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냉성금(冷成金)
비설연천사백록(飛雪連天射白鹿)
소서신협의벽원(笑書神俠倚碧鴛)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이 대련(對聯)을 보고 책과 검을 들고 세상을 유랑하는 한 협객이 자신의 협골유정(俠骨柔情)을 읊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상당한 부분은 욱달부의 "증인주취편명마, 유공정다루미인(曾因酒醉鞭名馬 ,惟恐情多累美人)"의 분위기가 느껴지지만, 실은 위의 댓구는 김용이 쓴 소설책의 첫머리글자를 모아서 만든 것이다. 댓구가 운율이 잘 맞는다고 할 수는 없지만, 김용소설의 협객의 사랑이라는 기개가 잘 드러나 있다고 볼 수 있다.
"사랑(情)"과 "의리(理)"의 충돌은 인류생명역사상 오래된 갈등의 하나이다. 중국의 문화전통에서 "사랑"과 "의리"는 인간성의 두 측면으로 취급했다. 전통철학에서는 '사랑'과 '의리'를 둘러싼 인식과 그 관계문제에 대하여 오랫동안 논쟁을 벌였고, 서로 다른 철학유파를 형성했으며, 중국철학의 발전에 기여했다. 만일 사회발전사와 연계하여 철학발전사를 고찰한다면, 아주 재미있는 현상이 발견된다. 철학사상 만일 '사랑'이 머리를 약간이라도 들면, 사회는 왕왕 생기와 활력이 넘쳤다. 반대로 되면 기운이 죽어비려서 침침하게 되었다.
당연히, 중국봉건문화의 근본성격은 항상 '의리'를 '사랑'보다 위에 두었다. 이는 송나라때의 대철학자인 주희(주자)에게서 크게 발전한다. "하늘의 도리(天理)와 사람의 욕망(人慾)은 병립할 수 없다" "하늘의 도리와 인간의 욕망은 항상 서로 맞부닥친다" "사람이 마음을 하나로 하면 천리가 살아남고 인욕이 죽는다; 인욕이 이기면, 천리가 없어진다" 우리는 여기에서 주자철학이 어떻게 중국전통철학을 철저하게 정교화시켰는지, 봉건도덕의 마지막 에너지를 쥐어짜내서, 마침내 중국봉건사회가 전기에서 후기로 전환하는 이정표가 되었는지는 살피지 않기로 한다. 단지, '사랑'과 '의리' '인욕'과 '천리'는 전통문화에서 얼마나 중요한 지위를 지녔는지만 이해하고 넘어가기로 하자.
김용의 소설에서, '사랑'과 '의리'는 주로 사람의 원래의 생명과 도덕적인 금고(禁錮)의 계속적인 충돌로 나타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애정과 세상의 규범과의 충돌이다. 확실히 김용소설은 중국문화의 실제적인 애정이 넘치는 경향을 표현해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애정을 억제하는 도덕적인 설교를 늘어놓지도 않았다. 합리적으로 인간의 원래의 생명을 홍양하고, 전통적인 금고사회와 사람의 발전에 있어서의 '의리'를 합리적으로 돌파하여, 이를 경계로 삼음으로써, 전통적인 애정에 농후한 문화색채를 부여했다.
전체적으로 보면, 김용소설이 가장 성공한 부분은 애성묘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함께 손잡고 세상끝까지 간다는 인생의 모델을 제시해준 것이다. 의문의 여지없이, 이런 인생모델은 전통의 경직화, 부패한 인생모델에 대한 일종의 돌파구이다. 그록 일종의 시의(詩意)가 있는 인생이다. 곽정(郭靖)과 황용(黃蓉), 양과(楊過)와 소룡녀(小龍女), 영호충(令狐沖)과 임영영(任盈盈), 원승지(袁承志)와 온청청(溫靑靑), 진가락(陳家洛)과 곽청동(霍靑桐)등의 사람들은 공동으로 이런 인생모범을 만들어 오랫동안 사람의 마음을 격동시키는 힘이 있다. 금고의 폐쇄된 사회에서, 감히 '함께 손잡고 세상끝까지 간다'는 것은 그 자체가 생명 자체에 대한 찬양이고, 인간의 감성과 이성이 이상적인 상태에서의 일종의 시의인생(詩意人生)이다. 일정한 의미에서는 이런 '수호전'과 '홍루몽'이 하쳐진 것과 같은 인생모델은 전통문화의 깊은 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으며, 또한 전통적인 봉건관념이 용납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전통문화에서 인간의 원래의 생명에 내재된 합리적인 요소를 드러낸 것이기 때문이며, 봉건등급질서와 도덕관념의 봉건정치이데올로기를 보호하는 것과 첨예하게 대립하거나 충격적인 파괴작용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이 두 가지 이유로 인하여, 이러한 인생모델은 현재 내지 미래에 모두 적극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이런 '함께 손잡고 세상끝까지 간다'는 인생모델에서, 각자의 상황은 천차만별이다. 같은 게 없다. 서술의 편의를 위하여, 우리는 김용소설의 애정모델을 7가지로 나누어 보기로 한다: 이상형(理想型), 보상형(補償型), 미래형(未來型), 용속형(庸俗型), 변태형(變態型), 무내형(無奈型), 자유형(自由型).
