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선진)

하(夏)왕조는 존재했는가?

중은우시 2009. 1. 9. 23:34

작자: 미상

 

 

 

 

 

최근들어 한가지 소식을 들었다. 국내에 하왕조가 존재했는지에 대하여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본인은 하왕조와 은왕조의 역사에 대하여 연구를 해본 바 있으며, 심득(心得)이 있어, 그 작은 성과를 여러분들에게 알리고자 한다.

 

상고시대때, 우두머리를 승계할 때는 추천방식을 사용했다. 현명하고 능력있는 사람이 후계자가 되는 것이다. 역사는 이를 "선양(禪讓)'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요임금은 순임금에게, 순임금은 우임금을 추천해서 후계자로 삼았다. 다만 우임금이 죽은 후, '선양'은 지속되지 않는다. 우의 아들인 계(啓)가 여러 사람이 추천한 후계자를 물리치고 자신이 대왕에 오른다. 그리고 중국역사상 첫번째 부자로 계승되는 가천하왕조 하왕조를 만든다. 이후 이런 왕조모델은 중국에서 4천여년간 지속되었다. 하왕조는 모두 13대에 걸쳐 400년간 지속되었다. 중간에 전상상의 사일영웅(射日英雄) 후예(后羿)가 잠시 정권을 탈취한 일도 일어난다. 마지막에 최후의 하왕 걸이 포악무도하여, 상족부락의 수령인 상탕에 의하여 멸망하고, 상왕조(은왕조)가 탄생한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알고 있는 중국역사상 최초의 왕조인 하왕조이다. 그런데, 서방인들은 하왕조의 존재를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다. 서방에서 중국역사를 연구한 권위있는 저작인 <<캠브리지 중국상고사>>를 뒤져보면, 아예 하왕조라는 편은 없다. 서양인들은 중화문명은 위대한 은왕조에서 시작하고, 하왕조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보고 있다. 이것은 무엇때문인가?

 

서방인들은 과학적이다. 그리고 아주 고집스럽다. 중국인들처럼 변통할 줄도 모르고, 모든 것을 지도자의 뜻에 따라 처리하는 의식도 없다. 역사에 대하여 그들이 견지하는 것은 두 가지 유형의 증거이다. 하나는 충분히 믿을만한 역사문헌자료이고, 다른 하나는 고고실물(考古實物)이다. 아름다운 전설은 인정하지 않는다. 처음에 서방은 은왕조도 인정하지 않았다. 나중에 갑골문(甲骨文), 청동기(靑銅器)의 발견과 은허(殷墟)의 발굴로 그들은 크게 눈을 떴다. 즉시 역사서를 고치고 연구를 시작한다. 중국도 '백일유신'이후 양계초를 대표로 하는 신사가(新史家)들이 서방사상을 받아들여, 중국역사에 대하여 심각하게 반성하고 연구하기 시작한다.

 

먼저, 문헌자료측면을 보자. 하왕조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하왕조에 관한 이야기가 역사서에 분명히 쓰여있지 않은가? 그러나, 외국학자들은 이 하왕조에 대한 역사기록은 실로 너무나 허황되며 증거가 너무나 모자란다는 것이다 하왕조의 상황을 기록한 문자는, 하왕조의 연대(만일 그것이 존재하였더라면)보다 1000여년이나 이후에 기록되었다. 중국역사상 하왕조의 역사를 기록한 현재 주요한 것은 두 개의 사서이다. 하나는 서주초기의 문헌이라고 말해지는 <<상서(尙書)>>이다. 안에는 역사상 "유하(有夏)" 혹은 "하(夏)"가 있었다. 주나라초기의 저명한 정치가 주공(周公)은 이렇게 말하였다. 하왕조는 원래 천명에 따라 세워졌다. 통치한 기간도 짧지 않다. 다만 그들의 후손들이 잘못하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상왕조의 통치자들에게 혁명을 당해 쫓겨났다. 어떤 사람의 고증에 따르면, <<상서>>에서 하왕조에 대하여 언급한 그 몇편의 글은 사실은 춘추전국시대의 사람이 위조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때는 이미 하왕조가 멸망한지 천년이 된 때이다. 다만, 곽말약은 <<상서>>를 진(晋)나라사람이 위조했다고 본다. 하왕조역사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것은 당연히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꼽아야 한다. 여기에는 대우치수, 소강실국, 하걸망국등 여러 건의 대사가 기록되어 있다. 그 후에 하왕의 이름을 일대 또 일대 나열해놓았다. 그러나, 당시는 이미 하왕조가 멸망한지 1500년이 지났다.

