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지방/북경 올림픽

북경올림픽조직위원회 소속인원의 재취업

중은우시 2009. 1. 11. 02:22

글: 왕영강(王永强)

 

세상에 끝나지 않는 잔치는 없다. 그날은 언젠가 온다.

 

2000년 9월 17일저녁, 북경패럴림픽의 성화가 냐오차오(鳥巢)에서 꺼졌다. 북경올림픽과 패럴림픽의 업무가 끝남에 따라 북경올림픽조직위원회도 정식으로 그 사명을 마쳤다.

 

당연히, 종점은 왕왕 또 다른 기점이다. 2001년 12월 13일, 북경올림픽조직위원회가 신챠오반점(新僑飯店)에서 성립될 때는 겨우 수십명이었다; 7년후, 올림픽과 패럴림픽의 세례를 거치면서, 4000여명이 북4환 학원교 부근의 올림픽빌딩 사무실에서 새로운 출발을 했다. 2009년 1월 4일, 2008년 11월에 양슈안(楊樹安), 덩야핑(鄧亞萍)등 국가체육총국에서 파견나왔던 간부들의 거취가 결정된 후, 4명의 북경시에서 파견온 올림픽조직위원회 집행부주석의 '재취업'도 이미 결정되었다; 류징민(劉敬民)은 다시 북경시 부시장으로 되돌아가며; 67세의 리빙화(李炳華)는 전국정협위원을 맡으며; 왕웨이(王偉)는 이번달 북경시 '양회'기간에 북경시 정협부주석으로 승진할 것이며; 나이 60의 장샤오위(蔣效愚)는 은퇴할 것이다.

 

북경올림픽조직위원회의 4000여명의 인원은 대체로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000여명의 공개채용인원과 3000여명의 정부파견인원. 올림픽조직위원회의 용어로 말하면, 전자는 P1이고, 후자는 P2이다. 이외에 각 대학에서 온 실습생, 자원봉사자등은 P3라고 불리운다.

 

P3부분은 고려할 필요가 없다. P1과 P2부분의 '재취업'이 큰 문제이다. 역대 올림픽조직위원회에서 '대회후 스스로 일자리를 찾는 것'과는 달리, 북경올림픽조직위원회의 주도역량은 P2였다. 절대다수는 원래의 직장으로 되돌아 간다. 예를 들어 말하자면, 북경올림픽조직위원회 체육부 부장이었던 장지롱(張吉龍)은 원래 국가체육총국의 축구협회 부주석이었다. 올림픽조직위원회가 해산돈 후, 장지롱은 축구협회로 돌아가서 일하고 있다. 또 매체운행부의 부부장인 쉬즈청(徐志成)은 신화사에서 왔다. 올림픽이 끝난 후, 국내농구전문기자인 쉬즈청은 원래 왔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다만 일부 원직복귀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예를 들어, 북경올림픽방송유한공사(BOB)의 CEO인 마궈리(馬國力)은 원래 CCTV 체육채널총감이었다; 그가 BOB로 파견온 후, 장허핑(江和平)이 CCTV 체육채널의 신임총감이 되었고, 원만하게 올림픽의 생방송과 전송업무를 완성했을 뿐아니라, 체육채널 아나운서, 기자의 의류스폰서등 비지니스개발에서도 큰 성과를 거두었다. 리닝회사가 2007-2008년에 스폰서를 한 이후, 2009년 1월 1일부터는 361도(중국)유한공사가 1.58억위안을 들여 4년간 계속 스폰서를 할 것이다. 이런 상황하에서 마궈리의 미래거취는 더욱 사람의 주목을 받았다.

 

"북경아시안게임에 파견나온 인원중 일부 원직장으로 복귀하지 못한 사람이 있어, 당시 북진(北辰)집단을 만들었다; 1993년 제1차 올림픽신청시 업무인원은 주로 각 단위에서 파견받은 사람이었고, 2001년 올림픽신청후에 다시 우리는 북오(北奧)집단을 만들었다." 전 중국올림픽위원회 비서장인 웨이지중(魏紀中)의 말이다. 당시 정부파견인원중 원단위로 복귀하지 못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대형의 종합 기업그룹을 만들어 이들 인원을 소속시켰다.

 

2008년 올림픽이후의 일부인원의 배치에 대하여, 웨이지중은 일찌기 북진, 북오와 유사한 집단회사를 만들어 올림픽을 거치면서 단련된 인재를 흡수할 것을 건의한 바 있다. 그러나, 웨이지중의 건의는 받아들이지 않았고, "대회후 스스로 일자리를 찾는다"는 내용이 모든 P1인재들과의 계약에 추가되었다. 이것은 '정부가 끝까지 책임지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상, 마궈리와 같은 P2의 일부인재들 중에서 원대복귀를 못하는 비율은 극히 적다. 2007년 북경올림픽조직위원회 인사부, 북경시위조직부가 공동발표한 <<북경올림픽인원행동계획>>에 다르면, 외사, 안보, 교통, 위생, 선전, 건축, 환경보호, 상무등 방면의 전문인재와 관리인재의 선발과 배양에 관한 16가지 중요임무를 제안했다. 올림픽 이후, 이 계획은 300명의 간부에게 통일적으로 일자리로 돌려보내도록 되어 있다.

