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문학/무협소설

양우생(梁羽生): 신파무협소설의 개산비조(開山鼻祖)

by 중은우시 2009. 2. 1.

글: 유계흥(劉繼興)

 

구정 전날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불행한 소식이 들려왔다: 무협소설의 대가인 양우생이 1월 22일 병으로 시드니에서 향년 8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는 것이다. 이 35권의 소설책을 세상에 내놓고, 작품의 자수가 천만자가 넘는 신파무협소설의 개산비조의 죽음은 바로 여론의 촛점이 되었다.

 

양우생의 본명은 진문통(陳文統)이고, 1924년 4월 5일에 태어났다. 원적은 광서장족자치구 몽산현이다. 양우생은 대대로 이어지는 선비집안에서 태어났다. 집안에는 재산도 조금 있어 부유한 편이었다. 그의 집은 요산(瑤山)에 가까워 산이 빼어나고 물이 맑은 곳이다. 이런 가정환경과 지리환경하에서 양우생은 고문을 숙독하고 사장(詞章)을 읽으며 자주 사부(詞賦)를 지었다. 1943년, 광저우의 일부학자들이 난을 피하여 몽산으로 왔다. 태평천국역사의 전문가인 간우문(簡又文)과 돈황학과 시서화로 유명한 요종이(饒宗頤)도 그의 집에 머문 적이 있다. 양우생은 사학자인 간우문을 스승으로 삼아 풍부한 역사지식을 익혔다. 항일전쟁이 끝난 후, 양우생은 광저우의 영남대학(嶺南大學)에서 공부한다. 그의 전공은 국제경제학이었다. 양우생은 중국고전시사와 문사를 좋아했으므로, 1949년 영남대학학장인 진서경(陳序經)은 졸업하는 양우생을 홍콩의 <<대공보(大公報)>>에 소개해준다. 이곳은 바로 양우생이 퇴직할 때까지 일했던 유일한 신문사이다. 처음에는 신문사에서 번역을 맡았고, 나중에는 부간(副刊)의 편집인을 맡았다. 일생동안 공명을 추구하지 않았고, 높은 직위를 바라지 않았다. 그의 <<대공보>> 동료인 김용(金庸)은 나중에 <<명보(明報)>>를 창간하여 국내외에 이름을 날렸다. 두 사람은 친구이다. 그들은 함께 바둑을 두고, 함께 바둑이야기를 썼다. 자주 한담을 나누곤 했었는데, 가장 재미있게 얘기한 것은 바로 구파무협소설이었다.

 

구파무협소설은 <<아녀영웅전(兒女英雄傳)>>이래의 협의소설(俠義小說)과 민국의 구무협작품을 의미한다. 독자층이 좁고, 당시의 사회에서 구파무협소설은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1954년, 홍콩무술계에서는 태극파(太極派)와 백학파(白鶴派)간에 분쟁이 발생한다. 먼저 신문을 통하여 서로 공격한 후, 나중에 마카오의 신화원에 비무대를 만들어 자웅을 결하기로 한다. 태극파의 장문인인 오공의(吳公義)와 백학파 장문인인 진극부(陳克夫)는 문파의 이익을 위하여 목숨을 하늘에 맡긴다는 생사장을 썼고, 비무대위에서 자웅을 결하기로 한다. 이 비무는 홍콩 마카오의 신문들에서 대거 선전함에 따라 전체 홍콩이 들썩거린다. 그날, <<신만보>>의 제목은 "두 권사(拳師)가 4시에 겨루었고, 홍콩에서 5천명이 관전하다"라고 하였다. 독자를 확보하고, 신문의 사회적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하여 <<신만보>>의 편집장인 나부(羅浮)는 양우생에게 원고를 써달라고 부탁한다. 그에게 비무를 주제로한 소설을 쓰라는 것이다. 양우생은 처음에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때 그는 단지 <<신만보>>에 전문가칼럼을 썼지, 소설을 쓸 생각은 하지 않았기 깨문이다. 그러나, 그 편집장은 양우생과의 교분이 있다는 것을 무기로, 비무가 있은 다음날, 직접 신문에, "양우생 무협소설이 매일 신문에 실립니다."라고 광고를 내보냈다. 심지어 대체적인 스토리까지 공개해버렸다: "태극의 명수와 각파 무술가들간에 자웅을 겨우른 이야기이며, 무림명사의 복수와 강호아녀의 사랑이라등이 담겨있고, 최종적으로 경성에서 크게 이름을 떨친다. 이야기는 아주 긴장되니, 독자들이 관심을 가져주기 바란다." 양우생은 어쩔 수 없이 붓을 들 수밖에 없게 되었다. 다음 날, 양우생은 겨우 하룻동안 생각해낸 <<용호투경화(龍虎鬪京華)>>를 연재하기 시작한다. 이 소설은 당시 첫번째 신파무협으로 불리웠던 것이다. 이 소설은 개략 반년간 연재되었고, 독자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는다. 양우생의 무협소설창작은 이때부터 시위를 떠난 화살과 같았다. <<평종협영록>> <<백발마녀전>> <<칠검하천산>>등의 명작이 연이어 세상에 나온다. 소설을 영화로 만들기도 하여, 1960년대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렇게 하여 일대의 신파무협비조가 탄생하게 된다.

