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미령, 송애령, 송경령(왼쪽부터)
글: 진명원(陳明遠)
유명한 송씨삼자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말이 전해진다: "큰 딸은 재물을 사랑했고, 둘째 딸은 나라를 사랑했고, 셋째 딸은 권력을 사랑했다"
확실히, 큰딸 송애령(宋靄齡)의 진상(晋商)으로 거부인 공상희(孔祥熙)를 남편으로 따랐으니, 어찌 재물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둘째딸 송경령(宋慶齡)은 혁명가인 국부 손중산(孫中山)을 남편으로 따랐으니, 어찌 나라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셋째딸 송미령(宋美齡)은 중화민국 위원장이면서 대총통인 장개석을 남편으로 따랐으니, 어찌 권력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녀들은 각자 자기 나름대로의 인생여정을 걸었다.
그중 송미령(1897-2003)은 수명이 가장 길어 3세기에 걸쳐 있다. 이들 세 자매는 후세인들에게 아무리 말해도 끝나지 않을 화제를 남겼다.
본문은 그 중에서 하나의 수수께끼. 즉, 송미령의 재산규모는 얼마나 될 것인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106세의 송미령이 사망했을 때, 아무런 회고록이나 자서전도 남기지 않았다. 생전에 사람들이 송미령에게 글이나 구술역사를 남겨달라고 자주 권했지만, 그녀는 완곡하게 거절했다. 송미령은 자녀도 없다. 대만과 미국의 두 곳에 재산도 남기지 않았다. 만년에 그녀를 보살핀 것은 공씨집안의 큰딸인 공령의(孔令儀, 공상희와 송애령의 장녀)였다. 공령의는 "노부인은 죽은 후에 12만달러의 예금을 남겼을 뿐입니다"라고 말했다.
1. 중년에 이미 천만(은원)의 부호였다.
송미령은 부친 찰리 송으로부터 뛰어난 상인의 두뇌와 재산을 모으는 수단의 영향을 받았다. 그리하여 중국인들의 권력과 돈의 관계를 잘 알았다. 젊을 때에는 강렬한 정치적 야심을 드러냈고, 권력을 쫓는 것은 그녀가 원하는대로 이루어졌다. 1927년 12월 장개석과 결혼한 후, 장개석의 비서 겸 영문통역을 맡아서, 외교현장에서 활약했다. 그녀는 장개석에게 서방의 문화와 정치를 소개하고 장개석이 친미로 돌아서도록 힘썼다.
결혼후, 그녀는 장개석과 재무는 서로 독립하여 유지했다. 미국식의 별산제를 채택했던 것이다.
송미령은 오랫동안 정부와 사회상의 직위를 가지고 있었고, 그녀는 개인적으로 상당한 수입이 있었다. 예를 들면, 1929년, 군인유족학교를 설립하고, 다시 "여지사(勵志社)"를 설립하여, 문화활동으로 국민당의 장교들과 연락했다. 장개석이 신생활운동을 전개할 때, 그녀는 "신생활활동부녀고문회"를 주재하였다. 1936년, 송미령은 전국항공위원회 비서장을 맡아, 국민당 공군을 확대하는데 적극 활약했다.
송미령은 일찌기 "중화부녀연합회"의 설립자 겸 주석을 맡은 적이 있다. 이후 보인대학 동사회 주석, 화흥육아원, 진흥북건의학센터 동사장, 고궁박물원관리위원회 상무위원, 민국부녀연합회 주임위원...등등을 맡았다.
1934년 12월 26일 <<강남정보>>에 실린 보도에 따르면, "국부요인...본시에 소유한 재산을 추정하면, 장개석 1300만은원, 송미령 3500만은원..."이라고 되어 있다. 당시 1은원의 구매력은 지금의 60위안인민폐에 상당하므로, 당시의 소문이 사실이라면, 송미령의 개인재산은 이미 지금의 21억위안(한화 약320억원)에 이르렀다는 말이 된다. 이는 장개석의 거의 3배이다. 이 데이타는 당시의 "채원배 일기"에 근거한 것이고 아직 입증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송미령은 중년때 이미 재산이 천망은원대의 규모에 이르렀다는 것은 충분히 알 수가 있다.
