 네 사람이었다.

 

소릉왕 소륜은 어려서부터 총명했고, 박학다식했다. 다만 성격이 포악하고 조급했으며 희노가 무상했고, 행동이 괴이했다. 그가 남서주자사를 지내는 동안, 자주 잡역부의 복장을 하고 시정을 돌아다녔다. 한번은 그가 물고기를 파는 상인에게 자사의 인상이 어떠냐고 물었는데, 물고기상인은 "포악한 놈이다"라고 한다. 그는 그 자리에서 그 상인을 죽여버린다. 또 한번은 길거리에서 상여를 만나는데, 무슨 생각에서인지 앞으로 뛰어가서 상복을 빼앗아 입고 자식노릇을 하며 곡을 했다. 누군가가 그의 이런 행동을 조정에 보고했고, 양무제는 소륜을 엄히 책망했다. 그래도 소륜은 잘못을 뉘우치지 않았다. 그리하여 양무제는 그의 직위를 해제한다. 소륜이 면직령을 받자, 회개하지 않을 뿐아니라, 더욱 소란을 피웠다. 소륜은 사람을 시켜 양무제와 모습이 비슷한 노인을 불러오게 하여, 그에게 황제의 옷을 입히고, 높은 자리에 앉게 한 후에, 자신은 그 아래 무릎을 꿇고 억울하다고 한바탕 늘어놓았다. 소란을 한참 피운 후에, 갑자기 노인을 자리에서 끌어내려 그의 옷을 벗기고 한바탕 두들겨 팬 후에 내쫓아버렸다.

 

며칠이 지나자, 소륜은 다시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그는 사람을 시켜 관을 만들게 한 후, 사마(司馬) 최회의를 안에 넣고, 한 늙은 부인으로 하여금 상여위에서 곡을 하게 하였다. 그후 최회의는 모욕을 견디지 못하고, 건강으로 가서 양무제에게 고발했다. 양무제는 대노하여, 금위군을 보내어 소륜을 붙잡아오도록 시켰고, 감옥에 집어넣어버렸다. 심지어 그를 자결하게 명하려고도 생각했다. 소명태자 소통이 이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 급히 달려나와 궁중에서 눈물콧물을 흘리면서 그를 살려달라고 부탁한다. 양무제는 그제서야 소륜을 용서하고, 얼마후에는 관작을 회복시켜준다.

 

중대통4년(532년)에 소륜은 다시 양주자사로 임명된다(관청소재지는 건강이다). 이곳에서 그는 여전히 교만하게 행동하고, 자기와 부하의 의복을 만들기 위하여, 사람을 건강의 각 점포로 보내어 강제로 비단과 베를 수백필 외상으로 가져온다. 각 점포는 놀라서 황급히 문을 닫는다. 나중에 조정에서 이 물건이 필요했는데, 오랫동안 살 수가 없었다. 건강부승인 하지통이 조정에 소륜이 강제로 각점포에서 외상구매하여 점포가 문을 닫았다고 보고하자, 양무제는 다시 한번 소륜의 직위를 박탈한다.

 

오래지 않아. 소륜은 하지통이 조정에 고변하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심복, 대자고, 대과, 이철, 조지영등을 보내어 사방에서 하지통을 찾아죽여서 분을 풀고자 한다. 나중에 마침내 백마항에서 하지통을 만난다. 이들 몇사람은 칼과 창을 들고 그 자리에서 하지통을 죽여버린다.  하지통은 죽기전에 손가락으로 자기의 흐르는 피로 담벼락에 "소릉"이라는 두 글자를 써둔다. 그리하여, 이 혈안은 세상사람들에게 알려진다. 양무제는 사인 제담찬으로 하여금 오백명의 병사를 이끌고 가서 소륜의 집을 포위하고 대과, 이철, 조지영등을 붙잡아 오게 한다. 대자고만이 요행히 도망칠 수 있었다.

 

하지통의 아들인 하창지는 이 몇몇 흉수를 죽도록 미워했다. 양무제의 동의를 얻은 후, 그는 이 몇몇 흉수를 불속에 넣어 구워서 죽여버린다. 그리고 소금, 마늘등을 집어넣어 소금절임을 한다. 그 후에 시장에 내놓고 사람들에게 맛보게 한다. 고기 한점을 맛보면 천냥씩을 주었다. 이렇게 하다보니 얼마되지 않아, 이들 흉수의 살은 사람들이 깨끗이 먹어치우게 된다.

 

흉수를 처리한 후, 양무제는 다시 명을 내려 소륜을 집안에 연금시킨다. 그리고 제담찬등으로 하여금 밤낮으로 지키게 한다. 근 1달이 지나서야 그를 풀어준다. 이번에는 양무제가 정말 화가 났었나보다. 그러나, 어쨌든 얼마지나지 않아, 양무제는 다시 소륜의 관작을 회복시켜준다.

