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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학/무협소설

김용(金庸)은 우리에게 어떤 꿈을 만들어 주었나?

by 중은우시 2009. 1. 22.

글: 오사(吳思)

 

왕자가 신데렐라를 사랑하게 되고, 미운 오리 새끼가 백조로 바뀐다는 이런 유형의 동화가 유행하고 열기가 식지 않는 이유는 바로 신데렐라와 미운 오리 새끼들이 읽기를 좋아하고, 재미를 느끼기 때문이다. 그녀들에게는 이런 백일몽이 필요하다. 이런 수요가 있기 때문에 서로 다른 시대와 서로 다른 지역에서 많은 신데렐라동화의 변종이 나타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제인에어>>가 바로 신데렐라의 영국근대판이다.

 

일찌기 어떤 사람이 말한 바 있다. 무협소설은 어른들의 동화라고. 요즘 김용이 만든 성인동화는 한어세계를 풍미하고 있다. 2001년 다시 대거 영화, 드라마 분야로 진군하여, 대중문화의 여러 영역을 석권해버렸다. 그렇다면, 김용이 우리에게 어떤 꿈을 엮어서 보여주는가? 중국을 석권한 백일몽은 무엇으로 구성되었는가? 이렇게 중독된 것처럼 김용을 읽어대는 것은 우리의 내심과 우리의 사회의 어떤 것을 드러내는가? 김용의 무협에 대한 상상력은 색채가 현란하다. 그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바로 일종의 초인적인 능력을 가지고, 자신이 폭력의 침범과 상해를 받지 않도록 보호하면서, 자기는 오히려 마음먹은대로 다른 사람을 상해하는 능력을 지니는 것이다.

 

당연히, 다른 사람을 상해할 능력을 가졌다고 하여, 이런 능력을 반드시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무협은 대협객(大俠)이라고 칭할 수 있는 사람은 반드시 무덕(武德)을 지녀야 하고, 천도(天道)를 준수하여야 한다. 초인적인 폭력을 사용하여 사람을 해치지 말아야 할 뿐아니라, 약자를 보호하고, 불공평한 경우를 만나면 칼을 뽑고 나서서 도와주어야 한다. 무협은 바로 자신의 힘으로 정의를 세우는 사람이고, 하늘을 대신하여 천도를 행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이런 사람이 되고싶은가? 만일 한번 생각해보고 다시 대답해야 한다면, 좋다. 아래의 몇가지 조건을 유의해보라.

 

첫째, 이런 사람이 되는 문턱은 아주 낮다. 특수한 가정배경과 초인적인 자질도 필요없다. 우리같은 보통사람도 될 수 있다. 되고난 후에 특별히 많은 고통을 겪을 필요도 없고, 이상야릇한 몇번의 기우를 만나서 일반인들이 십년 내지 수백년간 익혀야 얻을 수 있는 쿵후를 얻는다. 이런 쿵후를 지니면, 주육을 금할 필요도 없고, 여색을 멀리할 필요도 없다.

 

둘째, 일단 이런 사람이 되고 나면, 미녀가 항상 있다. 통상적으로는 하나만도 아니다. 미녀들이 방심을 남몰래 허락할 것이고, 너의 생활은 월영화향(月影花香)이 충만하고 정취가 넘치게 될 것이다.

 

셋째, 너의 존성대명(尊姓大名)은 강호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고, 존경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이 명성을 이용하여, 먹고싶은대로 먹고, 가고싶은대로 갈 수 있고, 좋은 옷과 아름다운 집을 가질 수 있고, 또한 걸핏하면 수백냥의 은자가 그냥 들어온다(보통사람의 1년수입이 20냥에 불과하다), 육체노동을 할 필요도 없고, 영원히 시미유염(柴米油鹽)과 같은 자잘한 일에 신경쓸 필요가 없다.

 

넷째, 법률은 너를 어떡하지 못한다. 사람을 엄청나게 죽이더라도, 대협들은 지명수배를 당하거나 도망칠 필요가 없다. 야간수색을 당하지도 않고, 신분증도 필요없고, 객잔에 들어가더라도 이름을 등기할 필요도 없다.