양과와 소룡녀의 애정은 일정의 이상형의 애정이다. 순결한 정도는 애정의 기본구성요소, 즉 양성간의 사랑이라는 것마저도 초월한다. 동시에 그들의 애정은 하나의 상징이다. 세속관념, 윤리도덕 내지 소위 '정인군자'들의 인류에 대한 가장 순결하고, 가장 아름다운 애정의 말살에 대하여, 양과와 소룡녀가 겪은 매번의 인생참극은 이것들과 관련이 있다. 양과는 신세가 처량하고, 어려서부터 속세의 규범을 무시하는 습관을 길렀다; 소룡녀는 어려서부터 고묘에 들어가, 삼종도 모르고, 사덕도 모르며, 세상일을 모르고, 심기를 쓰지 않으며, 거의 노자장자가 말하는 영아상태의 여인이다. 만일 엄격하게 당시의 상황에 따라, 이들 사제간의 사랑을 살펴본다면, 이것은 세속적인 색채, 공리적인 색체가 전혀 없는 인간의 근원적인 생명에 충실한 순결한 애정이다. 다만 이러한 이론상의 애정을 고묘 바깥으로 끌고 나오면, 스승과 제자라는 구분으로 황용, 곽정 및 전체 무림과 사회로부터 배척을 받는 것이다. 그리하여 양과와 소룡녀는 여러차례의 헤어짐과 만남을 반복하게 된다. 비록 결국 두 사람은 나라를 위하여 적에 대항하는데 공을 크게 세워서 사회의 인정을 받게 되지만, 이는 아름답고 허황한 바람에 지나지 않는다. 가장 진실한 것은 그들이 받는 '박해'의 과정이다.
소룡녀의 이미지는 우리들에게 장자의 "피부는 얼음이나 눈과 같고, 모습은 처녀와 같으며, 오곡을 먹지 않고, 바람을 마시고 이슬을 마시며, 구름을 타고, 날아가는 용을 조종하여 사해의 바깥을 놀러다니는" 신인(神人)을 생각하게 한다. '신인'의 사랑은 봉건도덕관념으로부터 잔혹한 박해를 받는다. 이는 사회적인 측면에서의 '반봉건'적인 의미뿐아니라, 문화, 철학의 측면에서 문화이상과 봉건정치이데올로기의 모순을 반성하게 하고, 민족문화 자체를 새로 만들어가는데 유익한 귀감을 제공해 준다.
황용과 곽정의 사랑은 가장 현실적이고 가장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 그러나, 그것은 뼛속까지 도덕의 기망으로 가득차 있다. 즉, 일종의 보상형의 사랑이다.
이상형의 모델과 비교하면, 곽정과 황용의 사랑은 인식가치를 지니고 있다. 곽정은 '국가와 백성'을 위하는 대협이므로, 그 자체의 합리성은 있지만, 황용과의 애정관계에 있어서는, '애정'과 '의리'의 복잡한 갈등을 겪게 된다. 황용과 곽정의 사랑은 전통관념상의 진실성과 문화이상상의 불합리성으로 하여 우리는 이런 연상을 하게 된다: 네가 아무리 활발하고 귀엽고, 부드럽고 총명하고 민첩한 여성이라고 하더라도, 무뚝뚝하고 강인하고 순박하며 촌스러운 남자를 어찌할 수가 없다. 아무리 아름답고 애교를 지닌 감성적인 생명이라고 차갑고 딱딱하며 전횡적이고 잔인한 전통이성의 철장을 벗어나지 못한다. 소위 "교처상반졸부면(巧妻常伴拙夫眠)"은 역사의 탄식이다.
