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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민국기녀자)

육소만(陸小曼): 나는 바람이 어디로 불 지 모른다 (I)

by 중은우시 2009. 9. 17.

글: 강홍(江泓)

 

나는 내가 검색할 수 있는 모든 육소만의 사진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일대명원(一代名媛)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사교계의 꽃의 이미지가 아니었다. 마치 평생 머리에 퍼머를 한 적이 없는 것같다. 혹은 두 가닥으로 머리카락을 땋거나, 혹은 귀까지 가지런히 짧게 자르거나, 혹은 손으로 아무렇게나 올린 머리모양을 하고 있어, 아주 소박해보이고, 전혀 요염하지 않다.

 

아마도 진정으로 남자들의 마음 속에 남고, 손안의 노리개가 되지 않으려면 바로 이렇게 요염함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뼛속에 아름다움을 지닌 여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 아주 엄숙해 보이는 호적(胡適)도 이렇게 감탄했었다: "그녀는 보지 않으면 안되는 하나의 풍경이다" 그리고 유해속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네가 북평(북경)에 가서, 왕부인을 보지 않으면, 북경에 가지 않은 것과 같다." 그렇다. 그때 육소만은 겨우 스물남짓이었는데, 이미 왕갱(王)에게 시집가서 왕부인이 되어 있었다.

 

왕갱은 육소만보다 7살이 많다. 바로 소만의 모친이 마음에 들어한 청년준재이다. 미국 프린스턴대학과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하였고, 귀국후에는 북경대학에서 교수를 지냈다. 나중에 하르빈 경찰국장이 되었으니, 문무를 겸비하고 전도가 유망한 청년이었다.

 

소만이 결혼할 때는 겨우 19살이었다. 이미 그녀를 따르는 남자들이 많았지만, 그녀가 마음에 둔 상대는 만나지 못했다. 부모가 정한 혼사에 그저 순종하고 기뻐할 뿐이었다.

 

"누가 알았겠는가. 이 다재다능한 신랑이 비록 중국과 서양의 학문에 능통하지만 여자는 다루는데는 완전히 문외한이었다. 그는 꽃처럼 아름다운 부인을 얻고서도 하루종일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고, 짬을 내서 그녀와 놀아주지 않았다" 이것은 뇌암이 <<서지마와 육소만의 염사>>라는 글에서 묘사한 내용이다.

 

소만은 당연히 만족하지 못했다. 그녀는 벌통 속에서 자랐고, 태어나면서부터 다른 사람의 보호와 애정을 받고 자랐다. 왕갱이 비록 처를 아주 사랑했지만, 이미 미국식 생활에 익숙해진 그는 휴식과 오락은 주말로 고정시키고, 평일에는 열심히 일을 했다. 예쁜 처는 그저 곁에 던져두고 신경쓰지도 않았다.

 

시간이 흐르자, 소만은 원망을 품게 된다. 체면을 중시하는 그녀로서는 이를 풀 길이 없었다. 거기에 하루종일 아무 할 일이 없다보니, 다시 소녀시대에 물만난 고기처럼 놀던 사교계로 되돌아오게 되고, 매일 저녁을 보낸다. 사교계에서 여러 사람의 주목을 받는 것은 육소만에게는 필연적이 일이다. 그녀는 부자집에서 태어났다. 부친인 육정은 청나라말기의 거인(擧人)일뿐아니라, 일찌기 일본 와세다대학에 유학해서 일본의 수상 이토 히로부미의 아끼는 제자가 되었다. 그리고 국민당 재정부 부세사장을 여러해동안 지내고, 중화저축은행을 창립했다. 모친인 오만화는 강남 명문집안의 규수였다. 공필화에 뛰어나고, 고문에 대한 실력이 뛰어났다. 아쉽게도 소만의 앞뒤 8명의 형제자매는 모조리 요절을 하였으니, 부모는 모든 사랑을 그녀 하나에 쏟았다.