 

<<용호투경화>>는 공인된 신파무협의 첫작품이다. 양우생은 신파무협소설의 개산조사로 불리운다. 태극파 장문인인 오공의와 백학파 장문인 진극부간의 마카오 비무는 소문난 잔치메 볼 것이 없다고, 3분만에 오공의의 주먹 한방을 진극부의 코에 명중시킴으로써 끝이 나게 된다. 양우생은 나중에 유머스럽게 말한 바 있다: "이 3분도 되지 않는 비무때문에 나는 30년간 무협소설을 쓰게 되었다."

 

나부는 나중에 어느 글에서 이 일을 언급한 적이 있다. 이 주먹 한방은 50년대부터 80년대에 이르러서도 전혀 수그러들지 않은 해외의 신파무협소설의 시대를 열었다고 하였다.

 

1950년대, 사량용(査良鏞, 김용의 본명), 양우생, 백검당주(百劍堂主)는 함께 무협소설을 쓰고, 사람들은 "삼검객(三劍客)"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한가지 아이디어를 내서, 신문에 전문칼럼 <<삼검객수필>>을 싣는다. 세 사람이 합작하여 삼검객의 호방한 광망을 발산한 것이다. 이는 신파무협의 역사를 증언한다. 1960,70년대는 양우생과 그보다 약간 늦게 소설을 쓰기 시작한 김용이 공동으로 신파무협소설의 깃발을 들었다. 세상에스는 "김량(金梁, 김용과 양우생)을 나란히 칭하면서 유량(瑜亮, 주유와 제갈량)에 비유했다" 양우생과 김용의 공적은 무협소설의 새바람을 불러일으킨다. 당시, 스스로 정규신문사라고 자부하던 큰 신문사들은 모두 구파무협소설을 실어주지 않았다. 무협의 독자는 주로 하층민이었다. 무협소설의 지위는 강호를 유랑하며 길거리공연을 하는 약장수 취급을 당했다. 김용, 양우생이 나타나자, 국면은 졸지에 바뀌어진다. 여러 큰 신문사들이 높은 고료를 지급하면서 앞다투어 실어주었다. 그리하여 독자들도 사회각계각층으로 확대되고, 홍콩, 대만, 싱가포르, 말레이시아에서 졸지에 성행하게 된다. 이리하여 무협소설의 새로운 시대를 연다.

 

1966년, 요청을 받아, 양우생은 "통석지(佟碩之)"라는 필명으로 <<김용양우생합론>>이라는 글을 쓴다. 여기에서는 양자의 차이점을 논했는데, 양우생은 자신은 명사기질이 비교적 농후하고(중국식), 김용은 현대의 '서양재자'라고 하였다. 양우생은 중국전통문화(시사,소설,역사등등)의 영향을 깊이 받은데 비하여, 김용은 서방문예(영화등)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고 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지금도 유효하다.

 

김용에 대하여, 양우생은 나중에 이렇게 평가했다: "나는 기껏해야 새로운 기풍을 연 인물이다. 진정으로 무협소설에 큰 공헌을 한 사람은 바로 김용선생이다. 그는 중국무협소설작가중에서 가장 서방문화를 잘 받아들였다. 여기에는 소설을 쓰는 기법도 포함된다. 그는 중국무협소설을 새로운 높이로 끌어올린 작가이다" 양우생은 자신은 명사풍류를 쓰는데는 재주가 있지만, 김용은 악역인물을 표현하는데 뛰어났다. "사대악인은 가면 갈수록 뛰어나다"

 

진문통은 왜 스스로 "양우생"이라는 필명을 택했을까? 양우생은 나중에 스스로 이렇게 해석한 바 있다. 남북조시대에 "송제량진(宋齊梁陳)"이 있는데, 양나라가 진나라보다 앞선다. 그리고 진나라는 양나라를 승계한 것이다. "우(羽)"는 그가 숭배하는 구파무협소설대가인 궁백우(宮白羽)에서 따왔다고 했다.

 

양우생은 일생동안 모두 36부의 무협소설을 창작했고, 스스로 <<평종협영록>>, <<여제기영전>>, <<운해옥궁연>>의 세 작품을 대표작이라고 생각했다.