황용과 곽정의 사랑은 전통적인 도덕숙명의식에 젖어 있다. 도덕숙명의식은 전통문화의 깊은 곳에서 나온다. 중국전통의 의식형태는 대체로 두번의 중대한 변화를 겪는다. 하나는 진한시기에 우주관, 인식론등이 이 시기의 문화, 정치의 핵심이었다; 둘은 송명시기로, 윤리자체, 인성론이 이 시기 문화사상과 정치이론의 핵심이었다. 송명이후로, 이런 윤리자체형의 의식형태는 점차 풍속, 사고방식 및 광범위한 사회심리로 내재화 되었다. 희곡, 통속소설 및 문언소설은 모두 하나도 예외없이 깊은 영향을 받았다. 윤리자체형의 문화는 역사적으로 합리적인 일면도 있다. 그러나 일상생활로 내재화되면서 미신사상, 인과응보의식, 소극은퇴의식 내지 '정신승리법'등의 속세문화의식이 합쳐져서 도덕숙명의식이 형성된다.
도덕숙명의식은 그저 도덕상의 허황된 약속이다. 도덕이 지고무상한 본체이고 숙명이라는 전제하에서, 사람들에게 정통적인 도덕관념을 지켜야 좋은 보답을 받는다고 말해주는 것이다. 소위 "황천무친, 유덕시보(皇天無親, 惟德是報, 하늘은 가깝고 먼 것을 따지지 않는다. 덕이 있으면 보답을 받는다)"는 것도 바로 이런 의미이다. 도덕숙명의식의 허황성은 주로 비현실성에서 볼 수 있다. 즉 현세에서 보답받지 못하더라도, 내세에는 보답받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게으럼에 영합하고, 어쩔 수 없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정신적으로 승리했다'는 보상을 받고자 하는 심리인 것이다. 이런 의식이 인간의 심미관에 반영되면서 진정한 심미의 품격을 가지게 된다.
도덕숙명의식은 강력한 마취작용을 지니고 있다. 견우, 동영(董永)의 이야기는 아주 좋은 예이다. 견우가 직녀와 동영이 선녀와 맺어졌더라면 그들은 평생 소나 키추고 일이나 하면서 아무널 깨달은이 없이 일생을 보냈을 것이다. 영원이 인생의 비극을 마주하지 않았을 것이다. 곽정은 모든 사람들이 존경해마지 않는 유협(儒俠)의 모범으로써, 곽정과 황용의 사랑은 결국 황용을 희생시킴으로써, 곽정에게 허황된 보상을 해주는 것이다. 이 중요한 보상으로 그의 생활은 원만해 진다. 그가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친 후에, 사람들은 아쉬워하고 유감스러워하게 되는 것이다. 곽정은 생전에 염복도 있었고, 죽어서는 애도도 받는다. 그의 도덕은 상응하는 보상을 받은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은 비로소 원만하고 자연스럽다고 느끼는 것이며, 더 이상 그 안에서의 허황성에 대하여 의심하지 않는다. 만일 이런 보상을 받지 못했다면, 반대로 사람들은 불평불만을 계속 토로했을 것이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이런 허황된 보상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다른 사람을 속이고 자신을 속이면서 중국을 망친 것이다.
서생협객인 진가락은 고대의 '인문주의자'와 유사하다. 그는 비록 햄릿과 같이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식으로 사물과 인생으 가치와 의미를 사고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곽청동과 향향공주간의 선택에서, 황제에 대한 경솔한 믿음에서, 주기의 아들을 구해주기 위하여 건륭황제를 풀어주는 등의 모습에서 이미 그는 전통문화이상을 현실에서 실시하는 과정에서 그는 여전히 순수한 서생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에 그는 애인을 희생해가면서 건륭의 '반정'을 얻어내는데, 이것은 이런 우의를 지닌다: 문화이상으로 현실정치를 대체한다. 당연히 진가락은 본질적으로 서생이므로 이 '서(書)'와 '검(劍)'의 '은혜와 원수(恩仇)'에서 실패할 뿐이다. 다만, 바로 문화이상의 '서'가 현실정치의'검'에게 계속 희생을 당하는 과정에서 중국역사는 몰락한다.
