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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민국기녀자)

송애령(宋靄齡): 송씨삼자매중 최강의 여인

by 중은우시 2008. 10. 12.

글: 곽덕영(郭德榮)

 

송애령은 송씨삼자매중 맏언니이다. 송씨의 다른 자매들과 마찬가지로, 송애령의 성격은 아주 분명했다. 그녀는 맏이였으므로, 송애령의 사상은 상대적으로 말하자면 실제적이었다. 송씨삼자매는 같은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그녀들의 소녀시대의 생활은 같지 않았다. 송애령이 어렸을 때, 부친 송요여(宋耀如)는 목사였다. 월급은 은양 15위안이었다. 나중에 <<성경>>을 인쇄하여 판매하면서 돈을 벌었다. 송요여는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이어서 목사의 지위를 버리고, 각종 공상업에 종사했고, 재산을 모으려고 힘썼다. 송애령은 어려서부터 머리속에는 부친이 전심전력을 다하여 돈을 벌려고 하던 모습이 심어져 있었다. 부모가 세뱃돈을 줄 때면, 그녀는 항상 다른 사람들보다 많이 달라고 했고, 그것들을 저금통에 넣어서, 조심스럽게 보관했다.

 

송애령은 송가왕조에서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다. 송애령은 상해에서 태어나서, 1904년 미국유학을 한다. 1910년 졸업하고 귀국한다. 그녀는 먼저 손중산의 비서가 되고, 나중에 여동생 송경령을 소개하여 그 업무를 맡게 한다. 이리하여 손중산이 송경령과 만날 기회를 마련해준 것이다. 송미령과 장개석의 혼사에서도 송씨집안이 일치하여 반대할 때, 바로 송애령의 적극적 지지로 성사된다. 장씨-송씨의 결혼은 중화민국역사에 중요한 사건이 된다.

 

항일전쟁시기에 송애령은 송경령, 송미령과 함께 항일구국활동에 참가하고, 중국공업합작사를 지지하고, 신생활운동촉진총회 부녀지도위원회를 조직하며, 중국아동복지회를 창설하며, 홍콩상병지우협회 회장을 맡는다. 송애령은 대일항전에 열심이었고, 기부하거나 모금하는 측면에서 많은 일들을 했다. 송씨 신화의 창조자이면서, 송가왕조를 장악한 진정한 설계자였다.

 

송애령은 정치무대에서 얼굴을 내미는 일은 드물었지만, 송씨가족이 굴기한 후의 진정한 지도자였다. 그녀는 단지 그녀의 남동생, 여동생과 남편을 조종하여 국가대계를 움직이는 수렴청정의 여인이었다. 이 자신의 한손으로 셋째여동생과 장개석의 결혼을 이루게 해주고, 둘째 여동생과 손중산의 혼인에 대하여는 계속 불만을 가지고, 둘째여동생 송경령에 대하여는 수족지정(手足之情)이 있으면서 또한 동근상전(同根相煎)의 양면을 가진 인물이었고, 서양교육을 받았으면서도 중국의 인정과 세상을 잘 알아 삼교구류의 인물과도 잘 관계를 맺었던 여강자이며, 겉으로는 온화하고 우아하면서 심계가 깊고, 경영에 뛰어나며, 재물운이 형통한 여부호이다. 그녀는 아주 재미있고, 깊이 생각할만하며, 귀감으로 삼을만한 인생궤적을 살았다.

 

"사대가족"의 진정한 수뇌는 송애령이 아니면 안된다. 송애령은 송미령을 통하여 장개석을 조종했다. 송애령의 교묘한 수법은 놀라울 정도이다. 이것이 바로 "전방은 먹을 게 없고, 후방은 빨리 먹어치우는(前方吃緊 後方緊吃)"의 모습이다. 공상희가 재정부장을 맡고 있던 시기에 국민정부는 군용비행기를 구입했는데, 송애령은 매번 거기서 커미션을 챙겼다. 장씨, 송씨 및 그 자녀들이 재물을 긁어모을 때 송미령이 개인적으로 재물을 챙겼는지 여부는 자료가 부족하여 증명할 길이 없다; 다만, 중경, 남경시대에 송애령, 송미령 두 자매가 손을 잡고 이익을 챙겼다는 주장은 많이 있다. 즉, 공상희는 외환을 조작하고, 공채를 조종하며, 은가격에 투기했다는 것이다.