 

소만은 어려서부터 몸이 약하고 병치레가 많았다. 그러나 몸이 허약한 사람이 총명한 경우가 많다. 소만이 바로 그러했다. 십오륙세때, 이미 영어 프랑스어의 두 언어에 능통했고, 소해(小楷)를 잘 쓰고, 서방의 피아노, 동방의 희곡등도 모두 잘했다. 회화에는 더더욱 천부적인 재능을 보였다. 그녀가 그린 유화는 외국인들이 마음에 들어했고, 200프랑을 지급하고 사갔다. 귀부인이 당연히 갖추어야 할 풍모와 예의범절, 사교계의 각종 규칙들도 그녀는 능수능란하게 처리했다. 그녀는 명사가 되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같았다. 그녀는 그런 생활을 즐겼다. 호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그녀를 우러러보는 눈빛들 속에서, 치마자락을 휘날렸다. 그러나, 그런 호화사치스러운 생활도 그녀의 마음을 충족시켜주지는 못했다. 그녀는 일기에서 고통스러운 심경을 드러냈다. "사실 나는 부귀를 바라지도 않고, 영화를 바라지도 않는다. 나는 그저 안락한 가정을 원한다. 마음에 드는 짝을 만나면 된다. 누가 알았으랴. 이런 요구사항마저도 이루지 못하고, 하루종일 외롭게 지내게 될 줄을."

 

한 아름다운 여인이 앞뒤로 따르는 사람이 늘어서 있고, 화려한 치장을 하고서도 고독하다고 탄식하다니. 그것은 마음의 고독일 것이다. 아마도 사랑만이 이런 고독을 치유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사랑이 다가왔다.

 

사랑은 유명한 낭만시인 서지마(徐志摩)가 가져왔다. 이것은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이야기이다. 이 사랑은 곡절은 있었지만 어쨌든 성사되었다.

 

일찌기 사랑에 빠져 부모의 강렬한 반대에 부닥쳐본 자녀이거나, 거칠게 자녀의 때이른 사랑에 간섭해본 적이 있는 부모에게는 모두 깊은 체험을 남긴다. "압박이 있는 곳에는 반항이 있다" 압박이 강하면 강할수록 반항은 더욱 철저하다. 비록 미녀와 시인이 서로 사랑했을때 이미 22살의 젊은 부인이었지만, 그러나 본성은 여전히 세상물정을 모르는 어린아이와 같았다; 시인은 이미 나이가 서른이 되었지만 영원히 성장하지 않는 어린아이였다.

 

그들이 서로 상대방을 마음에 들어하고, 무도회를 거치고, 같이 놀면서, 둘만의 만남을 갖기 시작했다. 북경 석호후통7호에는 서지마가 만든 신월사(新月社)가 있는데, 그들 둘의 밀회장소가 되었다. 그 "비냉취(翡冷翠)의 하룻밤" 이후 둘은 평생을 약속한다. 그리고 이러한 불륜이 폭로된 이후에 가해진 거대한 압력은 그들의 상상을 초월했다. 사회여론은 그들 둘을 비난했다. 소만의 부모도 딸의 행위가 집안을 욕되게 하였다고 생각했고, 사위에게 미안하다고 생각해서, 사위를 대신하여 딸을 엄격하게 단속한다; 서지마의 부모도 그 못된 부인을 미워했다. 자기 집의 착한 아들을 유인해서 망쳐버렸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들이 막다른 골목에 몰렸을 때, 서지마를 아들처럼 대해주던 타고르가 그를 이탈리아로 초청한다. 호적등도 서지마에게 외국으로 나가서 일단 비난을 피하고 보자고 한다. 이 한쌍의 연인은 서로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해서 생각해본 후, 그 요청을 받아들인다.

 

압력과 이별, 이 두 가지보다 더 확실한 사랑의 촉진제가 있을까? 두 젊은이는 사랑에 빠져서 도저히 헤어나지를 못했고, 바다를 사이에 두고 서로 연락했다. 서신의 내용은 두 가지였다. "사랑과 죽음" 사랑이 없다면 차라리 죽겠다는 것이 그들의 신념이었다.