위에서 진가락은 서생으로서의 강경과 영원의 일면을 보았다. 그러나, 그와 향향공주의 애정은 내약형(內弱型)의 사랑이다. 그는 무공이 고강하고, 지모가 뛰어나며 결단력이 있어 그의 사업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부족의 수령 곽청동을 선택하지 않고, 곽청동의 여동생 향향공주, 유약하며 순수하고 온 몸에서 꽃향기가 나지만 그의 사업을 수행하는데는 짐이 될 뿐인 여자를 사랑한다. 그는 물론 여러가지 이유를 들어 자기의 선택을 변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화의 한계를 벗아나지 못한다: 그는 사랑의 선택에 있어서 전통남성문화품격의 자연적으로 허약한 일면을 보여준다. 그는 내부지향적인 조화를 통하여 자기의 강대함, 남성적인 힘을 찾고자 한 것이다.
사실, 가장 전형적인 것은 아마도 <<협객행>>에서 석청(石淸)이 애인을 선택하는 것일 것이다. 석청은 사매인 민유(閔柔), 매방고(梅芳姑)와 동문수학하는데, 매방고는 깊이 석청을 사랑한다. 그녀는 용모, 인품, 무공, 시문 혹은 여홍(女紅)에 이르기까지 민유보다 훨씬 뛰어나다. 그러나, 석청은 민유를 선택한다. 매방고는 이에 대하여 이해를 못한다. 그리고 이로 인하여 큰 원한을 품게 된다. 석청과 민유의 아들을 빼앗아감으로써 보복을 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결국 기연으로, 세 사람은 다시 만난다. 매방고는 석청에게 왜 자기를 사랑하지 않았는지를 묻는다. 석청은 천천히 말한다: "매방고, 너는 뭐든지 민유보다 뛰어났다. 민유보다 뛰어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나보다도 뛰어났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면, 스스로가 못난이라고 생각해서, 너의 짝이 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매방고는 그제서야 자기가 애정을 얻지 못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자기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가 너무 뛰어나서였던 것이다. 그 후 후회를 견디지 못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중국의 남자들은 허약하다. 이는 내재적인 문화의 허약함이다. 진가락과 석청의 선택은 그들 자신의 우연한 선택이 아니라, 전통문화의 특징으로 인한 것이다. 중국의 내재지향적인 문화 특히 송나라이후의 문화는 중국남자들로 하여금 외부세계를 정복하는데 두려워하고, 여자를 정복하는데 두려워하게 만들었다. 인격과 의지역량을 지닌 여인이 자기의 앞에 나타나면, 중국남자는 왕왕 두려움을 느낀다. 상대방을 정복함으로써 자기의 역량을 과시하려하지 못하고, 또 다른 지름길을 선택한다. 즉, 자기보다 약하고 못한 여자를 선택하여 자기의 강대함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몇년전, 남자의 유약함에 대하여 부녀계에서는 "사내대장부를 찾는다"는 분위기가 형성된 적이 있다. 아랑들롱, 실베스타 스탤론, 다카쿠라 켄(高倉健)을 제시했지만, 이런 안도색기(按圖索驥, 그림에서 명마를 찾으려고 하다)의 방식으로 '중국의 사내대장부'를 찾으려 한 노력은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당연히 그녀들이 아무런 효과도 얻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세계에는 <<위성(圍城)>>의 방홍점(方鴻漸)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이다: 내시를 하는데 수술할 필요도 없다.
단정순(段正淳)의 애정관은 애정의 미래상태에 대한 사고를 포함하고 있고, 어느 정도 낭만적인 색채를 지니고 있으니 "미래형"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미래형의 애정과 이상형의 애정은 구분되어야 한다. 전자는 현실, 민족과 문화유형을 초월한 사랑의 궁극적인 형태이며, 우리들이 이 문제를 논할 때에는 민족, 지역, 문화등 각종 역사조건의 제한을 고려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사람의 본성에 따른 애정의 요구만 주목하면 된다; 그러나 후자는 일정한 구체적인 역사조건하에서 탄생되는 애정이상이다. 민족, 지역과 문화의 제한을 받는다. 그러나, 미래형의 애정은 일종의 추상적이거나 공동(空洞)의 애정은 아니다. 그것은 인류의 애정에 대한 초월적인 갈망이며, 애정의 궁국상태에 대한 사고이다. 이런 사고는 사람을 해방시키려는 사상이며, 인간들로 하여금 진보된 애정모델을 선택하도록 하는데 일정한 의의가 있다.
