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선진)

중국고대 유머에서의 지역차별 - 송(宋)나라

중은우시 2008. 7. 23. 15:03

글: 왕학태(王學泰)

 

플라톤은 웃음이 일종의 고상하지 않은 감정이라고 한 바 있다. 왜냐하면, 웃음은 왕왕 자기보다 사소하게 불행하거나 결핍된 것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이 말은 보편적으로 적용된다고 할 수 없으므로, 후세인들이 비판할 수는 있다. 그러나 확실히 "다른 사람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라는 색채가 있는 것은 사실이고 이것은 모두 알고 있는 바이다. 플라톤은 이런 누구나 알고 있는 컨센서스를 말로 표현한 것일 뿐이다. 당연히 이러한 '불행'이나 '결핍'은 '사소한' 범위내의 것일 때이다. 그것이 크게 되면 반대의 효과가 난다.

 

중국고대의 유머(우스개)도 마찬가지이다. 역대의 우스개중에서 많은 것들이 다른 사람의 결핍이나 불행을 비웃는 것이다. 문화수준이 높은 사람이 문화수준이 낮은 사람을, 도시 사람이 시골 사람을, 관료가 일반 백성을, 일반백성이 관료를, 잘나가는 사람이 운나쁜 사람을...이러한 우스개는 선진(先秦, 진시황의 진나라통일이전시기)의 제자백가에서 시작되었다. 선진시대의 제자백가는 모두 철학가이고, 사상가이다. 어떤 사람은 철학이 '총명학'이라고도 했다. 그렇다면, 제자백가는 모두 총명한 사람이다. 총명한 사람은 자연히 멍청한 사람을 그냥 두고보지만은 않는다. 자기의 장점을 내세워 다른 사람의 단점을 비웃기를 좋아한다. 그리하여 각양각색의 '멍청한 사람'의 희극적인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 이들 희극적인 이미지는 혹은 도덕적인 문제 혹은 지적인 문제로 인하여 우스운 일들을 벌이게 된다. 여기에서 서술자는 높은 곳에서 내려보는 태도로 혹은 명백한 차별적인 시선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이런 차별적인 시선에는 선명한 지역차별이 엿보인다.

 

1. 선진 제자백가가 비웃은 대상:

 

춘추전국시대에 유머(우스개)가 있었지만, 그것은 독립된 이야기라기보다는 주로 어떤 도리를 설명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춘추시대부터, 고향을 떠난 사인(士人)들이 각국을 주유했고, 호족에 기식하거나 국군에 유세하면서 그들은 얘기를 나누고, 이치를 설명하면서 유머를 빠트릴 수 없었다. 그때는 유머만 따로 모아서 기록한 책은 없었다. 그저 그들의 저작내에 분산되어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근대의 중국 상성(相聲, 두 사람이 하는 만담과 비슷한 우스개)예술가들은 어떤 지역을 명시적으로 들어 웃기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그 지방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진시대의 제자백가는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우스개를 할 때, 분명하게 "어느 나라 사람"임을 밝혔다. 당시는 여러 나라가 많이 존재하고 있었으므로, 제자백가의 유머에서 비웃음을 당하는 사람은 왕왕 자기나라 사람이 아니라 다른 나라 사람을 대상으로 했다. 예를 들어, 맹자는 추(鄒)나라 사람인데, 그의 저명한 "제나라사람은 일처일첩을 가지고 있다"는 내용에서 그 염치없고, 구걸하면서도 처와 첩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는 사람은 제(齊)나라 사람이다. 즉, 추나라와 이웃한 강국 제나라이다. 송나라사람인 장자는 여러가지 우스개를 얘기했는데, 후안무치한 관료인 조상(曹商)에 관한 것을 제외하고, 송나라사람을 대상으로 한 것은 거의 없다. 한비자는 우스개를 가장 많이 남긴 제자백가인데, 그가 조롱한 대상에 한나라 사람은 없다. 정나라사람도 왕왕 전국시대에 우스개의 대상이 되기도 했는데, 열어구는 정나라 사람이므로 그의 저작 <<열자>>에는 정나라사람을 대상으로 한 우스개는 없고, 제나라와 같은 다른 나라 사람이었다.