 

"나는 어떤 때는 너를 붙잡고 같이 죽겠다고 생각한다. 나는 정말 이런 형식의 생명에는 미련이 없다. 나는 그저 짝을 원할 뿐이다" "내가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어떤 때는 정말 너를 끌고 같이 죽고 싶다. 절대적인 죽음의 적멸 속에서 완전한 사랑을 실현하고 싶다. 보편적인 어둠 속에서 유일한 광명을 찾고 싶다." "나는 즉시 너와 함께 죽지 못하는게 한스럽다. 왜냐하면 죽음만이 우리가 갈망하는

청정을 가져다 줄 것이고, 서로 영원히 가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서신내에 이런 미친 듯한 글자는 그들의 당시 격정을 말해준다.

 

소만이 보기에 주위는 모두 "바람은 칼이 되고, 서리는 검이 되어 못살게 핍박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녀와 서지마의 순수한 사랑도 용납하지 못한단 말인가. 그녀는 원래 몸이 약했다. 가슴에서 불이 나고 생각을 너무 많이 하다보니, 혼절하기까지 했고, 거의 목숨을 잃을 뻔하기도 했다. 그녀는 더 이상 참지 못했다. 서지마에게 전보를 보낸다: "2주일내로 날아와라. 너와 내가 최후의 결판을 내자" 서지마는 전보를 받고는 급한 마음에 바로 귀국한다. 그래도 상황은 호전되지 않았다. 귀국은 했지만, 여전히 주변에 있지만, 서로 만날 수가 없었다. 겨우겨우 한 무도회에서 만나서, 두 사람이 춤을 한 곡 같이 출 기회를 가졌다. 서지마는 일기에서 자신의 흥분한 심정을 기록했다. "오늘 저녁에 너와 춘 그 춤은 내가 가장 enjoy한 것이다. 내 생각에 그렇게 농염한 취미는 가져본 적이 없었던 것같다. 너는 알아주어야 한다. 네가 가끔 나를 불러줄 때, 나의 몸과 마음은 모두 사라진다."

 

서지마는 어린아이처럼 쉽게 만족하고 즐거워하는 사람이다. 그저 애인과 춤 한곡만 같이추면 이미 충분하다. "이러한 염복은 세상에 몇 사람이나 누릴 수 있겠는가? 이러한 사치로운 시간은 이 우주에 얼마나 되겠는가?" 그는 많은 남자들처럼 모든 사랑을 속삭이는 모든 단계를 생략하고 바로 침대에서의 일로 치닫지 않았다. 그는 사랑을 즐길 줄 알았고, 사랑하는 여인을 아낄 줄 알았다. 이 두 사랑에 빠진 남녀를 생각해보면, 일찌기 세상을 풍미했던 만화가 생각난다: 한쌍의 어린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있는데, 남자아이는 바지를 내리고 있고, 여자아이는 심각하게 들여다보는 것이다. 만일 어른이었다면 다르겠지만, 어린아이의 순진함에 사람들은 그저 웃음이 나올 뿐이다.

 

소만과 지마는 이렇게 순진한 어린이와 같았다. 금동옥녀로 사람들의 부러움이 담긴 눈빛을 받겠다는 허영심도 있었지만, 더 많은 것은 속세에 물들지 않고, 놀이에 빠진 진지함과 망아(忘我)였다. 앞뒤를 재지 않고, 완전히 놀기 좋아하는 어린이와 같았다.

 

경험있는 연기자라면 알 것이다. 절대 어린이나 개와는 연기싸움을 하지 말아야 한다. 절대로 그들보다 잘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연기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연기하는게 아니라 진짜이기 때문이다. 소만의 남편은 아무리 신경을 쓰고, 엄히 단속하고 교육해도 처의 마음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 서방교육을 받은 남자는 어쨌던 합리적이었다. 앞뒤를 생각해본 후에 정식으로 소만에게 말한다: "만일 네가 나와 같이 생활하는 것이 이미 아무런 재미가 없고, 서지마와 함께 있어야 비로소 행복하다고 한다면, 이혼하겠다." 가장 무서운 상대가 더 이상 같이 싸우지 않겠다고 하니, 다른 사람들은 문제가 없다. 자연히 이 진지하게 연기하는 어린아이들과 싸우려고 하지 않게 되었다. 싸워도 이길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1926년 가을, 그들은 북경 북해공원에서 그 유명한 혼례를 올린다. 그 혼례가 유명한 것은 두 사람의 명성과 그동안의 사랑이야기외에 증혼인인 양계초가 독보적인 증혼사(證婚詞)를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서지마를 질책했다: "너는 성격이 가벼워서 학문에서도 성취를 거두지 못했다; 너는 사랑을 전념하지 못해서 이혼하고 다시 결혼하게 되었다...."