만일 사람들이 "현상을 투과하여 본질을 보고자" 한다면, 단정순과 그의 다섯 부인, 애인의 관계가 용속적이지 않은 일부다처제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단정순과 그녀들 간에는 주로 애정관게이다. 당연히, 여기에는 애정행각이나 방종이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어쨌든 그중에는 새로운 요소가 들어있다. 즉, 단정순은 그녀들 모두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소설에서 묘사한 바에 의하면, 단정순은 매번 그의 애인 하나를 만날 때마다, 원래의 애인은 잊어버린다. 그리고 전력을 다하여 그 애인을 사랑한다. 비록 이 애인이 그에게 죽어라고 해도 그는 주저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단정순은 이미 아무런 공리를 생각하지 않고, 애정을 현실이해를 반영하는 일종의 방식이라거나 자기의 도덕적인 이미지를 완성시키는 것으로 보지도 않는다. 오히려 전심전력을 다하여 사랑에 빠지면서 현실의 공리와는 인연을 끊는 것이다.
애정의 본질은 무엇인가? 여기서 우리는 완벽한 답안을 내고자 하지는 않는다. 그저 그 핵심부분만 언급하면 그만이다. 그것은 바로 이성의 아름다움의 형식에 대한 느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런 느낌에 위배되는 모든 애정은 순수하지 못한 애정이다. 여기서 우리는 '전일(專一, 오직 하나뿐)'이라거나 '충정(忠貞)'의 애정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그저 설명하고자 할 뿐이다. 그것은 현실에 기초하여 탄생한 도덕형의 이상적인 애정이다. 왜냐하면 도덕은 농후한 심미적인 특질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런 도덕형의 이상적인 애정은 자연히 자연적이고 합리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반드시 봐야 할 것은 이것은 애정의 궁극적인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일부일처제의 안정적인 가정관념이 법률에 부합하는가 아닌가? 당연히 법률에 부합한다. 도덕에 부합하는가 아닌가? 당연히 도덕에 부합한다. 그러나, 인성에 부합하는가 아닌가? 분명히 인성에는 부합하지 않는다. 오늘날의 일부일처제는 다른 사회질서와 마찬가지로 인류가 스스로 창조해낸 문화의 인류이화(人類異化)의 결과이다. 인류가 더욱 개선할 대상이다. 오늘날의 '전일' '충정'의 아름다운 사랑은 그 본질적으로 사유제사회발전단계의 산물이다. 그리고 영원한 것도 아니다. 애정의 '전일' '충정'이 가진 배타성은 바로 사?제의 배타성이 인류의 감정에 전이된 것이다.
'전일' '충정'의 도덕형의 이상적인 애정은 아름답다. 풍부한 현실적인 합리성을 지니고 있지만, 그렇다고 영원하지는 않다. 단정순의 애정은 현실적인 모방성을 지니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애정의 사고에는 심각한 미래적인 의미가 있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가 <<천룡팔부>>를 읽고나서 단정순의 '풍류'를 역겨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다정'을 좋아하지 않는가. 이것은 우리의 인성 깊은 곳에 잠재된 갈망을 드러낸 것이 아니겠는가?
단정순의 애정은 바로 인류감정상의 좁은 길의 처지를 드러낸다. 단정순은 그의 처와 애인에 대하여 주로 사랑 심지어 진정한 사랑을 지니고 있다. 그저 현실의 질서, 규범과 제도로 인하여 그는 모든 애인을 왕비로 삼지 못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의 처와 애인들의 애정에서의 배타성으로 그는 여러 애인을 한꺼번에 가질 수가 없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그의 이정을 아주 난감한 처지로 몰아넣는다. 우리는 단정순의 애정을 그의 여자에 대한 탐욕스러운 점유욕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그는 그녀들에 대하여 사랑하고, 그녀들을 위하여 결국 죽는데, 이것은 그의 진정하고 헌신적인 정신을 충분히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단정순은 그이 처와 애인으로 하여금 만족하게 못하였는데, 이는 단정순의 잘못이 아니라, 현실의 잘못이다. 현실이 사람에 대하여 이화(異化)한 결과이다. 반대로 만일 단정순과 그이 처, 애인이 성별을 바꿀 수 있다면(만일 현실적으로 가능하다면), 마찬가지로 이 문제를 설명할 수 있다.
