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유방(劉放)
"십력(十力)"이라는 말은 불가(佛家)의 용어이다. 불교경전 <<대지도론(大智度論)>>의 "육도지업기심, 십력지공자원(六度之業旣深, 十力之功自遠)"에서 따온 것으로 부처의 뛰어난 지혜와 광대한 신통력과 무한한 역량을 의미한다.
나중에 중국에서 웅계지(熊繼智)라는 이름을 지닌 인물이 태어나는데, 아예 이 두 글자를 가져가서 자기의 이름으로 하였고, 심지어 스스로 "웅십력보살(熊十力菩薩)"이라고 칭하였으니, 정말 대단한 인물이 아닐 수 없다.
당연히 웅십력은 자부할만한 밑천이 있다: 학문은 고금을 관통하고, 동서를 아울렀으며, 도교불교를 융합해서 유가에 귀의하여,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고, 아주 특색있는 철학체계를 만들어낸다; 학설의 영향을 심원하여, 나중에 신유가(新儒家)로 이름을 날리는 모종삼(牟宗三), 당군의(唐君毅), 서복관(徐復觀)등이 모두 웅십력의 제자들이다. 웅십력 본인도 일대의 개종대사로, 현대신유학 사조의 철학적 기초를 닦은 인물로 추앙받는다.
1968년 5월 23일, 웅십력은 상해에서 서거하니, 금년이 웅십력 서거 4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일대 대가는 이미 떠났는데, 세상에는 다시는 웅십력과 같은 인물을 찾아볼 수 없다.
거두천외망, 무아저반인(擧頭天外望, 無我這般人)
웅십력의 자부심은 태어나면서부터 천생적인 것이다. 항간의 전언에 의하면, 웅십력은 어려서부터 다른 사람과는 다르다고 생각해서, 아주 어린 나이에 벌써 '광언'을 쏟아냈다. 즉, "거두천외망, 무아저반인(고개를 들어 하늘 바깥은 바라보아도 나같은 인물이 없구나)". 웅십력의 부인인 부기광(傅旣光)의 회고에 의하면, 그녀가 웅십력과 결혼하고 신혼을 보낼 때, 웅십력은 허니문기간을 이용하여 이십사사(二十四史)를 다 읽었다. 그녀는 웅십력이 한페이지, 한페이지 빨리 넘기는 것을 보고는, 내용을 제대로 보는 것인지 의심이 들었다. 그래서 그를 시험해보기로 했다. 이십사사중의 한 가지 사건을 뽑아서 앞부분만을 얘기해주고, 그에게 그 사건을 얘기해보라고 하였다. 결과적으로 웅십력은 그 사건을 다 이야기했을 뿐아니라, 그 일이 몇권에 나오는지까지 말했다.
웅십력은 호북 황강(黃岡)의 한 가난한 시골교사의 집안에서 태어난다. 집안형편이 좋지 않아서, 유년기에 이웃집의 가축을 돌보는 목동을 했다. 시간이 우연히 날 때마다 부친이 가르치는 사숙에 가서 청강했다. 부모가 차례로 세상을 떠난 후에, 13세인 웅십력은 일찌기 부친의 친구가 가르치는 시골학교에서 글을 배운 적이 있었다. 그러나, 속박을 받는 것을 싫어하여, 입학한지 반년만에 스스로 떠나버린다. 이것이 웅십력이 받은 학교교육의 전부였다. 다만, 구식이든 신식이든 정규적이고 체계적인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 나중에 자학(自學)과 인연으로 독창적인 자신의 철학체계를 이루게 되고 일대의 대가가 되니, 그의 천부적인 자질은 "하늘이 나에게 학문을 주었다"고 자부할 만하다.
초기의 웅십력은 당시의 많은 명인지사들과 마찬가지로, 최초의 인생이상을 학문이 아니라 혁명에 걸었다. 그는 14세때 군에 들어가서, 무창신군 제31표에서 병사를 지낸다. 신해혁명때는 황주광복활동에 참여하기도 한다. 나중에 무창에서 호북도독부의 참모를 지낸다; 신해혁명이 실패한 후, 웅십력은 다시 손중산을 따라 호법운동에 참가한다, 다만, 호법운동이 실패하자 이는 웅십력에게 큰 타격이었다. 그는 눈앞에서 "혁명당원들이 권리와 이익을 다투다가, 혁명이 결국 성과를 얻지 못하게 되자" 실망하게 된다. 이 실망은 직접적으로 웅십력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그는 정치에서 빠져나와 국민의 도덕을 증진시키는 것을 임무로 하여 학술에 전념하기로 한다.