 

사실, 이것들이 다 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저 한두개면 나는 만족한다. 공자는 말했다. 만일 부유함을 구해서 얻을 수 있다면, 채찍을 드는 것과 같은 일이라도 나는 하겠다고. 만일 구할 수 없다면, 나는 그저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겠다고(논어. 술이편). 김용의 소설속에서의 대협은 부자이면서 고귀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데, 그것이 마침 정의로운 일이고, 다른 사람들을 감격시키는 일이다. 이런 완전무결하게 좋은 일이 나에게 생기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우리는 당연히 알고 있다. 정의를 보호하는 것은 골치아픈 일이라는 것을. 현대사회에 경찰관, 변호사와 법관들이 많은 인력, 물자를 들이고, 무수한 심혈과 골치를 썩어가면서, 억지로 한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유지된다고 반드시 볼 수는 없다. 그런데, 무림고수 하나가 단기간내에 시비를 가리고, 폭력으로 공평과 정의를 유지한다는 것은 그저 신화일 뿐이다. 그리고, 신화는 골치아파서도 안되고, 신경을 많이 써서도 안되는 이야기일 뿐이다. 우리는 골치아픈 것을 싫어하고, 신경쓰는 것을 싫어하고, 구속받는 것을 싫어하고, 합작하는 것을 싫어하고, 복잡한 인간관계를 처리하는 것을 싫어하고, 복잡한 조직절차에 들어가는 것을 싫어하며, 복잡한 법률조문을 외우는 것을 싫어한다. 우리의 환상은 이 모든 골치거리를 모조리 제거해 버리고, 아무런 댓가도 지불하지 않고 무당이 신령을 부르는 것처럼 정의를 공중에서 불러내는 것이다. 원래, 우리의 백일몽은 정의감에 넘치는 게으름과 환상일 뿐이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 초인적인 폭력을 갖고, 폭력의 위협을 당하지 않으면서, 폭력으로 자신의 의도를 관철시킬 수 있을까? 도대체 어떤 사람이 의식주에 걱정없이 부유하면서 고귀하고, 곁에는 미녀들이 구름처럼 많을 수 있을까? 이처럼 정의를 세우는 지위를 가지고, 폭력에 의지하여 입법과 집행 권위를 가지는 사회적 역할은 중국역사상 단 1명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황제이다. 황제의 생활은 바로 중국인이 상상할 수 있는 인간세상의 가장 행복한 생활이다. 그러나 김용은 우리에게 황제보다도 더 행복한 인물을 만들어내서 보여주었다. 그것은 바로 대협(大俠)이다. 황제는 어느 정도 자유스럽지 못하고, 매일 조회를 해야 하는 의무가 있고, 공문서를 처리해야 하는 의무가 있어서, 늦잠을 잘 수도 없고, 자유롭게 민간을 돌아다닐 수도 없고, 어쩔 수 없이 많은 구속을 감수해야 한다. 명나라의 정덕제는 이를 고통스러워하여 문관들과 일생동안 다투었다. 무협에는 이런 골치아픈 일이 없다. 이것은 싫어하는 의무에서는 해방되는 것이고, 마음껏 자유만 누리는 역할이다. 자신의 마음 이외에 그를 구속하는 역량은 없다. 결론적으로, 무협의 꿈은 바로 중국남자들의 개량된 황제몽(皇帝夢)이다.

 

나는 인정한다. 김용은 황제제도에 대하여 상당한 반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무릇 천하통일을 하려는 야심을 가진 인물은 거의 모두 부정적인 인물로 그려졌다. 다만, 황제의 입장이 되어서 생각해보라, 자신의 침대옆에서 다른 사람이 단꿈을 꾸는 것을 어찌 용납할 수 있겠는가? 천하통일은 사직의 안전을 위하는 논리에 부합하는 행위이다. 대협은 독보천하의 무공으로 여하한 위협도 받지 않지만, 황상은 자신에 대항하는 사람을 제거함으로써 비로소 위협을 받지 않을 수 있다. 절대적인 안전을 추구하는 의미에서는 절정무공을 추구하는 사람이나, 천하통일을 추구하는 사람이나, 실은 같은 유형이다.

 

사실, 개량한 황제몽도 나쁠 것은 없다. 나는 좋아한다. 황제몽중에는 많은 것들이 있다. 이는 인류보편의 환상과 갈망이다. 예를 들어, 공정, 강대, 존경을 받는 것, 의식주의 걱정이 없을 것, 미녀가 많을 것, 안전, 성취가 있을 것, 정의를 세울 것, 게으름을 피울 것, 구속을 받지 않을 것, 재미없는 힘든 일을 하지 않는 것 등등이다. 우리는 당연히 알아차릴 수 있다. 이런 환상은 간단하고 유치할 뿐아니라, 그 자체적으로 모순이라는 것을 다만 우리가 원하는 꿈은 바로 이처럼 간단하고 유치하면서도 자체모순된 것이다.

