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환영운유(幻影雲遊)
조성영은 호적의 결혼식에서 호적과 만난다. 당시 그녀는 신부의 들러리였다. 그런데, 그녀는 그때 이미 마음 속으로 이 풍모가 뛰어나고 재주가 넘치는 신랑을 담아두게 된다.
아주 어렸을 때, 조성영은 가족들의 총애 속에서 자랐다. 집안에서 막내딸이었고, 부친은 그녀가 두 살때 돌아가셨다. 모친과 외조모는 그녀의 말이라면 뭐든지 들어주었다. 그래서 그녀는 어려서부터 반역적인 자아추구적 성격을 지니게 된다. 여기에 어려서부터 학교에서 공부를 함에 따라, 그녀는 당시의 신여성으로 뼛속부터 봉건전통을 반대하게 된다.
그러나, 그녀의 운명은 자신의 집요함으로도 바꿀 수가 없었다. 열여섯이 되던 해, 그녀는 호관영(胡冠英)에게 시집을 간다. 이것은 어른들이 맺어준 결혼이었다. 조성영을 감정이 풍부한 여인이고, 조숙했으며 자기의 주관이 뚜렷했다. 시인인 왕정지(汪精之)는 일찌기 자신의 첫사랑이 조성영이라고 고백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때 그는 조성영과 친인척관계여서 도덕적으로 허용될 수 없었다. 이로써 조성영에게는 여인으로써 모친으로써 감정과 재능이 있어, 호적과는 아주 잘 맞았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결혼후 삼년째 되던 해, 조성영은 다시 전통가정의 여성에 대한 속박을 견디지 못하고, 절강제일사범학교에 입학한다. 학교에서, 그녀의 문학에 대한 천부적인 재능을 마음껏 펼친다. 그녀는 문학의 바다에 푹 빠진다. 사범학교를 졸업한 그녀는 호관영과 이혼하고, 자신이 원하는 행복을 찾기 시작한다.
이때의 호적은 이미 너무나 많은 영예를 누리고 있었고, 스트레스가 심했다. 그러나, 처인 강동수(江冬秀)는 그저 농촌부녀였다. 그녀는 문학을 몰랐고, 정신적으로 호적을 위로해줄 수 없었다. 호적은 그리하여 병을 얻고, 휴가를 얻어 쉴 곳을 찾기로 한다. 항주는 예로부터 인간의 천당으로 알려져 있었다. 아마도 서호의 물이 그의 마음을 윤택하게 해줄지 몰랐다. 왕정지는 그 소식을 듣고, 신속히 항주에 사는 적계(績溪)출신인 조성영, 호관영, 정간연(鄭干埏), 정본해, 왕회균 및 조성영의 동창인 북경사람 오동업등 모두 7명이 호적을 방문하게 된다. 그 후에 함께 모여서 서호로 놀러간다.
이런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서, 조성영은 짝사랑하던 사촌오빠에게 자기의 마음을 털어놓지 못한다. 그러나, 호적은 이미 왕정지 혹은 다른 적계 고향사람 및 호관영의 입을 통해서, 조성영의 처량한 처지에 대하여 이렇게 저렇게 듣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위하여 시를 하나 쓴다. 그리고 잡지에 발표한다. 이는 더더욱 조성영으로 하여금 그에게 빠지게 만드는 결과를 낳는다. 그녀는 반복해서 그 시를 읽고 또 읽었다. 마치 이것이 호적의 그녀에 대한 첫번째 사랑의 편지인 것처럼. 그후 그들 둘은 서신왕래가 끊이지 않는다. 그들 둘의 사랑은 오래 지속되었다. 호적은 조성영에게서 문학적인 공명을 얻을 수 있었고, 조성영은 이를 통하여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사랑에서 헤어나지 못할 때, 현질의 운명은 이들의 꿈을 산산조각낸다. 호적에게는 아주 전통적인 처가 있었다. 그녀는 아주 강경했다. 호적이 자기와 이혼할 것이라는 소식이 들리자, 강동수는 가위를 들고 자살하겠다고 위협하고, 과도를 들어 두 아들과 함께 죽겠다고 협박했다. 이런 막무가내식 처에게 호적은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그렇게 되면 그의 명예는 땅바닥에 떨어지고, 유망한 전도는 사라질 것이다.
이미 임신한 조성영은 이렇게 혼인외의 애인으로서의 운명에 맞닥뜨리게 된다. 그녀는 그의 마음을 붙잡을 수는 있었지만, 그를 가질 수는 없었다. 나중에 조성영은 유학을 선택한다. 다른 나라로 떠나서 살면서 잊고자 한 것이다.
몇년후, 그녀는 귀국하여 사천대학 농학원에서 교편을 잡는다. 그리고 증(曾)모씨와 사귀고 결혼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일이 묘하게 되느라고 증모의 친척이 강동수와 잘 알았다. 얘기하는 와중에 강동수에게 이 일을 말해버리게 된다. 강동수는 보복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남편의 체면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호적과 조성영의 옛날 일들을 모조리 까발렸다. "스캔들"은 금방 증모의 귀에도 들어간다. 그는 바로 결혼을 취소한다. 절망에 빠진 조성영은 1939년 '칠석'날 밤, 마침 주미대사로 떠나는 호적에게 서신을 하나 보내고, 화가나서 아미산에 올라 비구니가 되고자 한다.
바다건너에 있던 호적은 비록 가슴이 아팠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는 그저 친구를 통하여 계속하여 조성영의 소식을 물어볼 뿐이었다. 이중으로 타격을 받은 조성영은 마침내 병이 들어 쓰러진다. 호적은 조성영이 병으로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은 후의 심정을 기록으로 남겨놓지 않았다. 아마도 이때, 그는 뭐라고 말해야할지 몰랐을 것이다. 그가 조성영에게 남긴 것은 그녀를 버린 후의 상처외에 아무 것도 없었다. 무슨 말을 하더라도 의미가 없었다. 그는 그저 그녀를 버렸다는 빚을 평생에 여한으로 남겼다.
그후에 조성영은 시집을 가지 않고 혼자 산다. 해방후 조성영은 심양농학원에서 교편을 잡고, 1958년에 은퇴한다. 1973년에 고향인 안휘 적계에서 병사한다. 그녀는 일찌기 친구인 왕정지를 통하여 그녀가 평생 잘 보관해왔던 호적과의 서신왕래자료를 남겨주면서 그녀가 죽은 후에 불태워달라고 했다. 두 사람의 사랑을 그녀는 평생 보관하고 있다가, 죽은 후에도 천당으로 가져가고자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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