단정순의 사랑은 이미 일부다처의 용속한 개념에서 벗어나 있다. 그리고 일종의 문화부호가 되었다. 그것이 우리에게 미혹스럽고 당황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가 현실에 갇혀 있고, 미래의 아름다움을 느끼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감동시킨다. 이것은 그것이 인류의 애정의 미래상태, 궁극상태에 대한 비극적인 의식의 깊은 사고를 담고 있어서 그런 것뿐만이 아니라, 인성의 활력은 없앨 수 없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인류의 희망이라는 것을 설명한다.
위소보의 애정은 말그대로 '용속형'의 애정이다. 그의 몸에는 소농(小農)의식과 프롤레타리아깡패의식이 나타난다. 그는 기원(妓院) 출신으로, 어미는 알지만 아비는 모른다. 정통관념과 정통미덕이 없을 뿐아니라, 일반적인 시비관념도 아주 박약하다. 그리하여, 일을 하면 앞뒤를 돌보지 않는다. 앞뒤를 돌보지 않으므로 두려운 것이 없다. 그리하여 위소보의 몸에서 무슨 고상한 애정을 끄집어내려면, 그것은 망상이다. 그의 여성, 혼인, 애정관은 대체로 세상에서 가장 '실제적'인 것일 것이다. 그가 보기에, 부녀=기녀, 애정=점유, 결혼=생식일 뿐이다. 여성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무슨 윤리, 도덕, 숭고, 존엄은 하나도 없다. 황궁까지도 그는 기원(문화실질적으로는 확실히 그렇다)으로 생각한다. 위소보에게 무슨 장엄하고 신성한 일을 기대할 수 있을까?
당연히, 위소보의 프롤레타리아깡패의식은 확실히 어떤 굳어버린 정치의식형태를 풀 수 있다. 문제는 그의 해결에서 부정적인 면이 긍정적인 면만큼 많다는 것이다. 요즘의 방식으로 말하자면, "건설하는 것은 부족하고, 파괴하는 것은 남음이 있다" 이에 대하여 수십년간 역사와 현실은 아마도 우리들에게 두려움이 남아 있게 한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은 계속 남아있을 것이다. 그러나, 김용소설은 국민성을 탐색하는 동시에, 깡패의식에 충만한 여성관과 그 행위방식을 충분히 드러내고 비판한다. 이 점에 관하여, 신시기소설을 살펴보면, 모두 이 정도에 도달하지 못한 것같다.
이막수(李莫愁)와 강민(康敏)의 애정은 변태형에 속한다. 변태에 대하여 얘기하자면, 단순히 그 심리적인 변태뿐이 아니라, 구체적인 표현에서는 비정상적인 히스테리의 파괴욕이다. 그리고 이런 심리적인 변태는 바로 문화기반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막수의 변태적인 애정관은 실제로 내 것이 되지 못하면 없애버리겠다는 편협한 소농의식에서 유래한다. 이런 소농의식의 구체적인 표현은 극도의 질투심리이다. 이막수에게 있어서, 평등의 관념은 없다. 그저 갖고 싶은 것은 가져야 하며,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것은 찾아볼 수 없다. 그저 다른 사람에 대한 강제만 있을 뿐이다. 당연히 이막수는 '정치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감정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결과적으로는 자연히 불을 갖고 놀다가 불에 탄다. '세상에 묻건데, 정이란 것이 무엇인가?" 이막수는 이 노래를 부르면서, 불 속에서 죽어갈 때, 그녀의 애정 에 대한 물음은 우리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다.
강민의 애정관은 더 재미있다. 강민은 실제로 애정을 정치화한다. 모든 것을 자기가 가지려고 하고, 애정의 패주가 되고, 애정의 독재자가 되고자 한다. 이것은 이막수와 동일하다. 그녀는 소봉(蕭峰)의 애정을 얻지 못한 것을 마음 속에 담고 있고, 단정순의 '배신'에 더욱 한을 품는다. 그리하여 그녀는 소봉에 보복하고 단정순을 망친다. 강민은 남자세계 및 감정세계의 여황제가 되고 싶어했다. 바로 현실사회의 황권사상을 사람의 감정세계로 끌고 온 것이다.
이런 애정의 문화적인 바탕은 소농의식이다. 그 실질은 점유이고, 심리변태를 중개하는 것은 질투이다.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도 망치고, 자신도 망친다. 우리는 여기에서 볼 수 있다. 봉건집권제사회에서, 사람의 감정세계와 이성세계는 얼마나 닮았는가?
