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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후기)

대립(戴笠)의 후손들

by 중은우시 2008. 12. 12.

글: 서충우(徐忠友)

 

국민당의 군통특무조직의 두목인 대립이 1946년 3월 17일 비행기추락사고로 사망한 후, 대립의 집안은 몰락하기 시작한다. 1949년 5월, 대립의 모친인 남월희(藍月喜)가 병사한다. 대립은 원래 1915년 부인 모수총(毛秀叢)과의 사이에 아들을 하나 두었는데 이름이 대선무(戴善武, 일명 戴藏宜)였다. 그는 외모가 대립과 쏙 빼닮았다. 계급은 소장이었으며, 국민당의 보안향 자위대 주임을 맡고 있었다. 1941년 5월 20일, 대립은 대선무를 시켜 특무대장 서증량 및 특무 채강과 함께 강산 쌍계구향에서 광도향 향장인 중공지하당원 화춘영을 살해한 바 있다.

 

1949년 5월 강산의 해방이 가까워지자, 대선무는 상황이 좋지 않다고 보고 처자식을 이끌고 황급히 남으로 도망가서 대만으로 가려고 한다. 그러나, 인근한 복건성 포성현 수북향까지 가서 국민당 수북향공소의 무장한 비적들에게 달러, 황금, 미국권총등을 빼앗긴다. 해방군 포성현 군관회는 이 소식을 듣고는 즉시 병력을 보내어 비적을 물리치고, 대선무 일행을 포성현성으로 체포해온다. 생각도 못하게, 대선무는 야간에 창문을 뛰어넘어 도망쳐서 강산으로 되돌아온다. 1949년 9월, 절강성 공안청 이풍평 청장의 지시에 따라, 대선무는 체포된다. 강산현 인민정부는 1951년 1월 대립의 고향인 보안향에서 만인대회를 개최하여, 대선무에 대한 총살형을 내린다. 이에 대씨집안은 붕괴되고, "대공관(戴公館)"도 몰수된다.

 

(1)

 

대립부자가 연이어 사망한 후, 사회에서는 대립은 후손이 끊어졌다는 소문이 돌았다. 대립에게 후손은 없었던가? 후손들은 지금 어디에 있으며 무엇을 하고 있을까? 최근, 필자는 대립의 고향인 보안향으로 가보았고, 막 대만으로 가서 모친을 만나고 돌아온 대미만(戴媚曼) 여사를 만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대립 후손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었다.

 

대립에게는 손자 3명과 손녀 2명이 있었다. 손자는 대이관(戴以寬), 대이굉(戴以宏), 대이창(戴以昶)이고, 손녀는 대미만과 또 한명의 대로로(戴)가 있는데, 대로로는 어려서 요절했다.

 

원래, 대선무가 처결된 후, 그의 처인 정석영(鄭錫英)은 딸인 대미만은 대립의 집안에서 요리사로 있던 탕호주(湯好珠)에게 맡겨서 키워달라고 했고, 자신은 세 아들을 데리고 친정인 구주(衢州)성에 잠시 머물다가 이어 가족을 데리고 상해로 갔다. 1953년말, 군통특무의 두목인 모인봉(毛人鳳)은 장개석의 지시에 따라, 군통특무 황탁(黃鐸)을 상해로 숨어들게 한 후, 암암리에 상해시 공안국에 심어놓은 특무 황순발, 육병장과 연락을 취한다. 그리고 정석영 모자를 대만으로 보낼 계획을 세운다. 모의를 거쳐, 육병장이 공안국의 출구증명을 만들어주고, 정석영은 심봉영(沈鳳英)으로 이름을 고치고, 대이관, 대이창 및 대만특무 황탁과 함께 일행 4명이 1954년 1월 7일 상해에서 기차를 타고 광주로 떠난다. 그 후에 홍콩을 거쳐 대만으로 갔다. 대이굉은 호구를 대만특무 황탁이 썼기 때문에 출국할 수 없어 할 수 없이 상해에 남는다.