웅십력이 정치를 포기하고 학문을 하게 된 것에 대한 또 다른 버전도 있다. 이는 훨씬 희극적인 요소가 강하다. 즉, 진독수의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진독수는 청나라때 학풍이 크게 성행하여썬 안휘사람인데, 호북의 학자들을 무시했다. 자부심이 강하고, 혈기방장했던 웅십력은 머리끝이 다 솟을 정도였다. 그리하여 머리를 처박고 책에 몰두했으며, 나중에 명성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권법사문
35세에 정치를 버리고 학문의 길로 들어선 웅십력은 당시 구양경천(歐陽競天)을 스승으로 모셔 불법을 연구했는데, 아주 가난했다. 웅십력의 제자인 서복관이 일찌기 이렇게 묘사한 바 있다: "웅 선생이 젊었을 때는 가난해 죽을 지경이었다. 모산채교몽관에서 갈아입을 바지가 없었고, 그저 1개뿐이었다. 밤에는 씻어서 보살머리에 걸어서 말린 후 다시 입었다. 내학원에 있을 때에도 일년내내 바지 1개였는데, 어떤 때는 갈아입을 수 없어서, 다리를 내놓고 바깥에 장삼 하나를 걸치고 다녔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그에게 '공공도인(空空道人)'이라는 별명을 지어 주었다"
비록 가난했지만, 웅십력의 광망함은 어릴 때 못지 않았다. 1932년, 10년의 사고와 축적을 거쳐, 웅십력은 그의 학술적인 기초를 닦은 작품인 <<신유식론(新唯識論)>>을 내놓는다. 이는 국내외에 유명하게 된 '신유식론'이라는 철학체계의 탄생을 알리는 것이었다. 책의 서명도 거의 미치광이 수준이었다: "황강웅십력조(黃岡熊十力造)" 불경에서 서명이 "모모보살조(造)"인 것과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이 책이 나오자, 즉각 불교계 특히 동문제자들의 격렬한 공격을 받는다. 그의 스승인 구양경천도 읽어본 후 통언(痛言)을 했다: "성인의 말은 다 버리고, 오로지 자진(子眞, 웅십력의 호)이 최고라는 것이구나" 말은 엄중했다. 반격을 위하여, 구양경천의 제자인 유형여경은 <<파신유식론(破新唯識論)>>이라는 글을 써서 웅십력의 책에 대하여 하나하나 반박했다. 그리고 웅십력이 '유식학을 거의 전혀 모른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그의 책은 '중국 유가 도가 양가의 뜻을 취하고, 또한 인도의 좌도방문의 논리를 취하여 불법을 논했으니, 엉터리이다"라는 내용이었다. 웅십력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즉시 응전하여, <<파파신유식론(破破新唯識論)>>이라는 책을 써서 유씨의 공격을 하나하나 막아냈다. 웅십력의 사문과의 이 논쟁은 계속 가라앉지 않았다. 1942년, 구양경천의 병이 위중하여, 웅십력이 병문안을 갔을 때도, 동문들은 그를 문안으로 들이지 않았을 정도이다.
불학계의 사람들과는 반대로, 채원배(蔡元培), 마일부(馬一浮)등 학술계인사들은 웅십력을 아주 높이 평가했다. 다만, 웅십력은 학술계인사들에 대하여도 공격을 아끼지 않았다. 심지어, "당금의 세상에, 주나라의 제자에 대하여 강의할 수 있는 것은 나 웅모가 능히 할 수 있을 뿐, 다른 사람들은 다 헛소리이다" 동시대의 유명한 학자인 양수명(梁漱溟)이 학문상의 문제로 웅십력과 논쟁이 벌어진 적이 있다. 논쟁이 끝난 후, 웅십력은 양수명이 몸을 돌리려는 찰나에 따라가서 양수명에게 주먹을 3대 날린다. 그리고 입으로 그에게 "멍청이"라고 소리친다. 양수명은 웅십력의 성격을 잘 알았으므로 대꾸하지 않고 그냥 가버렸다. 이같은 '에피소드'는 이 외에도 많다. 소설가인 폐명(廢名)과 웅십력은 같은 고향사람이다. 두 사람은 한께 부처를 논하기도 하였는데, 자주 의견이 달라서 얼굴을 붉히면서 싸웠다. 한번은 두 사람이 불학을 토론하다가, 의견이 맞지 않아서, 크게 싸우게 되었는데, 한창 논쟁이 긴박하다가, 바깥에서 들으니 안쪽이 갑자기 조용해 졌다. 황급히 안으로 들어가보니 두 사람은 이미 뒤엉켜 싸우고 있었고, 서로 상대방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이 싸움은 여러가지 버전으로 전해진다. 어떤 버전에서는 두 사람이 탁자 아래에서 뒹굴면서 싸웠다고 하고, 어떤 설에 의하면, 웅십력이 화장실에 앉아 있을 때 싸웠다고도 한다. 또 어떤 사람은 웅십력이 폐명을 당하지 못해서 문밖으로 밀려났으며, "욕을 하면서 도망쳤다"고도 한다. 어쨌든 싸우긴 싸운 것이다. 다음 날, 폐명은 다시 웅씨 집으로 달려갔고, 웅십력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토론을 시작했다고 한다.