장무기의 애정은 '무내형'에 속한다. 어쩔 수 없다고 하는 것은 그가 항상 피동적이었기 때문이다. 왕왕 어쩔 수 없는 상황하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다. 애정만 그러한 것이 아니라, 그의 인생 자체가 그러했다. 장무기는 평민영웅이다. 그는 비록 경천동지할 업적을 세웠지만, 그는 뼛속까지 평민이다. 그리하여 그는 황제가 되지도 못했다. 장무기의 이미지는 아주 재미있다. 자기의 명확하고 고정되고 견고한 주장이 없다. 비록 영웅적인 업적을 냈지만, 자기의 사업을 성공시키지 못한 것이다.
애정선택에서, 장무기는 평민색채를 더욱 강하게 드러낸다. 그것은 바로 부모의 명을 받들어, 중매결혼을 하는 것이다. 장무기에게 있어서 '부모'와 '중매'는 바로 운명이다. 장무기가 애정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는 항거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항상 다른 방법이 없는 상황하에서 애정을 받아들였다. 일정한 정도에서는 운명에 따르는 노예라고 할 수 있다. 장무기의 이미지는 어떤 측면에서는 평민백성의 특징을 가장 많이 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영호충은 김용소설에서 아주 유명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확실히 문화적인 깊이가 얕은 인물이다. 그가 여러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이유는, 아마도 우리가 깊이없는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영호충은 멋진 협객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멋지다는 느낌을 갖는 것은 그가 소봉처럼 중대한 사명을 지닌 것도 아니고, 곽정처럼 생활목적이 뚜렷한 것도 아니다. 양과처럼 참혹한 경력을 지닌 것도 아니고, 장무기처럼 책임감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는 거의 뭐든지 하고, 뭐든지 하지 않는 것같다. 천하를 돌아다닐 수도 있지만 곤란을 많이 겪을 필요는 없다. 이러한 점만으로도 '경박'한 무리들은 흠모해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더욱 흡연력을 지닌 것은 그가 여인들의 틈에서 살아가면서도 결국은 그가 온유향으로 돌아와서 인생을 즐겼다는 점이다. 영호충은 확실히 '소오강호'하였다. 문제는 '강호'에서 영호충과 같은 인물들이 가득찼다면, 민족의 '강산'은 위험했을 것이다. 영호충을 흠모하는 사람들은 반성해야 한다. 자기의 내심에 무엇을 담고 있는지.
위에서 언급한 바대로 영호충과 임영영의 사랑은 '자유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확실히 영호충과 임영영은 정,사관념의 구속을 받지 않고, 자기의 호호에 따라 반려를 선택했다. 현대적인 '자유'의 맛이 난다. 단지 이런 '자유'는 양과와 소용녀의 자유애정과 비교하자면, 가볍고 얕다는 점이다. 어느 정도 '어른들의 동화'라고 할 수 있다.
옛 사람들이 말했듯이, "홍의탈진방심고(紅衣脫盡芳心苦, 신부옷을 벗는 순간 고생이 시작된다)". 김용소설의 애정묘사는 현란한 형식으로 수억독자를 팬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의 '홍의'를 좋아하는 독자들은 고생을 아는 사람이 드물다. 아마도, 이 현란한 '홍의'를 벗는 순간 비로소 고생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청말민초의 소설비평가인 관달여는 '영웅, 아녀, 귀신은 중국소설의 삼대요소이다"라고 하였다. '무'와 '협'은 '영웅'의 범주에 속한다. '정'과 '리'는 '아녀'의 범주에 속한다. 김용소설은 전통소설의 요소를 빌려 전통문화를 충분히 발양했고, 완벽한 문화세계를 창조하고, 전통을 현실로 끌어냈다. 여기에서는 다시 '협골'과 '유정'이 가득찬 세계를 다시 만들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협골'과 '유정'의 속에서 우리의 민족생활이 더욱 강하고 아름답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중국과 문학 > 무협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협소설의 발전사 (0) | 2009.01.23 |
---|---|
김용(金庸)은 우리에게 어떤 꿈을 만들어 주었나? (0) | 2009.01.22 |
무협소설/영화의 50가지 통속적 수법 (0) | 2008.06.17 |
김용 무협소설의 옥의 티 (0) | 2008.02.03 |
장무기(張无忌)와 주지약(周芷若) (0) | 2007.07.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