 

(2)

 

다시 대미만은 요추미로 이름을 개명하고, 탕호주의 집안에서 자란다. 당시 그녀는 겨우 6살이었다. 탕호주의 부양으로, 대미만은 점점 자라고 소학교를 졸업한다. 탕호주의 집안조건이 좋지 않아서, 대미만은 7살때부터 밥짓고, 빨래하고, 돼지먹일 풀을 뜯어오는 등 집안일을 해왔다. 어린 미만은 총명했을 뿐아니라 철도 들어있었다. 12살이 되자 대미만은 풀신을 신고 남자아이들과 함께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한다. 나무를 묶어서 등에 지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탕호주에게는 요장성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사람이 착실했다. 대미만은 그에게서 농삿일을 배운다. 15살이 되던 해에 그녀는 생산대에서 일을 하면서 1년에 2000여점을 번다. 이것은 당시 농촌 여성들 중에서는 아주 뛰어난 점수였다.

 

순식간에 몇년이 지났다. 대미만은 어린아이에서 아가씨로 자랐다. 용모로 따져도 대미만은 마을에서 첫째, 둘째를 다툴 정도였다. 그러나 많은 청년들은 그녀의 할아버지가 대립이라는 것때문에 감히 가까이 하지를 못했다. 한번은 이웃의 아주머니가 그녀에게 강서성 상요시의 기차수리공장의 수리공 사배류를 소개한다. 사배류는 고향이 보안에서 멀지 않은 이십팔도진이다. 중학을 졸업한 후 바로 수리공장에서 자동차수리를 배웠다. 기술도 괜찮고 사람도 잘 생겼고, 사람들에게도 잘 대했다. 그들 둘은 만나자 마자 사랑에 빠진다. 사배류는 대미만을 데리고 산으로 가서 산자를 땄다. 이때 어떤 사람이 사배류에게 일부러 사서 고생하지 말라고 충고하기 시작한다. 잘못하면 골치덩이를 떠않게 된다는 것이었다. 충후한 사배류도 동요가 있었다. 그는 "대립은 대립이다. 그가 특무를 했지만, 미만은 특무가 아니다. 내가 왜 그녀와 결혼하지 못하느냐? 당도 그녀를 이상하게 보지 않을 것이다. 둘이가 마음만 맞으면 결혼할 수 있는 것 아니냐."

 

마을간부인 강결성, 모진홍은 그들 둘의 결합을 적극 지지했다. 당시의 상황에서 이렇게 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대미만과 사배류는 그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지녔다. 1960년 10월, 대미만과 사배류는 마침내 결혼한다. 결혼후 두 사람은 서로 아끼고 사랑한다. 몇년간의 행복한 생활이 흘렀다. "문혁"이 시작된 후, 대미만은 충격을 받을까 두려워하여, 남편과 협의하여 호구를 이십팔도공사에서 상요시로 옮긴다. 대미만이 강서로 간 후, 한 작은 공장에서 일했는데, 나중에 공장이 문을 닫았다. 그 후에는 집안 일을 했다. 그녀는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다. 큰 아들 사명은 기차운전사이고, 둘째아들 사평은 개인운수업을 한다. 딸 사가려는 한 방직공장에서 통계원으로 있다.

 

(3)

 

대선무의 처인 정석영이 상해에서 대만으로 갈 때, 남겨진 6살짜리 둘째아들 대이홍은 상해시공안국에 잠복하고 있던 특무인 육병장이 사람을 시켜 돌본다. 육병장은 대이굉을 3년간 돌보다가 마침내 특무의 마각이 드러난다. 그리하여 상해시공안기관에 체로되어 수감된다. 자연히 대이굉은 생활에서 의지할 곳을 잃는다. 육병장의 처는 그를 상해의 한 고아원으로 보낸다.