 

진정한 문제는 원하느냐 아니냐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할 수 있느냐 할 수 없느냐에 달려 있다. 예를 들어, 황상이 향유하는 일부다처제는 여성의 입장에서는 아주 불공정하다. 현대 남자들도 다시는 이런 제도를 진짜로 시도할 엄두를 감히 못낸다. 그리하여, 김용의 붓아래에서는 서방에서 온 일부일처제도의 애정관념이 나타났다. 수백년전의 수호지나 삼협오의와 비교하자면, 김용의 붓아래에서 충효, 의리와 같은 설교는 많이 사라졌다. 사람을 죽이고 눈하나 깜짝하지 않는 야만도 감소되었다. 서방의 인도주의와 자유주의 색채가 가미되었다. 이런 조정을 거쳐, 김용이 만들어낸 꿈은 당대인의 입맛에 딱 맞는다. 당대의 기호를 지닌 양지(良知) 혹은 초아(超我)의 심사를 손쉽게 통과할 수 있다. 왜 무협환상이 중국에서 특히 유행하는가? 우리의 꿈에 맞는다는 것을 제외하면 사회기후와 토양에 아주 적절하기 때문이다. 중국인은 자신의 유구한 역사에서 핵심비밀을 발견했다: 총부리에서 정권이 나온다. 재물이 나오고, 존경이 나오고, 미녀가 나오고, 성공이 나오고, 모든 것이 나온다. 무협에 대한 환상은 사실 바로 총부리에 대한 환상이다. 강대한 상해능력을 보유하는데 대한 환상이다. 중국고전문학에서 유사한 선례가 적지 않다. 손오공, 양산호한은 모두 초인적인 폭력을 지녔다. 그들은 모두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대영웅이다. 비록 이들은 대마두이지만 무공이 고강하여, 사람들이 선망하고 존경하는 대상이 되었다. 평민은 언급할 가치조차 없다. 무림고수들의 눈에, 평민은 그저 그들을 모시는 점소이(店小二)이거나, 혹은 화풀이대상인 점소이이거나, 혹은 그가 구원해주어야 하는 여러 대상일 뿐이다. 이것은 바로 황제의 눈으로 본 백성의 역할이다.

 

우리는 대비해볼 수 있다. 만일 사회와 시대를 바꾼다면, 환상의 대상은 아마도 무협이 아닐 것이다. 억만장자일 것이다. 그것은 바로 서방남자의 환상이다. 이런 환상을 체현하는 작품으로는 백만파운드지폐(The Million Pound Note), 몬테크리스토백작(The Count of Monte Cristo)이 있고, 베스트셀러인 부호의 전기가 있다. 서방남자의 환상은 거대한 부에 집중되어 있다. 다만, 중국에서의 부는 자위능력이 결핍되어 있다. 그다지 환상을 품을만한 대상이 아닌 것이다. 안전과 질서가 결핍된 사회에서는 이익을 획득하는 능력에 대한 환상은 상해를 가하는 능력에 대한 환상만큼 근본적이지 못하고, 그것처럼 아무런 거리낌없이 모든 것을 압도할 수 없다. 즉, 가해능력과 자위능력에 대한 열렬한 환상은 공평과 정의에 대한 열렬한 환상이고, 우리 사회의 결함을 반영한다. 중국의 합법적인 폭력통제자는 오랫동안 직무를 소홀히 하고 있다. 그리하여 공정문제가 아주 심각하다. 우리는 영양불양이고, 우리의 사회는 병이 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들을 흠모하는 것이고, 환상 속에서 이것들을 마구 집어삼키는 것이다.

 

김용의 붓아래에, 남자주인공은 결국에는 이긴다. 자신과 강호의 중대한 위협을 깨끗이 제거한다. 선녀와 같은 아름다운 처를 데리고 홀연히 사라진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더욱 일반적이고 더욱 심각한 문제는 바로 이때 나타난다: 대협이 승리한 이후에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대협은 추살을 피하고, 미인의 마음을 얻고, 각종 위협을 제거하긴 하였는데, 그 후에 어떻게 정상적으로 생활할 것인가? 마치 우리 대다수의 사람들이 매일 부닥치는 문제와 같은 것들을, 그때 그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 입에 풀칠을 하고, 주택을 구입할 것인가? 무술교사를 할 것인가? 너무 무미건조하지는 않을까? 만일 이런 문제를 제기할 수 없다면, 만일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상상은 유행할 수 없다면, 그렇다면, 그것은 아직 그런 문제를 제출할 때가 오지 않았다는 말인가? 우리의 민족은 아직 성숙되지 못했는가? 우리는 아직 동년기를 벗어나지 못했는가? 아니면 우리가 이미 너무 늙고, 너무 게으르고, 너무 피로하고, 너무 무능해서, 어쩔 수 없이 젊은 척해보는 것으로 잠깐동안의 즐거움을 맛보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