 

열자에 나오는 이야기 중에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옛날에 제나라 사람이 금을 가지고 싶었는데, 아침 일찍 의관을 챙겨입고 시장으로 갔다. 황금을 내는 곳에서 황금을 집어가지고 가다가 포졸에게 붙잡혔다. 포졸이 "사람도 있는데 남의 황금을 가지고 가느냐?"라고 하니, 그 제나라 사람은 "황금을 집을 때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고, 황금만 보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그 제나라 사람은 재물에 눈이 어두워 눈이 먼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로써 볼 때, 사상가들이 멍청한 사람을 조롱할 때, 모두 조롱의 대상을 다른 나라 사람으로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다른 나라 사람에 대한 차별의식을 엿볼 수 있다.

 

여러 조롱대상중 가장 많은 경우는 송(宋)나라사람이다. 그 다음이 정(鄭)나라 사람이다. 이것은 한비자에서 가장 분명하다. 그러므로, "송나라사람"과 "정나라사람"은 선진시대의 우스개중에서 이미 전형적인 이미지로 굳어버렸다고 할 수 있다.

 

2. 조롱대상인 송나라사람

 

송나라사람의 멍청함을 보여주는 이야기로 열자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옛날에 송나라에 농부가 살았는데, 마로 된 옷을 입고 겨울을 지냈다. 본말이 되어서 농사를 짓는데, 태양이 내리쬐었다. 그는 이 세상에 고대광실이 있는 줄도 몰랐고, 비단호피가 있는 줄도 몰랐다. 그리하여 처에게 이렇게 말했다: '태양을 등지고 있으면 따뜻한데(負日之暄), 사람들이 이것을 모른다; 내가 군왕에게 말해주면, 후한 상을 받지 않을까?' 그 동네의 한 부자가 그에게 말해주었다: '옛날에 콩밥을 좋은 음식이라고 생각하고, 마줄기, 시금치등을 좋은 요리라고 생각한 사람이 있어서, 자기 동네의 부자에게 가져다 주었다. 그 부자는 한번 먹고는 입으로는 벌레를 씹는 것같았고, 먹은 후에는 배가 아팠다. 그래서 모두 그를 비웃었고, 그는 부끄러워했다. 당신이 꼭 그 사람과 같은 유형이다"

 

이것도 아주 웃기는 얘기이다. 쉽게 만족하는 소인물이 그 자신은 빈곤하게 지내면서도 잠시 편안함을 누리자 그것이 세상 최대의 즐거움으로 생각하고,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이 태양을 등으로 쬐는 즐거움을 군왕에게까지 알려주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윗사람과 아랫사람간에 상호 소통이 되지 않는 것으로 인하여 우스개가 되었다. 작자는 이것으로 송나라농부의 '멍청함'을 비웃은 것인데, 후세인들은 이것을 전거로 하여 충군애국(忠君愛國)의 모범적인 사례로 삼았다. 그리하여 "부훤(負喧)"은 충군애국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이를 보면 충군애국에는 어느 정도 '멍청한' 요소가 있는 것이 맞는 것같다. 극단적으로 충군애국하는 사람을 곁에서 보면 항상 어느 정도 '멍청하다'고 느끼기 마련이다.

 

열자에는 이외에도 여러가지가 있다 예를 들면,

 

<<천서편(天瑞篇)>>의 "향씨위도(向氏爲盜)"에 나오는 '향씨'는 제나라사람인 국씨(國氏)로부터 돈버는 법을 배우고 싶어한다. 국씨는 하늘과 땅사이의 재물을 개발하는(도둑질)데 능한 사람이다. 향씨는 그 후에 이웃들의 집에 들어가서 눈에 띄는 것은 모두 가지고 온다. 결국은 붙잡힌다.