 

막다른 골목에서 살길을 찾는다고, 상해의 이 고아원은 송경령이 돈을 내서 만든 곳이었다. 9살짜리 대이굉은 고아원에 들어간 후, 냉대를 받지 않았고, 생활은 오히려 육병장의 집에서보다 나았다. 사는 곳도 깨끗하고, 입는 것도 따스했으며, 노는 것도 즐거웠다. 어떤 먹거리는 유엔아동기금과 국제복지조직이 보내준 것이었다. 대이굉이 고아원에서 살던 몇년동안 전혀 고생을 하지 않는다. 대이굉은 고아원에서 소학교를 마친 후, 이미 16살이 되었다. 오래지 않아 노동인사부서에서 그를 안휘성 합비시 명방공장에 일하라고 보낸다.

 

당시 중앙에서는 청년들이 "변방으로 가고, 농촌으로 가라. 가장 힘든 곳으로 가라"고 구호를 내걸었다. 대이굉은 즉시 이에 호응하여, 전공장직공대회에서 제일 먼저 농업에 지원했다. 그리하여 그는 합비시 면방공장에서 다시 안휘 종양현 농장 보통산분장으로 가서, 트랙터 운전수가 된다. 나중에 수리공이 된다. "문혁"때 "삼사"활동을 진행할 때, 대이굉은 비로소 자신이 대립의 손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 당시 조반파가 이것을 빌미로 문제삼으려고 하지만, 대이굉은 반박했다: "나는 9살 때 고아원에 들어갔고, 정부가 나를 길러서 어른이 되었다. 나는 대립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른다." 대이굉이 평소에 일을 잘했기 때문에, 이 관문도 순조롭게 통과했다.

 

대이굉은 1976년 보농산분장에서 하방왔던 상해의 여자지식청년과 결혼한다. 1984년 이 여자지식청년은 상해로 되돌아가고, 둘은 이혼한다. 오래지 않아, 대이굉은 농장의 한 여성과 결혼하여 가정을 꾸린다. 지금 그는 7급수리공이고, 그의 딸이 이미 6살이다. 아주 편안하게 생활하고 있다.

 

(4)

 

1991년 5월 6일, 대미만은 대만으로 가서 그의 모친 정석영을 만난다. 대이굉도 5월 24일, 대만에 도착한다. 모자 5명은 40여년만에 처음으로 만난 것이다. 정석영은 금년에 76세이다. 풍습성 심장병을 앓고 있어 자주 침대에 누워 있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고향이 그리워지는 법이다. 그녀는 자녀들에게, "만일 기회가 되면, 나는 돌아가서 한번 보고 싶다"고 말한다.

 

대립의 장손인 대이관은 금년에 52세이다. 대학졸업후 미국유학을 했고, 경영학석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미국에서 일하고 있으며 1남1녀를 두었다.

 

대립의 막내손자인 대이창은 대만동오대학을 졸업했고, 대만성 중화무역개발공사에서 일하고 있다. 최근들어, 그는 대만시에서 새 회사를 만들고 있다. 대만공상계인사들이 대륙에 투자하는 일이 늘어나면서 그도 이를 생각하고 있다. 그는 이후 기회만 되면, 대륙에 투자해서 회사를 만들고 싶다. 과거는 이미 역사가 되었다. 모든 것은 앞을 보고 가야 한다.

 

인터뷰가 끝나갈 때, 대미만 여사는 필자에게 말했다: "나는 비록 특수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혈연관계는 대립과 나를 이어놓았지만, 이것은 선택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인생의 길은 선택할 수 있다.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먹고 살았고, 행복한 생활을 보냈다. 역사적 사실은 이미 증명한다: 우리 집안의 위로 2대는 모두 어두운 길을 걸었지만, 나와 이굉은 광명의 길을 걸어왔다..."

 

사실 여기에는 또 하나의 측면을 엿볼 수 있다. 모택동과 장개석은 큰 차이가 있다. 대만으로 가서 모두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했으며, 학문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대륙에서는 기차운전사와 노동자를 하고 있으면서도 행복해 한다.

 

[이 글은 아마도 1990년대에 쓰여진 것일 것이다. 지금은 대립의 후손들도 대부분 일을 그만두었을 것이다. 재취업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일시적인 승리도 중요하지만 역사의 흐름에서 문제를 보아야 시비를 판별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