그는 육소만에게도 이렇게 일깨워주었다: "너는 진지하게 살아라. 너는 부녀자로서의 도리를 다해라. 너는 이후 서지마의 사업을 방해하지 말라...."

 

그가 이후 그의 아들과 며느리에게 보낸 서신에서 말한 것처럼, "서지마는 사람이 사실 총명하다. 나는 그를 아주 좋아한다. 이번에 그가 큰 화를 당한 것을 보니, 내가 구해주고 싶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육소만에게 못을 박듯이 말했다: "이후 서지마를 피곤해서 죽도록 만들지 말라." 경험이 많은 양계초는 이들이 "감정적인 충동으로 스스로를 절제할 수 없는 젊은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장래 분명히 스스로 고뇌의 바다에 빠질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이 말이 맞아떨어질 줄은 아마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결혼후 이 한쌍은 서지마의 고향인 절강 협석으로 돌아간다. 서지마의 부모는 아들의 결혼에도 참석하지 않았고, 아들의 선택에 대한 불만도 표현했다. 그러나 어쨌든 아들이므로, 그들을 위하여 새 집을 지어주는데 신경을 많이 써준다. 심지어 욕실 두 칸까지 마련해주고, 냉수온수관도 설치한다. 이는 당시의 시골로서는 아주 선진적인 설비였다. 육소만이 밝은 것을 좋아하므로, 서지마는 특별히 신방에 86개의 전등을 설치한다: "침상의 좌우에 불빛이 나오지 않는 곳이 없었다."

 

서지마는 신부에 대한 사랑을 숨기지 않았다. "이제부터 곁에 한 사람이 있게 되었다. 이것은 큰 일이고, 큰 차이이다" 다정한 시인은 자신의 신부를 지키면서 만족하고 있었다. 소만은 신파여인이다. 내심으로 시부모의 사랑을 받고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부모에게 문안인사하고 차를 따르고 하는 일은 할 줄을 몰랐다. 삼종사덕은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서지마와 희희낙락하고, 놀기에만 바빴다. 계단을 오르다가도 애교를 떨며 서지마에게 안겼고, 사과를 먹더라도 너 한입, 나 한입 이렇게 먹었다.

 

사상이 구식인 시부모들로서는 곱게 보일리가 만무했다. 한번은 소만이 한입, 한입, 밥을 몇 숫가락 먹었을 때, 애교를 떨며 밥그릇을 서지마에게 내밀었다. 서지마에게 남은 밥을 먹으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의 부부들에게는 별다를 것도 없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당시 노인들이 보기에, 이것은 하늘과 땅이 뒤바뀌는 일이었다. 부녀자의 도리를 지키지 않는 여인이고, 아들의 머리끝에 올라타는 꼴이 아닌가? 이것을 참으면 어떤 것을 더 참을 수 있겠는가? 시부모는 화를 내며 집을 떠났다. 그리고 북경으로 가서, 자신들이 마음에 들어하는 며느리 장유의(張幼儀)에게 가버린다. 그녀는 정말 표준적인 좋은 며느리였다. 예전에 서씨집안에 있을 때, 시아버지가 아무리 늦게 들어오더라도, 밖에서 마작을 하고 들어오든 기생집에 갔다가 들어오든, 그녀는 반드시 기다렸고, 시아버지가 잠이 든 후에 비로소 가서 쉬었다. 그녀가 바로 좋은 며느리였다. 그런데, 육소만이라는 이 불여우는 그저 자신의 아들을 해치고만 있었다.

 

부모가 떠나가자, 사랑에 빠져있던 젊은 부부는 노인의 원망과 불만을 비로소 깨달았다. 두 사람은 난감해져서 협석을 떠난다. 상해로 옮겨가서 속세의 생활을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