 

"양주과송(楊朱過宋)"에서는 여관집 주인이 미추(美醜)를 볼라봐서 못생긴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안다는 것으로 송나라사람의 멍청함을 비웃는다.

 

나중에 <<맹자>>에서는 "알묘조장(?苗助長, 빨리 자라게 하기 위하여 싹을 조금 뽑아놓는다는 이야기)"의 주인공도 송나라 사람이다.

 

<<장자>>에서 "단발문신(斷髮紋身, 머리카락을 자르고 몸에는 옷을 입지 않고 문신을 하는 것)"의 월나라땅에 가서 모자와 의복을 팔아서 돈을 벌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송나라사람이다.

 

<<장자>>에는 또한 "불균수지약(不龜手之藥, 손이 갈라지지 않는 약)"을 잘 만든 사람도 송나라사람이다. 그런게 결국 다른 사람에게 이용당해서 다른 사람 좋은 일만 시킨다.

 

<<한비자>>의 수주대토(守株待兎)의 주인공도 송나라 사람이다.

 

<<전국책>>, <<회남자>>에서 한나라때의 <<논형>>에 이르기까지 모두 송나라사람들의 멍청함을 비웃는 우스개가 실려 있다. 제자백가들이 보기에 송나라사람들은 잔머리를 굴려서 일은 해내지만 그 본질은 멍청하다고 본 것같다.

 

열자의 설부(說符)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송나라사람이 길을 가다가, 다른 사람이 잃어버린 차용증을 주웠다. 가지고 와서 숨겨두고, 차용증에 나오는 거액의 금액을 보고 기뻐했다. 이웃사람에게 '나는 이제 금방 부자가 될 것이다'라고 자랑했다"

 

이 우스개에 나오는 송나라 사람은 너무 기민해다. 그는 길거리에서 잃어버린 차용증을 주웠는데, 아무도 모르게 집으로 가져왔고, 숫자를 보니 적은 금액이 아니다. 그리하여 기뻐 어쩔 줄을 모른다. 그런데, 누가 누구에게 빌렸는지도 모르는 차용증을 하나들고 있다고 하여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송나라사람들은 "솜씨가 뛰어나지만" 결국은 "쓸모가 없는" 경우로 비웃음 당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송나라사람이 가시의 끝을 가지고 어미원숭이를 조각하고, 상아를 이용하여 나뭇잎을 조각하는데 3년이 걸려서 완성했다. 조각한 나뭇잎을 진짜 나뭇잎의 사이에 놔두어도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기 힘들 정도였다. 열자는 이렇게 비판한다 "삼년이라고 할 것도 없다. 대자연에서 1년에 나뭇잎이 1개만 자란다고 치면 나무가 어떻게 되겠는가?" 송나라사람은 조각을 잘해도 비웃음을 받았다.

 

<<한비자>>는 군신관계를 설명하면서 송나라에서 술을 잘 빚는 장씨를 예로 들었다: 송나라에 술을 잘 빚는 장씨가 있었다. 술이 아주 맛있었다. 종을 시켜 장씨의 술을 사오게 시키면, 장씨집 개가 사람을 물어서, 종이 장씨집에 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의 집에서 술을 사왔다. "왜 장씨집에서 술을 사오지 않았는가?"라고 물으면, 종은 "장씨집 술은 시었습니다"라고 답했다. 개를 죽이지 않는다면 술은 시어버릴 것이다.

 

장씨의 술은 아주 맛있지만, 아무도 사지 않는데, 술이 시어버릴 때까지 아무도 찾지 않는다. 그 원인은 자신의 집에 기르는 흉맹한 개때분이다. 사람들이 사려고 왔다가도 그냥 가는 것이다. 술은 잘만드는 장씨가 팔아먹지는 못한다. 이것은 송나라사람들이 작은 재주는 있지만, 큰 일은 제대로 못한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지금 이 이야기를 읽다보면 조금은 다른 느낌을 받게 된다. 이들 우스개에 나오는 송나라 사람들은 손재주가 뛰어난 사람, 능력이 있는 사람이 적지 않다. 어떤 사람은 "불균수"의 약을 발명하고, 어떤 사람은 모자와 의복을 잘 만들고, 어던 사람은 미세한 조각을 잘 하고, 어떤 사람은 술을 잘 빚는다. 제자백가는 이러한 송나라사람들의 장점을 칭찬하지는 않고, 오히려 장점을 빌어 그들의 단점을 더욱 드러내는데 쓴다(烘托). 이는 분명하게 송나라사람들에 대한 선입견이나 편견이 작용한 것이다. 그들의 차별심리가 작용하여 비뚤게 보게 된 것이다.