 

이번 사건이후, 소륜도 약간은 조용히 지낸다. 한번은 소륜이 궁중에서 거행된 연회에 참석했는데, 중간에 시를 하나 지어서 양무제의 칭찬을 듣는다. 얼마지나지 않아 그는 다시 영주자사에 임명된다.

 

소통이 죽은 후에 소강이 태자가 되자, 소륜은 "그 때 예장왕(소종)이 없어서, 그 다음 아들이 태자가 된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즉, 소강이 태자가 된 것에 대하여 그는 형이 죽으니 동생이 이은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원래 그와 소강의 사이에는 소속이 한 명 더 있었는데, 소속이 죽어버리자, 그는 부황과 태자인 셋째형 소강의 명이 길지만 않으면 황제의 보좌는 자기의 차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일찌기 깡패를 매복시켜 양무제를 습격하려고 계획한다. 그러나 환관인 장승윤에게 발각된다. 그래도 양무제는 차마 처벌하지 못하고, 울면서 교훈을 내리고는 끝낸다. 그는 또한 궁중에 명주인 곡아주 100병을 바쳤는데, 양무제는 이전의 일도 있고 하여 아예 마시지를 못했고, 술을 궁중의 환관들에게 선물한다. 그런데, 술을 마신 자는 얼마지나지 않아 죽어버렸다. 그럼에도 양무제는 차마 그를 처벌하지 못한다. 그저 궁중에 위사를 더 많이 두고 방비를 강화할 뿐이었다.

 

소륜의 행위만 해도 이미 황당하기 그지 없다. 그러나, 일곱째인 소강에게 벌어진 일은 더욱 황당하다.

 

사람들은 모두 꿈을 꾼다. 어떤 꿈은 지난 날을 재현하는 것이고, 어떤 꿈은 이상을 형상화 한 것이다. 더 많은 경우는 황당한 것이다. 양무제는 일찌기 이런 황당한 꿈을 꾼 적이 있다: 한 쪽 눈을 실명한 화상이 두 손으로 향로를 하나 받쳐 들고, 황궁에 태어나게 해달라고 부탁을 한 것이다. 양무제는 불교에 독실하였으므로, 이 꿈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이 꿈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풀리지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잊혀지고 있었다.

 

하루는 양무제가 교외에서 놀고 있는데, 바람이 불어오고, 곁에 있는 궁녀의 소매가 펄럭였다. 갑자기 양무제의 정욕을 불러일으켜, 그 궁녀를 밤에 시침들게 한다. 이 궁녀는 그날 밤에 달이 뱃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이로써 회임했다. 10개월후, 소강(絳)을 낳았다. 전설에 따르면 소강을 낳았을 때, 태가 자색이었고, 방안이 모두 기이한 향으로 가득했다고 한다. 이런 황당한 이야기를 양무제는 그대로 믿었다. 그는 이 궁녀가 자기를 위하여 비범한 아이를 낳아주었다고 생각해서 그녀에게 존귀한 성씨를 내리고, 수용(修容, 구빈의 하나)에 봉한다.

 

소강은 어려서부터 총명했다. 그리하여 양무제가 아주 좋아하게 된다. 한번은 그가 눈병에 걸렸는데, 양무제는 친히 약을 지어 치료해주었따. 그렇지만 그는 이 일로 한쪽 눈을 잃고만다. 양무제는 이 일로 기운을 잃는다. 그런데, 다시 생각하다가 기뻐했다. 원래, 그는 몇년전에 꾸었던 황당한 꿈을 생각해낸 것이다. 그는 소강이 바로 한쪽 눈을 잃은 화상이 환생한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는 이는 분명히 자기의 불심에 부처님이 감동한 것이고, 그리하여 부처가 환생한 나한을 보내어주어 자기를 돕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연고로 양무제는 소강을 특히 총애했다. 소강이 6살 되던 해에, 양무제는 그를 상동왕으로 봉하고 식읍 2천호를 내린다. 그가 18세 되던 해에는 형주자사를 시키고 계속 승진시킨다. 태청원년(547년)이 되어서 그가 39세 되던 해에는 이미 진서장군, 형주자사, 도독형/옹/사/영/녕/양/남진/북진구주의 군사를 지휘했다. 당시 양나라의 국토는 주로 장강이남이므로, 소강이 관할하는 지역은 전국토의 절반이 되었다.

 

문화소양으로 보면 소강은 재자(才子)였고, 학자였다. 그는 많은 시를 쓴 적이 있고, 적지 않은 책을 쓰거나 편찬했다. 그러나, 개인품성으로 보면, 아주 낮았고 황당한 사람이었다.

 

일찌기 처음 형주자사에 임명받았을 때(보통7년에서 대동5년, 즉 526년에서 536년까지), 법률을 어겨서 그의 황형인 소속에게 고발당한다. 이 일로 마음에 앙금을 가지고 소속과는 왕래하지 않는다. 태청원년(547년) 소속이 병사하자, 소강은 그 말을 듣고는 슬퍼하지않고 오히려 기뻐서 날뛰었다. 그러다가 신발이 망가진다.