 

가장 불가사의한 점이라면, 은나라사람들이 아예 하왕조를 모르는 것같았다는 것이다. 이미 출토된 10만편이 갑골문에 "하(夏)"라는 글자는 나타나지 않는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상탕(商湯, 즉 殷湯)은 하왕조를 멸망시키고 은나라를 개국했다. 갑골문에 그를 제사지내는 복사(卜辭)가 680여조나 된다. 비록 공덕을 찬미하는 여러가지 말들이 많지만, 하왕조를 무너뜨렸다는 큰 공덕은 언급되어 있지 않다. 많은 갑골문에는 은왕조건립이전의 선왕들에 대하여도 기록하고 있지만, 하왕조의 제후라면, 이런 갑골에 어찌 하왕조에 대하여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을 수 있을까? 강대한 은왕조는 갑골문과 청동기의 명문에서 전대인 하왕조에 대하여 여하한 기록도 남기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얼마나 황당한 이야기인가? 은왕조가 첫번째 왕조가 아니라면 이런 일은 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첫째왕조라면 앞에 아무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의 왕조를 건립하는 것과 같은 천번지복할 큰 일이라면, 개성이 분명한 은왕조 사람들은 분명히 거북껍찔이나 뼈다귀 위에 미친 듯이 새겨넣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문자의 출현은 문명시대의 가장 주요한 표지이다. 하왕조의 문자는 지금까지 우리가 본 적이 없다. 갑골문의 발견은 현대고고학 최대의 흥분점이다. 우리는 후세사가들에게 지금까지 전해내려오는 삼황오제의 고대사체계는 모두 허구이다. 하왕조도 마찬가지로 기록이 없다.

 

다음으로 고고실물의 측면을 보자. 하왕조에 대하여 은왕조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청동기나 문자를 찾아낸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2002년 중국보리그룹은 외국에서 서주시대 중기의 청동기인 "빈공수(豳公)를 구매했다. 녹을 제거한 후에, 이 청동기의 명문이 모조리 드러났다. 기록된 것은 대우치수(大禹治水)의 위업을 기록하고 있었다. 다만 하왕조에 대하여는 전혀 언급이 없어서 고고학자들을 우울하게 했다.

 

1959년, "이리두(二里頭)"문명유적이 발굴된다. 4000년전에 이곳에서는 일찌기 궁전건축과 사방에 다듬어진 넓은 돌도 있었고, 이만여명의 주민이 살았다. 시간, 장소는 모두 사서에 기재된 하왕조와 일치했다. 고고학자들은 미친듯이 좋아했다. 아쉽게도 힘껏 흙을 파고, 땅에 땀방울을 흘렸지만, 그래도 하왕조로 판정할 여하한 기물도 발견되지 않았다. 더더구나 하왕조와 관련된 여하한 문자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 유적지는 또 다른 저명한 은왕조의 유적지인 언사(偃師) 상성(商城)에서 6킬로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은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은나라사람들이 만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 하나 중요한 논쟁이 있다. 그것은 하왕조를 인전하는 역사학자들에게는 회심의 일격이다. 그것은 바로 현재 발견된 갑골문은 이미 아주 성숙되었고, 청동기의 제작수준도 상당히 높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꺼번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분명히 발전의 과정이 필요하다. 그래서 은왕조이전에 반드시 신비의 왕조가 있어야 비로소 찬란한 문명을 연이어갈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어느 정도 이치에 맞는 말이다. 그러나, 왜 은왕조사람들이 자신의 문명을 발전시킬 수는 없는가? 우리가 발견한 문자와 청동기는 모두 은왕조 후기의 것들이다. 기록에 따르면 은왕조는 600여년간 존속했다. 그들 이전의 은족(殷族)은 계속하여 산동과 발해만에 수백년간 거주했다. 이 기간동안 그들은 충분히 문명을 발전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나의 상상은 이렇다. 신석기시대에 은왕조와 하왕조의 문명은 두 개의 평행적으로 발전하는 문화계통이었다. 중원의 하족은 여러 부락으로 구성되었고, 은족은 그들을 통칭하여 "제하(諸夏)"라고 불렀다. 나중에 은족의 문화발전이 신속하여 중원의 각부락을 훨씬 초월했다. 그래서 그들은 서쪽으로 진격했고, 점차 제하를 쫓아내거나 멸망시켰다. 탕왕에 이르러 정식으로 당시 세계일류의 대제국을 건설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