2. 항전중, 상해외국은행 예금은 일본에 빼앗기다.
미국 스탠포드대학 후버연구소의 자료중에는, 1939년 10월 17일, "일본특무기관의 국민당정부 고급관리의 상해외국은행예금현황"이라는 비밀조사보고서가 있다. 정식명칭은 <<등집단특보병제1호 - 정부요인상해외국은행예금(금액)조사표>>이다. 거기에 장개석은 6639만원(당시의 법정화폐와 달러의 환율로 하면 약 미화809만달러, 이하 같다), 송미령 3094만원(미화377만달러)이다. 1939년 법정화폐의 가치하락으로 1위안 법정화폐는 약 15위안 인민폐가 된다:혹은 이처럼 환산하면 당시의 1달러는 지금의 15달러가 된다. 주의할 것은, 이 시기에 중국동부의 절반은 이미 일본에 점령당했다는 것이다. 정부는 이미 중경으로 이전했다. "요인"들이 상해외국은행에 보유하고 있는 예금은 당연히 그들의 재산중에서 아주 적은 부분일 것이다. 여기서 송미령 개인의 예금은 장개석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후, 일본은 상해 외국은행을 접수하고, "국민당정부요인"의 상해 외국은행의 예금을 몰수한다. 송미령의 개인예금도 손실을 입는다.
3. 송미령 개인재산은 지나치게 높게 추정하였다.
우리는 장개석 송미령의 개인재산을 국민당정부재산과는 구분해서 따져야 한다. 함께 섞어서 얘기하면 안된다.
인민일보(1990년 1월 8일)은 역사자료에 근거하여, 국민당이 1949년에 대륙에서 대만으로 도망칠 때, 3차례에 걸쳐 대만으로 황금 277.5만냥, 1520만은원을 운송했다고 한다. 또 <<이종인회고록>>에 따르면, "당시 감찰원 재정위원회 비밀회의 보고에 따르면, 국고보관고에 황금이 모두 3억5천만달러였다. 이 숫자는 중국공개시장의 가격으로 계산한 것이고 해외의 금액으로 계산하면 이 정도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보관된 황금은 390만온스, 외화 7000만달러 및 가치 7000만달러의 백은이었다. 이를 합하면 5억달러가량이 된다"고 한다.
그리고 어떤 자료에 다르면, 당시 송미령의 개인재산은 2억 내지 5억달러에 달한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그녀의 재산은 국고보관금의 절반이나 되어, 확실히 과장되었다. 이는 믿을 것이 못된다.
4. 1949년 미국에서 영원히 동결된 재산
1948년 11월 송미령이 미국에 원조를 요청하러 갈 때, 트루먼 대통령으로부터 냉대를 받는다. 트루먼은 당시 국민당에 대하여 믿음과 희망을 상실했다. 그는 보좌관들과 얘기하면서 국민당정부의 '탐관과 나쁜 놈"을 얘기하였다, 이때 가장 먼저 손꼽은 것이 공씨, 송씨 두 가족이었다. 이들은 항전기간동안 국가의 위기를 틈타 개인재산을 챙기고, 미국의 원조자금을 빼돌려서, 자기의 회사를 차리는데 쓰고, 미국원조물자를 빼내서 팔아 개인의 사리사욕을 챙겼다고 보았다. 내전기간동안에 계속하여 미국정부에 손을 벌리면서 대량의 달러를 자기의 기업에 투입했다고 보았다. 또한 대륙의 국민당정권이 붕괴되기 직전에, 가장 먼저 재산을 해외로 빼돌렸는데, 가장 먼저 미국으로 빼돌렸다고 보았다. 트루먼이 화가 나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송미령은 1948년말, 1949년초에 미국으로 가서 원조를 요청했으나 거절당한 후, 황급히 미국에서 자기의 사유재산을 처분했고, 그녀의 조카인 공령간(孔令侃)에게 관리를 맡겼다.