 

어떤 우스개에서는 송나라사람들의 덕행(德行)이 지적받기도 한다. <<장자>>에 나오는 송나라 사신 조상(曹商)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송나라에 조상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송나라 왕이 진나라에 사신으로 보냈다. 그가 사신으로 떠날 때 마차 몇 대를 받아서 갔다. 진왕은 그를 좋아해서 그에게 마차 백대를 하사했다. 조상은 송나라로 돌아온 후 장자를 만나서 자랑했다: "좁고 답답한 골목에서 살면서, 돈이 없어 짚신을 짜면서, 마른 목과 누런 귀를 하고 지내는 것은 나 조상이 잘 하는 것이 아니다; 한꺼번에 만승의 군주를 만나서 백대의 마차를 얻어내는 것이 바로 나 조상이 잘하는 분야이다" 그러자, 장자는 말했다: "진왕은 병을 얻어 의사를 부르면, 종기나 부스럼을 치료해주는 자는 마차 1대를 주고, 치질을 핥아주는 자는 마차 5대를 준다. 치료해주는 부위가 더 천할 곳일 수록 얻는 마차는 더욱 많아지게 된다. 너는 분명히 치질을 핥아준 정도가 아닐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마차를 100대씩이나 받았겠는가?. 나에게서 멀리 떨어져라."

 

이 이야기는 정말 악독하다. 조상이 스스로 자초한 측면은 있다. 그는 송나라와 진나라에서 상을 하사받은 후 득의만면해서 경박하게 입을 놀린 점은 있다. '세치의 혓바닥으로 군주의 마음을 움직여 1백대의 마차를 얻어내는 것이 내가 잘하는 것이다' 조상은 스스로의 재능을 자랑하면서 은근히 장자의 무능을 비꼬고 있다. 게다가 진나라는 호랑이와 늑대의 나라로, 법가나 종횡가가 누빌 수 있는 곳이지 자존심있는 선비들이 갈 곳은 아니다. 조상이 진왕의 상을 받은 것이나 진나라 자체를 장자는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고의로 진왕의 치질을 핥았다는 비유를 통해서 그를 조롱했다. 장자 자신이 바로 송나라 사람이다. 자기 나라 사람에 대한 이해는 분명히 깊었을 것이다. 그는 자기 나라 사람이 멍청하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중에는 확실히 아부하면서 중간에 이익을 취하려는 소인이 있었다. 이런 류의 소인은 어느 나라에나 다 있다. 다만 자기가 태어난 나라에 이런 자가 있다는 것은 더욱 큰 고통이고 더 미워하게 되는 것이다.

 

3. 왜 송나라사람이 대상인가

왜 우스개는 자주 송나라사람이 관계되는가? 그리고, 주변의 각 나라 사람들은 송나라사람을 놀리면서 즐거워했을까? 왜 춘추전국시대사람들은 송나라사람들의 이런 저런 것을 가지고 조롱의 대상으로 삼았을까? 그 원인은 아마도 아래와 같은 몇 가지일 것으로 생각한다:

 

첫째, 송나라는 상(商)나라의 은족(殷族)의 후예가 건립한 것이다. 상나라가 망한 이후, 제사가 끊기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주왕의 아들인 무경을 두었으나, 무경이 반란을 일으키자, 주왕의 서형(庶兄)인 미자계(微子啓)를 송공(宋公)으로 삼는다. 그리하여 송공은 은나라의 제사를 계속 지낸다. 이것이 바로 송나라이다. 소재지는 하남성 상구(商丘) 일대이다. 송나라의 국군은 항상 스스로를 "망국지유(亡國之遺)"라고 했다. 이것은 사실이다. 실패자는 약자이고, 강자는 약자를 조롱한다. 이는 하나의 철칙이다. 미장의 사람은 아Q를 조롱하고 아Q는 다시 소D나 소니고를 조롱하는 것이 그 예이다.