 

<<평종협영록>>은 명나라때 토목보(土木堡)의 변을 시대배경으로 한다. 충신 우겸(于謙)이 외롭게 몽골에 저항하는 비극을 그렸다. 그리고 장사성(張士誠, 주원장과 천하를 다투다 실패한 인물)의 후손인 장단풍(張丹楓)과 관료집안의 협녀 운뢰(雲蕾)간의 사랑과 미움의 충돌을 그렸다. 전체적으로 기세가 호방하고, 배치가 잘 되었다. 특히 명사파 대협객인 장단풍이라는 주인공을 잘 묘사했다. 장단풍의 개인적인 협사성격에서 발전하여 일가일성(一家一姓)이 황제위를 다투려는 생각을 철저히 포기한다. 작가는 장단풍이라는 민족대의와 집안대대의 복수 사이에서 내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심리적인 갈등을 아주 잘 묘사하고 있다. 결국은 자신의 생명을 정화, 승화시켜, "위국위민 협지대자(爲國爲民, 俠之大者, 나라를 위하고 민족을 위하는 것이 대협이 할 일이다)"의 전형을 창조한다.

 

<<여제기영전>>은 당나라때 무측천의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종실의 이일(李逸)은 당나라황실을 회복하고자 강호에 투신하여, 널리 천하의 호걸을 끌어모은다. 그리고 재녀 상관완아(上官婉兒), 여영웅 무현상(武玄霜)과 사랑과 원한 애정과 복수가 얽히는 이야기이다. 작자는 상관완아의 무측천에 대한 미움이 존경으로 바뀌는 과정, 궁내를 장악하는 과정을 잘 묘사하고, 대담하게 역사의 기존평가를 뒤집고, 무측천이 국가와 백성에 유익한 일을 하였다고 하였다. 이는 전통관념을 뛰어넘는 쾌거이다. 이일은 궁중투쟁과 이민족침입의 고통 속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역시 이전의 국면과 성취를 뛰어넘었다. 이 소설은 경쾌한 비검시의 대화로 시작하여, 이일이 임무를 완성한 후 전장에서 죽는 것으로 끝맺는다. 독자들의 심금을 울리는 이야기이다.

 

<<운해옥궁연>>은 방탕하고 마음대로 행동하며, 정(正)과 사(邪)를 넘나드는 김세유(金世遺)를 주인공으로 한다. 그가 협녀 곡지화(谷之華)와 마녀 여승남(勵勝男)간을 오가는 애정의 대비극을 그렸다. 이 책의 이야기는 기복이 심하다. 가장 성공적인 부분은 작자가 근대심리학의 수법을 활용하여, 김세유의 세상에 분노하고 질시하는 특수한 정신상태를 잘 묘사했다. 그리하여 김세유에게서는 장 크리스토프(로망롤랑의 작품 주인공)의 그림자가 보인다; 여승남은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사랑의 자유를 추구한다. 역시 카르멘의 화신이다. 김세유는 한마음 한뜻으로 명문정파출신의 곡지화를 얻고자 쫓아다닌다. 그러나 마녀 여승남이 죽기 직전에야 비로소 깨닫는다.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했던 사람은 여승남이고 곡지화가 아니라는 것을. 그러나, 이제는 추억으로 남을 수밖에 없고, 당시에는 그저 멍청했을 뿐이다(此情可待成追憶, 只是當時己惘然). 문학적 가치가 뛰어나다.

 

양우생은 일찌기, "무(武)는 쓰지 않을 지언정, 협(俠)이 빠져서는 안된다"고 했었다. 그는 무협소설에는 반드시 무도 있고 협도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무는 일종의 수단이고, 협이 진정한 목적이다. 무력의 수단으로 협의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협이 가장 중요하고, 무가 그 다음이다. 한 사람이 무공은 전혀 모른다고 하더라도 협기를 가지지 않을 수는 없다. 다음으로, 그는 무협소설을 잘 쓰려면, 작자는 상당한 역사, 지리, 민속, 종교등등의 지식이 있어야 하고, 상당한 예술수단, 고문기초를 지녀야 하며, 중국무술에 대하여도 약간은 이해해야먄 비로소 성공할 가망성이 있다고 했다. 작자의 창작태도는 단정해야 한다. 그는 1977년 싱가포르의 작가협회의 초청을 받아 강연할 때, 일찌기 자신이 무협소설을 창작할 때의 노력을 소개한 바 있다; 하나는 어느 시기의 역사적 진실을 반영하려고 노력했고; 둘째는 인물의 성격을 만드는데 노력했고; 셋째는 작품의 예술적인 호소력을 강화하고자 노력했다고 했다.

 

양우생은 1983년 붓을 꺽고 더 이상 무협소설을 쓰지 않는다. 그리고 외국으로 옮겨간다. 그는 무협소슬을 쓴 외에 산문, 평론, 수필, 기화(棋話)등을 썼고, 필명으로는 진로(陳魯), 풍유녕(馮維寧), 이부인(李夫人)등이 있다. 저서로는 <<중국역사신화>>, <<문예신담>>, <<고금만화>>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