 

소강은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부인인 서씨가 용모가 별로여서 그가 좋아하지 않았고, 2,3년에 한번씩 그녀와 잠자리를 같이 했다. 나중에 그가 아끼는 여자인 왕씨가 아들을 낳다가 죽었는데, 소강은 서씨가 죽였다고 의심했다. 그리하여 서씨를 핍박하여 자살하게 한다. 서씨가 자살한 후에는 묻지도 못하게 하고, 시신을 서씨의 친정으로 보내버린다. 한 대신이 그러지 말라고 권했다:"제왕의 집에서 이렇게 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그러자, 소강은 한쪽 눈을 부릅뜨고, "뭐 좋지 않을 것이 있어. 백성들도 출처(出妻, 처를 내쫓는 것)를 하는데, 나라고 못할 게 뭐냐" '출처'는 봉건사회에 부녀를 압박하는 제도였다. 즉 남자들이 자기의 처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친정으로 보내버릴 수 있었던 것이다. 황자의 '출처'는 아마도 소강이 첫 테이프를 끊은 것같다.

 

소강의 투기심은 아주 강했다. 자기보다 나은 사람이 있으면, 그는 반드시 갖은 방법으로 모욕을 주거나 해를 가했다. 그의 사촌형인 왕전(王銓)은 형제 9명이 모두 재주가 있었다. 그리하여 당시에 명망이 아주 높았다. 소강은 그들을 질투해서 자기의 애첩의 이름을 바꾸는데, 왕전의 부친의 이름으로 바꾼다. 이는 오늘날 보자면 하릴없는 짓이지만, 당시로 보자면, 왕전에게 크나큰 모욕이었다. 고대인들은 부친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기휘하였는데, 소강은 바로 그 아픈 점을 찌른 것이니 정말 나쁜 짓이었다.

 

소강에게는 유지린이라는 모사가 있었다. 그는 학문도 뛰어나고 명망도 있었다. 후경의 난 때, 유지린은 고향으로 돌아가보고 싶어했다. 소강은 유지린이 고향으로 돌아가면 다른 사람에게 이용당하고, 자기에게 불리할까봐 걱정했다. 그리하여 그를 도중에 독살하고 만다. 이후 소강은 다른 사람이 사실을 알 것이 두려워서, 다른 사람의 이목을 가리고자, 짐짓 유지린을 위하여 묘지명을 짓고, 융중한 장례도 치러준다.

 

소강은 불교를 독실하게 믿었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이 살생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 정원에 풀이 자라도 칼로 자르지 못하게 하고 채찍으로 때려서 부수게 했다. 사실 칼로 자르는 것이나 부수는 것이나 차이가 없는 것이므로, 스스로를 속이고 남을 속이는 짓에 불과했다.

 

소강은 미신을 깊이 믿었다. 담장이 무너지거나, 집이 무너지면 모두 점을 쳐서 길흉을 살폈다. 양무제가 죽은 후에 그는 사람으로 하여금 양무제의 상을 만들게 해서는 전당에 놓아두었다. 그리고는 아침저녁으로 절했고, 매일 세끼를 바쳤다. 다만, 늙은 부친이 성에 갇혀 있을 때에는 그의 손아귀에 많은 군대를 이끌고 있었지만 수수방관하고 앉아서 보기만 했다. 그는 여덟째 동생 소기와 전투를 벌이는데, 방사로 하여금 소기의 화상을 목판에 그리게 하고는 하루종일 화상에 못을 박았다. 이렇게 하면 소기를 일찍 죽게 할 수 있다고 하였던 것이다. 그는 성격이 잔혹하여 황위를 빼앗기 위해, 형제조카를 13명이나 죽였다.

 

사생활을 보자면, 양무제는 자신에 엄격했으나, 남에게는 관대했다. 이런 점에서는 정인군자라 할 만했다. 그러나, 그의 종용은 오히려 불효자를 낳았다. 그리하여 자기에게는 무궁한 후환으로 다가왔다. 그의 최후는 아주 비참했다.

 

비교하자면, 소륜은 후경의 난 이전에 활동해서 황제위를 노렸다. 그의 일곱째동생 소강과 여덟째동생 소기는 후경의 난이 그들이 황제위를 빼앗을 가장 좋은 기회로 보았기 때문에 후경의 난이 일어나자 크게 기뻐했다. 그 때 소강은 형주자사이고, 소기는 익주자사였다. 후경의 난이 발생하자, 소강은 "왕망, 동탁을 죽이는 것을 서두르지 않고, 동생을 먼저 살륙했다", 소기도 혼란을 틈타 황제위를 빼앗고자 한다. 바로 그들이 이렇게 하였기 때문에 양나라의 천하가 끝장나게 되는 것이다. 이 두 형제간의 다툼도 추악하며 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