 

둘째, 송나라의 봉작은 "공(公)"이다. 이는 주나라 초기에는 가장 높은 것이었다. 이와 비견되는 것은 주공(周公)의 봉국(封國)인 노(魯)나라 정도였다. 심지어 강상(姜尙, 강태공)의 봉국인 제(齊)마저도 겨우 "공"보다 한단계 낮은 "후(侯)"의 작위였다. 송나라는 작위는 높은데(묵자는 초나라가 송나라를 치는 것을 백만갑부가 몰락한 집안을 훔치는 것과 같다고 비유했다). 춘추시대에 싸우면 항상 졌다. 다른 제후국의 통치자들은 송나라에 대하여 질투하면서도 멸시했다. 이렇게 조롱함으로써 아마도 질투에서 비롯된 심리적인 고통을 풀어버렸는지 모르겠다.

 

셋째, 송나라는 은족(殷族)의 후예인데, 다른 여러 나라의 통치자들은 주(周)나라의 희족(姬族)이다.  주나라와 은나라의 두 족은 문화차이가 컸다. 왕국유는 <<은주제도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중국정치와 문화의 변혁은 은주교체기만큼 극적인 경우가 없다."고 하였다. 비록 은족이 주나라의 봉작을 받아 송나라가 된 후에, 정치제도적으로는 완전히 은상(殷商)의 것을 유지하며 조금도 변화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어느 정도 주나라에 잘보일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문화습속에서는 은족의 것을 많이 유지하고 있었다. 공자는 만년에 꿈을 꾸면서, "두 기둥의 사이에 제사지내는 것"을 본 후에 이것은 은나라의 습속인데, 자신은 은나라의 후예이니, 아마도 천수를 다 한 것같다고 말한다. 이로써 볼 때 은나라 사람들은 주나라사람들과는 다른 습속을 많이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아마도 송나라가 주변의 여러 주나라 희씨성을 가진 제후들로부터 자신들과는 다른 류로 보아 멸시당하고 따돌림당하는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송나라사람들은 자연히 주나라 희씨제후들로부터 조소를 받게 되었을 것이다. 은족은 그들이 보기에 모든 것이 가소로웠을 것이다. 그리하여 후대에 사람들이 우스개를 할 때면 송나라사람을 모델로 들먹이게 되었을 것이다.

 

넷째, 서주가 춘추시대에 들어선 후, 제후국간의 전쟁이 빈번했고, 정치역량이 재조정되었다. 원래의 귀족제도는 해체되고, 귀족사회의 게임법칙은 점차 소실된다. 기괴한 것은 국력은 중하급인 송나라는 여전히 경쟁에 적합하지 않은 여러가지 귀족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송양공(宋襄公)은 초나라와 전투를 하면서, "상대방이 진열을 정비하지 않았는데 공격을 개시하지 않는다(不鼓不成列)"라고 하고, "나이많은 군인은 죽이지 않는다(不殺二毛)"라고 하는 등등의 방식은 모두 귀족전쟁의 게임법칙이다. 춘추시대에는 이미 적용되지 않는 것이었다. 모택동이 이를 '멍청한 돼지의 인의도덕'이라고 말한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좌전>>을 보면 송나라는 다른 나라와 전투를 할 때, 자주 우스개거리로 등장한다. 이로써 볼 때, 춘추시대의 사람들은 송나라의 통치자와 은족의 사람들의 방식에 대하여 조소하는 태도를 지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좌전. 선공2년>>에는 송나라와 정나라의 전투에 대하여 적고 있다. 그런데, 전투내용을 적은 것이 거의 코미디 수준이다:

 

"정나라 공자 귀생이 초나라의 명을 받아 송나라를 정벌하려 했다. 송나라의 화원(華元), 낙여가 장수가 되어 이를 막았다....송나라의 장군중에 광교라는 자가 있는데, 적극적으로 전투에 임했다. 그러다가, 정나라의 사람이 우물로 몸을 던지는 것을 보고는 가진 창을 뻗어서 정나라사람이 우물에서 빠져나오도록 해준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정나라사람은 광교를 다시 포로로 잡는다. 화원은 양국의 군대가 대치할 때 포로로 잡히는데, 그 경위는 이렇다. 그가 전쟁전에 연회를 열었는데, 깜박 잊고, 자신의 전차어수(戰車馭手)인 양짐(羊斟)에게 양고기를 나눠주지 않았다. 두 나라 군대가 서로 싸울 때, 이 양짐이라는 어수는 "양고기를 나누는 것은 네 맘대로 하지만, 전쟁에서 싸울 때는 내 맘대로 한다"고 하면서 전차를 몰고 적진의 한가운데로 돌진했다. 그리하여 화원이 포로로 잡힌 것이다. 나중에, 송나라는 100량의 전차와 400필의 전마를 주고 화원을 되돌려받게 된다. 이 속금(贖金)을 절반 지급했을 때, 화원은 정나라에서 도망쳐 나와 송나라의 도성으로 도망쳐 온다. 그는 성문앞에서 이름을 대며 들여보내달라고 하였다. 양짐이 먼저 뛰어나왔다. 화원은 그를 보고, "네 잘못이 아니다. 네 말이 문제있는 것이지 않느냐?"라고 말한다. 그런데, 양짐은 "내가 고의로 한 것이지, 말의 잘못이 아니다"라고 답한다. 양짐은 화원에게 대답을 마친 후, 바로 노나라로 도망쳐 버린다. 송나라는 성벽을 강화하고, 정나라의 재침입에 대비했다. 화원은 이 모든 일을 주재한다. 한번은 그가 공사현장을 순시하는데, 성을 쌓는 민공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큰 눈은 부릅뜨고, 배는 내밀고, 패군지장이 아주 기세등등하구나. 짙은 수염은 온 뺨을 뒤덮고, 투구와 갑옷을 다 버리고 도망쳐 왔다' 그러자 화원은 자기의 부하를 시켜 이렇게 노래로 대답하게 했다: '소에게는 모두 가죽이 자란다. 광여의 물소는 아직도 많다. 갑옷잃어버린 것이 무슨 대수냐?" 그러자, 그 성을 쌓던 민공은 다시 노래했다: "물소가 모두 가죽을 가지고 있지만, 어디가서 기름칠할 것을 찾겠는가?" 그러자 화원은 곁에 있는 부하에게 "저들이 사람이 많으니, 우리가 말로써는 당할 수 없겠다. 빨리 벗어나자" 이것은 송나라의 전쟁기록이고, 송나라사람들의 성격을 드러내는 것이다. 광교라는 사람은 용맹하면서도 선량하다. 전쟁의 장수로는 적합치 않다. 화원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귀족의 교양, 용감, 제도준수, 예절, 관용이 있고, 항상 사람들에게 여유있게 대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그들을 패전으로 이끈다. 그리하여 갑옷을 버리고 도망친 패장이 되는 것이고, 이런 좋은 성격과 장점들이 모두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다. 위로부터 아래까지, <<좌전>>의 작자는 송나라사람이라면 하나도 봐주는 법이 없었다. 상대방과의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이 유일한 가치척도였던 것이다. 다른 것들은 모두 무시해도 좋았다. 후세인들이 자주 얘기하는 "이기면 왕이요, 지면 도적이다"라는 것이, 사실은 이때부터 시작한다. 이처럼 격력한 경쟁에서, 승리를 유일한 기준으로 삼던 시대에 송나라 사람들은 웃음거리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