어떤 자료에 따르면, "4대가족(주로 공상희와 송자문을 대표로 함)"은 1940년대에 미국원주물자를 이용하고, 그들의 특수한 경로로 미국에서 거래를 하였는데, 미국재정부에서는 탈세 수천만달러를 발견했다. 이를 트루먼에게 보고했다. 미국CIA와 미국재정부는 공동으로 조사하여, 미국에서 내력이 불분명한 불법재산이 20억달러가 넘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미국의 상하양원은 일치하여 결정한다: 사대가족의 미국에서의 불법재산과 미국은행 보관소에 있는 내력이 불분명한 골동, 서화, 주보, 황금을 영구히 동결하고, 탈세금액과 벌금을 완납하도록 한다.
이상의 자료를 보면 다음과 같이 분석할 수 있다: (1) 국민당정부의 자산은 소위 "사대가족"의 개인재산과 구분하여야 하고, 혼동해서 말해서는 안된다, (2) 1949년 미국정부가 영구히 동결한 국민당정부의 미국에서의 불법재산은 20억달러이상이다. 그중 아마도 송미령의 재산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지만, 구체적인 숫자는 알 수가 없다.
5. 송미령의 후반생의 주요수입은 무엇인가?
위에서 이미 언급했지만, 첫째, 항일전쟁기간동안 송미령의 상해외국은행 예금은 일본군에 몰수되었다. 둘째, 1940년대 송미령이 미국의 은행에 예금한 자산은 1949년 미국정부에 의하여 동결되었다.
그렇다면, 송미령의 후반생의 주요 수입은 어디서 나왔을까?
장개석이 서거(1975년 4월 5일)하기 이전에는, 2,3개월에 한번씩 송미령에게 보조금이 지급되었다. 장경국이 부임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1983년 10월, 장경국의 초청으로 대만에 돌아가서, <<나는 다시 일어설 것이다>>라는 장문의 글을 발표하고, 자주 장경국을 도와서 국민당 원로와 국부인사를 다독거리고, 혁명의 저항세력을 와해시키고, 마침내 개방정책을 이끌 수 있도록 한다.
1988년 1월 장경국이 죽은 후, 후사처리에 참여하고, 계엄령을 취소시키는데 참여한다. 나중에 정계에서 물러나, 타이페이의 상림관저에 은거한다.
장경국의 사망(1988년)이후, 송미령은 이등휘와 만났을 때, "너도 알다시피, 경국이 살아 있을 때, '총통부'에서는 매월 나에게 경비를 보내주었다. 이제 경국이 세상에 없는데, 네가 나에게 이 경비를 보내줄지 안줄지 모르겠다' 어쨌든 송미령은 전임 총통의 미망인이라는 대우를 받았다. 송미령의 요구에 대하여 이등휘는 그녀가 바라는 바를 모두 만족시켜 주었다.
6. 미국에 정착한 후의 거액지출은 누가 부담했는가?
대만의 <<시보주간>>의 보도에 따르면, 송미령은 미국에 정착한 초기에, 그녀의 이름으로 아무런 재산도 없었다고 한다. 이는 실제상황에 부합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후 그녀는 도대체 어떻게 생활했는가? 매년 얼마나 돈이 필요했을까?