 

장씨, 송씨가족은 여러 측면에서 상층계급의 부패, 타락의 일면을 대표한다. 재물을 탐하고 호색한 외에 공씨집안의 아래위는 모두 만족할 줄을 모르고, 배를 불리고 나자 대거 음욕을 부린다. 장개석의 곁에서 일을 했던 진희회에 따르면, 공부인 송애령에게는 외간남자가 있었고, 그 외간남자의 처는 다시 공상희의 아들과 관계를 맺었다고 한다. 미국인인 죠셉 알솝(Joseph Alsop)도 송애령의 외간남자가 많았다는 소문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콩하하(孔哈哈)"도 약자는 아니었다. 그도 마찬가지로 바깥에서 목표를 찾았다. 심지어 공이소저(孔二小姐)도 여자를 끌어다가 부친에게 소개했다. 그리고 이 '공로'를 이용하여 중앙은행을 조종했다. 정말 그 어머니에 그 딸이다. 쓰는 것은 마찬가지의 수법이다.

 

송씨삼자매간에는 아주 복잡한 관계를 나타낸다. 수족간의 가족의 정도 있고, 은원도 있다. 정치도 있고, 사랑과 원한도 있다. "삼자매의 이야기"는 역사, 정치, 외교, 금전, 감정과 투쟁의 종합이야기이다. 그리고 하나의 경전적인 권력과 매력이 융합된 살아있는 한편의 극이었다.

 

송경령이 손중산에게 시집을 갔기 때문에, 송애령은 자기의 체면을 위하여 자기의 친여동생인 송경령과 관계를 단절한다. 자기의 원한을 위하여 영한(寧漢, 남경과 무한)분열시, 그녀는 장개석을 지지하고, 자기의 여동생과 반대편에 서기를 꺼리지 않는다. 그녀는 자기의 정치와 경제욕망을 위하여 자기의 여동생 송미령을 장개석의 품으로 밀어넣는다.

 

송애령의 성격은 세자매중 가장 강했다. 서가함(徐家涵)에 따르면, "장개석, 송자문, 공상희의 세 가족간에 내무마찰이 생겨서 서로간에 해결이 되지 않으면, 단지 그녀(송애령)가 큰언니로서 나서서 중재하여 해결하였다. 그녀는 평소에는 집안에 깊이 들어박혀 바깥출입을 많이 하지 않았고, 송미령처럼 다른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세력은 직접적으로 국가대사에 영향을 미칠 정도였고, 장개석도 그녀에게는 삼푼쯤 양보했다." 장개석의 조카손자인 장효진은 일끼지 군통의 두목인 대립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위원장(장개석)의 병은 송미령이 치료할 수 있고; 부인(송미령)의 병은 공부인(송애령)이 치료할 수 있다; 그러나 공씨의 병(부패탐욕)은 아무도 치료할 수 없다."

 

1947년, 송애령일가는 미국으로 간다. 송애령은 1973년 10월 19일 뉴욕에서 병사한다. 당시의 <<뉴욕타임즈>>는 이렇게 썼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흥미를 갖게 하고 약탈적인 성격을 지닌 주민이 어제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서거했다. 그녀는 금융상에서 거대한 성취를 얻은 부녀이고, 세계에서 드물게 보는 자신의 정명한 수단으로 재산을 긁어모아 가장 돈있는 부녀가 되었고, 송미령과 장개석을 소개한 중매쟁이이며, 송씨신화의 창조자이고, 송씨왕조의 권력장악의 설계자였다" 이로써 볼 때, 그녀가 중국역사에 미친 영향이 얼마나 큰 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