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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민국기녀자)

쑤쉐린(蘇雪林): 루쉰(魯迅)과 반평생을 싸운 특이한 여인

by 중은우시 2009. 2. 19.

 

 

 

글: 환영(幻影)

 

그녀가 유명해진 것은 자신의 산문(散文)도 아니고, 남자같은 성격도 아니고, 루쉰과 문단에서 반평생에 걸쳐 싸웠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청말민초에 한 전형적인 관료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입고 먹고 살아가는데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17살이전에 그녀의 성격은 남자같았다. 칼을 휘두르고, 봉을 가지고 놀고, 활을 들고 화살을 쏘았다. 집안사람들은 그녀를 선머슴아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어른들을 화나게 만들기도 했지만, 문학적 소양도 천성적으로 타고 났다. 7살때는 <<삼자경>>을 암송했고, 12살때에는 4대명저를 다 읽어서 이해했으며, 16살때에는 당시 중국의 사서를 기본적으로 모두 읽었다. 이 점에 있어서 그녀는 당시의 그 어떤 여자들보다 문화수준이 뛰어났다.

 

나중에 부친의 직장이 바뀜에 따라 집안식구들이 안칭(安慶)으로 이사간다. 부친의 친구들 중에 일본에 유학했던 아저씨가 있었다. 그는 그녀의 문학적인 재능을 아주 높이 평가해주었다. 그리하여 그 아저씨는 그녀의 부친에게 그녀를 학교에 보내라고 권하게 된다. 18세가 되던 해, 그녀는 마침내 자신의 노력과 개명한 아저씨 덕분에 사범학교에 합격할 수 있었다. 금방 4년이 지나고, 그녀는 소학교 선생이 된다. 그녀는 집안 사람들에게 제대로 보답은 한 셈이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생활은 적막하다. 특히 여러 측면에서 모두 낙후된 시골마을에서 있었으니까. 그녀는 보통여인이 아니었다. 내심 깊은 곳에는 인생에서 더욱 큰 일을 하고 더 높은 것을 추구하겠다는 갈망이 있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현실의 적막을 견디지 못했다. 다시 부모에게 더 공부하게 해달라고 요구한다. 이때, 모든 가족들은 여자가 그렇게 많이 공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저 남편이나 잘 만나고 아이나 잘 기르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부모는 그녀를 억지로 결혼하게 함으로써 바깥으로 돌아다니려는 마음을 붙잡아두려고 생각한다. 그 당시 그녀는 혼자서 집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시간이 오래되자 그녀는 병이 들었다. 이 병은 아주 오래갔고 아주 심각했다. 부모는 어쩔 수 없이 그녀의 학구열을 만족시켜주어 다시 햇볕속으로 나오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원한대로 북경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한다. 그리고 금방 방청생에서 그 학교의 우등생이 된다. 그때 "5.4"운동이 수구적인 중국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번지고 있었다. 그녀는 처음으로 신사상을 받아들인 해방여성이었다. 이런 강렬한 지식욕이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더 이상 국내에 머물지 않고, 프랑스로 멀리 건너가 공부하게 된다. 그러나, 3년후에 다시 물과 흙이 낯선 곳이 맞지 않아 고향으로 되돌아온다. 중요한 것은, 프랑스에서 사귀었던 남자친구와도 거리로 인하여 단절되고, 집안사람들은 더더욱 그녀를 결혼하도록 압박했다.

 

상대방에 대하여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그녀는 서둘러 시집을 가게 된다. 이렇게 서로간에 마음이 맞지 않는 상황이었으므로, 몇년을 겨우 유지하다가, 파경이 온다. 이때의 그녀는, 사업에서 이미 어느 정도 수준에 올라섰고, 대학에서 강의하면서, 문학작품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리고 "낙가삼걱객(珞三劍客)"의 하나로 불릴 정도가 되었다. 칭찬할만한 일은, 그녀의 생활은 검소했고, 매일 먹고 입는데 절약했다는 것이다. 항전시기에 더더구나 많은 재산을 국가에 헌납한다. 슬픈 사랑의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글에서는 눈물이 줄줄이 흐르고 있었고, 써도 써도 끝이 없는 여인의 비참함과 가련함이 잘 드러났다.

 

그녀의 문학적인 성취로만 보자면, 그녀는 걸출한 여성이고 작가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녀는 어쨌던 다른 사람과는 달랐다. 그녀의 다른 점은 장아이링(張愛玲)과 같이 속세의 여인이 되어서도 아니고, 바로 사회혁명의 가장 예리한 비수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성장의 길에서, 많은 문화대가의 도움과 격려를 받는다. 특히 스승인 후스(胡適)으로부터 칭찬을 듣는다. 후스의 교우권내에서, 그녀는 점점 문학에서 가장 핵심적인 가치를 찾게 된다. 그러나, 그녀의 내심은 급진적이었다. 논박을 좋아했다. 하나의 진리를 찾아내고, 하나의 방향이 명확해지면, 바로 물불을 안가리로 뛰어든다. 이러한 문학비평의 글들 속에서 많은 부분은 바로 루쉰 작품과 인격에 대한 공공연한 도발이다.

 

30년대초, 두 사람은 정치사상적으로 차이가 컸다. 그녀는 처음에 루쉰의 작품을 긍정하다가 미친듯이 폄하하게 된다. 루쉰이 세상에 살아있을 때, 그녀의 행위는 아직 어느 정도 절제했다. 업계내의 사람들도 많은 사람들이 그다지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대문호가 세상을 떠나자, 그녀의 필묵은 호풍환우하며, 전혀 거리낌이 없어진다.

 

루쉰은 감정적인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동료나 친구들과도 관계가 그다지 좋지를 못했다. 그의 일생은 짧았고,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느 한곳 그를 오랫동안 머무르게 하지 못했다. 이런 마음내키는대로 하는 성격은 그로 하여금 친구가 많지 않도록 만들었다. 자연히 소인들의 얘기거리와 배척을 받았다. 그녀는 스스로 이렇게 말한다: 바로 이것이 그를 숭배하다가 그를 반대하게 된 주요한 이유라고.

 

루쉰에 대한 비판글은 아주 예리하다. 언어는 분명하고 조금도 가리는 것이 없었다. 감성적이어서 심지어 이성을 잃기도 했다. 1949년, 그녀는 대만으로 간 후에, 국민당과 공산당의 양당은 적대상태가 되고, 루쉰에 대한 태도도 마찬가지였다. 50년대부터, 그녀는 계속하여 글을 써서, "반루쉰(反魯)"사업에 매진한다. 그녀는 <<전투문예에 대한 나의 견해>> <<비파전복의 성신자 -- 루쉰>>, <<신문단사십년>>, <<루쉰전론>>상.하등의 글을 쓰고, 출판하였다. 나중에 대륙에서 루쉰의 지위가 점점 더 올라가고, 여러 방면에서의 압력이 갈수록 커지자, 그녀는 비로소 자신의 반평생에 걸친 "반루쉰"행동을 멈춘다.

 

민국시대에 가장 특이한 여자라고 할 수 있는 이 여인의 이름은 쑤쉐린(蘇雪林)이다. 그녀의 일생은 1세기 이상에 걸치면서, 감성적으로 살았다. 아마도 이것이 바로 여인의 치명적인 점일지도 모르겠다. 이성적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