송미령은 1972년 미국과 중공간의 <<상해커뮤니케>>가 발표된 후, 대만-미국관계측면에서 그녀가 해야할 일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모든 힘을 사업경영에 쏟았다. 미국에서 석유, 천연가스사업에 투자했다. 1984년 미국 UIP의 전신보도에 따르면, "장부인 송미령 여사는 5백만달러를 투자해서, 텍사스주 필립스 석유회사와 계약을 체결했다. 뉴멕시코주 부근에서 합작으로 석유, 천연가스를 채굴한다..." 이후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것은 공령걸(孔令杰)이 이모인 송미령의 이름으로 일을 벌여 투자를 끌어모으기 위한 것이었다. 원래 공씨, 송씨 두 집안은 원래 한 집안이다. 사업에 전념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정계에서 물러난 송미령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1975년 4월 장개석이 사망한 후, 반년이 지나, 송미령은 미국으로 요양차 떠난다. 그후 다시 몇번 미국에 가서 체류한다. 송미령이 1975년 처음으로 대만을 떠나 미국으로 간 후, 뉴욕의 롱아일랜드 로커스트 밸리에 있는 송가저택에서 머문다. 짐만 하더라도 비행기로 3년만에 3차례에 걸쳐 운반을 마쳤을 정도이다; 두번째 대만을 떠나 미국으로 이주할 때(1991년)에는 짐이 97상자였다.
로커스트 밸리의 주택은 2층짜리 건물이고, 바깥에 1층짜리 각루가 하나 더 붙어 있다. 1998년에 경매되었는데, 300만달러를 받았다. 그러나, 이후 매입자가 밝힌 바에 따르면, 그들이 진정 관심을 가진 것은 집안에 있는 서화 골동이었다고 한다. 보수적으로 추정하더라도, 그들 서화 골동의 가치만으로도 판매가격을 훨씬 넘어설 것이라고 한다. 이외에 노부인이 만년에 거주한 맨해턴의 뉴욕집도 역시 공씨집안 소유이다.
장개석이 사망한 후, 대만당국은 1978년 5월, "전임총통예우조례실시방법"에서 "전임총통"의 배우자에게는 행사에 참석하는 것 이욍, 교통도구(자동차) 2대 및 운전기사 2명을 제공받고, 업무처리인원 3명 내지 4명 및 상응하는 사무비용을 받는다. 대만내외의료기관은 개인의사 및 건강검사에 소요되는 비용을 포함한 일체의 비용을 지급하고, 실제상황에 따라 국가안전국이 제공하는 경호를 받는다. '총통부'는 이 규정에 따라, 2003년 416만대만달러의 예산을 편성했다.
주의할 점은 규정에 따르면, 송미령은 대만내에서건 해외에서건, 모든 의료비용을 모두 대만당국이 실비정산방식으로 부담한다는 것이다. 상한도 없다. 그녀는 비록 미국에 있지만, 2003년 서거하기 전에 대만총통부가 미국에 파견한 의료인원의 경우에 1인단 매달 급여가 최소 5만대만달러였다. 여기에 명절상여금등을 합치면 매년 6명은 최소한 600만대만달러를 받았다. 그러므로, 송미령을 돌보기 위하여, 1년에 지출되는 금액이 최소한 1000만대만달러(약3억5천만원)에 이르렀다.
다만, 소문에 따르면, 송미령은 미국에서 생활하는데 대만에서 보내주는 돈이 아니라 장씨집안의 '비밀자금'으로 살았다고 하기도 한다.
홍콩의 <<명보월간>> 2003년 12월 특대호에서는 송미령이 병사한 후 <<송미령의 세기에 걸친 사랑>>이라는 특집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장개석 부인 송미령은 106세의 고령으로 꿈속에서 세상을 떠났다. 여러해 동안 이모 송미령을 돌보아주었던 공령의(공상희 딸)은 기자와의 인터뷰때 이렇게 말했다: 송미령은 1991년 뉴욕에 온 후, 12년동안 그녀에게 딱 한번 '돈은 충분하냐'고 물어보았고, 공령의는 '안심하세요. 충분합니다'라고 답변했다. 이후 송미령은 다시는 돈에 관하여 물은 적이 없다. 죽은 후에는 겨우 12만달러를 은행에 남겼다. 송미령은 생전에 유언을 남기지도 않았고, 후사를 부탁하지도 않았다. 유서를 쓰지 않았는데, 이는 공상희, 송애령과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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