나홀로정신: 장개석의 요청을 두번 거절하다.
웅십력의 학식은 나중에 장개석도 인정을 한다. 1940년대, 장개석 시종실에서 일하고 있던 서복관은 장개석의 위임을 받아, 웅십력을 만나러 간다. 그에게 100만위안짜리 수표도 들고 갔다. 생각도 못하게 웅십력은 서복관에게 큰 소리로 질책했다: "빨리 꺼져라. 장개석의 주구, 왕빠단, 내가 어찌 그의 돈을 쓸 수 있는가? 빨리 갖고 꺼져라!" 그래도 장개석은 포기하지 않고, 나중에 다시 두번이다 큰 돈을 보내어 그를 위하여 연구소를 만드는 자금으로 쓰게 해준다. 웅십력은 모두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당국에서 나라의 원기를 배양하고자 한다면, 가장 좋은 것은 나를 내맘대로 하게 가만히 놔두는 것이다"
1949년이후, 웅십력의 성격은 예전이나 똑같았다. 스스로를 개조하려고 하지 않았다. 여러차례 모택동에게 편지를 써서 철학연구소를 건립해서 구학을 전파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다만, 웅십력의 많은 저작은 여전히 유물론의 결점을 비판하는데 있었으므로, 점점 '반동복고주의'로 비판을 당하게 된다. "문혁"이 시작된 후, 웅십력은 모주석상을 걸지 않고, 그저 공자, 왕양명, 왕선산(王船山, 王夫之)의 좌상을 놓고, 매일 절을 했다. 좌경의 분위기가 점점 심해지는 나날에 웅십력은 점점 더 고독함과 미망을 느낀다. 그는 확실히 늙어버린다. 눈빛도 예전처럼 빛나지가 않았고, 말하는 것도 예전처럼 시원스럽지가 못했다. 정서도 예전처럼 열정적이고 격앙되지 않았다. 자주 홀로 탁자곁에 앉아서, 눈앞에 백지를 가득 쌓아두고, 손에는 붓을 쥐고는 그저 몰두해서, 모든 정신을 붓끝에 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글을 쓰지는 못하고 그냥 오랫동안 앉아만 있었다.
나중에 집안이 몰수당하고, 비판을 받게 되면서, 웅십력의 정신은 약간 착란현상이 나타난다. 계속 중앙지도자에게 편지를 썼다. 바지와 양말의 위에도 문혁을 항의하는 글을 썼다. 그는 자주 퇴색한 장삼을 입어는데, 단추가 하나도 없었다. 허리에는 아무렇게나 밧줄을 묶어서 홀로 길거리를 나가거나 공원을 다녔다. 여기저기 부딪치며 두 눈에 눈물을 흘렸다. 입으로는 "중국의 문화가 망했다" "중국의 문화가 망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도시의 사람들은 아무도 그를 신경쓰지 않았다. 아무도 그가 말하는 것을 듣고도 놀라지도 않았다.
1968년 5월 23일, 웅십력은 폐염에 심신이 피로하여, 상해홍구의원에서 병사하니, 향년 84세이다. 일대의 광세기재가 많은 문화인들과 마찬가지로, 잔혹하게 문화대혁명의 탁류에 휩쓸려 매몰된 것이다.
자신에 대하여 웅십력은 이렇게 변명한 바 있다: "사람들이 나보고 외롭고 차갑다(孤冷)고 하는데, 나는 사람이 극도로 외롭고 차갑지 않으면, 세상과 화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근본학술에 뜻을 둔 자라면 당연히 홀로간다는 정신을 가져야 한다" 이 두 마디는 아마도 웅십력이 자기의 인생을 가장 잘 개괄한 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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