 

산과 물이 겹쳐서 더 이상 길이 없는 줄 알았더니, 버드나무 그억하고 꽃이 피어있는 곳에 또 하나의 마을이 있다(山重水復疑無路, 柳暗花明又一村). 마궈리의 경력은 일찌감치 Infront Sports & Media(盈方)의 흥미를 끌었다. CBA와 중국축구국가대표팀의 총운영업체로서, Infront는 전 중국지역총재인 왕잉췐(王應權)을 대체할 적합한 인물을 찾고 있었다. 일찌기 CCTV체육채널을 담당한 직위에 북경올림픽위원회와 국제올림픽위원회와 국가체육총국이 각 부문에서 활약했던 마궈리는 확실히 Infront China의 "본토화"의 미래방향과 들어맞는 사람이었다.

 

최종적인 협상결과는 서로에게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마궈리는 Infront China로 갔고, Infront는, NBA가 천용정(陳永正)을 초빙하고, IMG가 중시체육추광공사와 합자한 후, 마찬가지로 '중국화'를 가속화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 세 회사는 현재 중국내 체육산업시장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약하는 세 외자계거두이다. CCTV와 마궈리 본인에 있어서, Infront가 마궈리를 낚아챈 것은 객관적으로 그들의 난제를 해결해준 측면이 있다.

 

한가지 설명해야 할 것은 비록 마궈리와 같이 체제내에서 체제외로 옮겨가는 수량이 많지는 않지만, 그의 경우에는 중대한 의미가 있다. 그리고 그들이 이직하고 나면 팀이 옮겨가게 되기도 한다. 올림픽이후의 중국스포츠산업은 아마도 새로운 발전기회를 맞이할 것이다.

 

외자기업만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2008년 3월 28일, 올림픽조직위원회의 경기후인원배치계획이 이미 시작되었다. 이날, 올림픽조직위원회는 기자회견에서 북경올림픽조직위원회와 중국석유화학공업집단공사, 중국해양석유총공사, 국가전망공사, 국가전력발전주식유한공사등 9개의 대형기업 및 북경시국자위와 <<대회후인원배치협의>>를 체결했다고 발표했다.

 

그날, 북경시올림픽조직위원회 인사부 부부장인 쉬즈쥔은 계약체결을 위하여, 올림픽조직위원회는 적극적으로 나서서 이들 기업과 협의하고, 상호 의사소통과 협상을 통하여 협의를 체결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익명을 요구한 전술한 회사의 인사처 처장은 그들이 필요하다고 제안한 인원은 겨우 10명이라고 밝혔다. 회사의 필요에 따라 영어, 자동화류의 기술인재에 치중했다고 한다. 이와 비교하자면, 중석화와 같은 기업은 아마도 100명은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당연히, 체제내에 남은 북경올림픽조직위원회 인재는 어떤 의미에서는 체제외로 흘러들어간 사람들보다 더욱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영국현지시간으로 2008년 11월 29일 오후, 올림픽선수촌 부촌장인 덩야핑은 영국캠브리지대학 기독학원을 졸업했고, 경제학박사학위를 획득했다. 등야핑은 <<글로벌경쟁중의 올림픽 브랜드>>라는 논문으로 북경2008년 올림픽을 사례로 하여, 시장과 비지니스가치의 각도에서 상세하게 올림픽 브랜드를 연구했다. 지도교수는 등야핑의 논문각도가 아주 독특하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학술적으로 이것은 아마도 이런 각도에서 오림픽 브랜드에 대하여 시스템적으로 꼼꼼하게 분석한 첫번째 사례라는 것이다.

 

2003년부터 지금까지 덩야핑은 5년의 시간을 들여서 바라던 캠브리지의 '경제학' 박사모를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아주 힘들었다. 이 기간동안 계속 한편으로 일하면서, 한편으로 공부했다. 다행히 논문의 연구내용과 올림픽조직위원회에서의 나의 업무와 관계가 밀접하였다. 나는 북경올림픽위원회가 주관하여 지난 몇년간 마침 시장개발과 실무를 진행하여 시장에 가까워서 일차적인 고귀한 자료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국내의 소식에 따르면, 북경올림픽조직위원회의 집행부주석의 자리를 떠나는 양슈안은 국가체육총국의 부국장으로 승진할 것이라고 한다. 덩야핑은 국가체육총국 체육기재장비중심 부주임으로 승진할 것이라고 한다. 양슈안, 덩야핑과 함께 임명되는 사람은 배구운동관리중심 부주임 류원빈(劉文斌)등이 있다.

 

북경올림픽조직위원회 체육부 부부장인 류원빈은 일찌기 북경올림픽의 경기일정표를 만드는데 온갖 머리를 짜낸 적이 있다. 경기내용, 인원유동, 교통, 관심도, 기후, 경기장, 안전, 보안등등 각종 경기운영에 영향을 주는 요소를 분석하여, 멋있는 잔치를 이끌어 낸 것이다. 동시에 IOC, 주방송사인 NBC, 참가선수, 각 국제체육조직, 각국 올림픽조직위원회간의  복잡한 이익분배에서도 협조를 잘 이끌어 했다.

 

이번 올림픽이후 인재의 흐름은 아시안게임, 두번의 올림픽신청과는 다르다. 웨이지중은 정곡을 찌르는 한 마디로 정리했다. "완전히 서로 다른 사회모델이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1990년 아시안게임은 완전히 정치사회의 모델이었다면; 북경올림픽은 이미 많은 부분에서 공민사회의 모델이 되었다."

 

이것은 상당한 정도로 외부의 체육총국 미래개혁방향에 대한 목소리라고 볼 수 있다.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한 후, 거국체제의 스포츠는 이미 최전성기를 지났다. 이어지는 것은 현재의 체제를 어떻게 직업화, 시장화하느냐에 있다. 덩야핑, 류원빈등이 짊어져야할 짐이 결코 가볍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