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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민국 후기)

송씨삼자매의 이름에 관한 세가지 자료

by 중은우시 2009. 3. 19.

글: 적화(翟華)

 

송씨삼자매는 중국근대사상의 전설적인 인물들이다. 중국인들은 그녀들의 경력을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그녀들의 이름이 도대체 무엇일까라는 가장 기본적인 사실조차도 잘 모르고 있다. 오늘 필자는 여기에서 송씨삼자매의 이름에 대한 세 가지 사실과 그녀들의 이름의 내력에 관한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하고자 한다.

 

자료1: 1908년, 그녀들의 이름은 송애림(宋愛林), 송경림(宋慶林), 송미림(宋美林)이다

 

미국 조지아주의 Macon Wesleyan College의 자료실에서는 1908-1909년도 학생등록부를 찾아볼 수 있다. 1908년 9월 5일 송씨삼자매는 친필서명을 했는데, 거기에는 중문성명, 영문성명, 나이가 기록되어 있다:

 

 

 

 

이 자료를 보면, 송씨삼자매는 1908년때의 중문성명이 각각: 송애림(宋愛林), 송경림(宋慶林), 송미림(宋美林)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영문이름은 E. Ling Soong, Ching Ling Soong, May Ling Soong이다. 나이는 각각 18세, 15세 10세였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송애령의 애(愛)자이다. 번체자인 애(愛)가 아니라 간체자인 애(爱)로 적혀 있다(번체자와 간체자의 차이는 가운데 마음심(心)이 있느냐 없느냐에 있음). 당시 삼자매의 이름에는 모두 "림(林)"자가 들어 있었다. 이러한 이름을 썼다는 또 하나의 증거는 바로 1907년 송경령이 출국할 때 청나라 상해도태가 발급한 여권이다. 여권의 중문성명은 바로 "송경림(宋慶林)"으로 되어 있다.

 

 

 

 

자료2: 1915년, 그녀들의 이름은 송애림(宋愛琳), 송경림(宋慶琳), 송미림(宋美琳)이다.

 

1912년 4월 16일 상해의 <<민립보>>에는 <<손전총통지행기>>라는 글이 올랐다. 거기에는 "손군의 동행으로 왕정위, 호한민의 제군과 그의 남녀공자 및 송애림(宋愛琳)여사가 있다"라고 적고 있다. 1913년 3월 20일의 <<민립보>>에는 일본동경에서 보낸 같은 달 19일자 특전을 실었는데, "손중산선생부인(노모정부인을 얘기함)과 송애림(宋愛琳)여사등이 자동차에서 떨어져 상처를 입었다. 큰 문제는 없으나, 송여사의 상세가 가장 중하다"라고 쓰고 있다. 이 소식에서의 "송애림여사"는 당연히 1910년 귀국한 송씨삼자매중의 큰언니를 말한다. 당시에 손중산의 영문비서로 있었다. 1915년 손중산과 송씨집안의 둘째딸과 결혼할 때 결혼서약서가 있는데, 이 서약서에 송씨 둘째딸의 이름은 "송경림(宋慶琳)"이라고 적혀 있다.

 

 

 

 

비록, 송씨 셋째딸의 이름에 대하여는 직접적인 증거가 없지만, 중국의 습속이나 큰딸, 둘째딸이 "림(林)"에서 "림(琳)"으로 바꾸었다면, 셋째딸의 이름도 같이 바뀌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1915년을 전후한 때의 송씨 셋째딸의 이름은 당연히 송미림(宋美琳)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자료3: 1928년, 그녀들의 이름은 송애령(宋齡), 송경령(宋慶齡), 송미령(宋美齡)이다.

 

1932년 8월, 송씨형제자매 6명은 사망한 부모를 위하여 비석을 세운다. 이때 세자매의 이름은 바로 송애령(宋齡), 송경령(宋慶齡), 송미령(宋美齡)이었다.

 

 

 

 

여기서 설명할 것은 현재의 묘비는 1981년에 새로 세운 것이다. 원래의 묘비는 이미 문화대혁명때 파괴되었다. 당시 송경령은 부모의 묘지가 훼손되었다는 것을 알고 난 후에 요몽성에게 위탁하여 묘지사진을 등영초를 거쳐 주은래에게 보내게 한다. 주은래는 상해에 송씨묘지를 원상회복시킬 것을 지시한다. 다만 비문은 "송가수예계진지묘, 송경령립(宋嘉樹倪桂珍之墓, 宋慶齡立)"으로 바꾸게 한다. 송씨의 나머지 자녀들의 이름을 삭제해버리게 한 것이다. 1981년 4월, 송경령의 동의를 받아, 상해시인민정부는 만국공묘내의 송씨묘지에 대하여 원상회복을 시키고, 역사의 원래모양대로 묘비를 새로 세운다. 그리하여 묘비에 송씨형제자매의 성명도 당시의 원래 모양을 회복하게 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묘비에 쓴 첫째딸의 이름이다. 바로 "송애령(宋齡)"으로 되어 있다. 현재 매체에서 널리 사용되는 "송애령(宋靄齡)"이 아닌 것이다. 만일 송씨 첫째딸이 이전에 "애림(愛林)", "애림(愛琳)"이라는 이름을 썼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화애(和)"의 "애()"가 더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아지랑이를 나타내는 "애(靄)"가 아니라.

 

이상의 사실은 송씨삼자매의 이름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다만, 송씨삼자매가 왜 이처럼 여러번 이름을 바꾸었는지를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이것은 후세의 역사가나 문인들이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둔 것이다. 송씨삼자매의 평전에서 한가지 견해가 널리 알려져 있다. 송씨삼자매는 일찌감치 "림(林)"자를 항렬로 써서, 송애림(宋林), 송경림(宋慶林), 송미림(宋美林)으로 했다는 것이다. 이는 송씨삼자매의 부친이 어려서 미국으로 이민을 갔는데, 나중에 교회에서 그를 교육시키고 길러주어 신학원까지 졸업하게 된다. 다시 교회는 그를 중국으로 파견하여 전도하게 하였다. 그가 미국에서 생활하던 청소년기는 1860년대였다. 당시 미국대통령 링컨(중국식으로 林肯)은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흑인노예를 해방시켰다. 송씨삼자매의 부친은 그를 아주 숭배했다. 그리하여 그의 세 딸에 모두 "림(林)"자를 붙였다. 이것은 중국의 전통적인 여자아이들의 이름을 짓는 습관에는 어긋났다. 그리하여 다시 "림(林)"을 "림(琳)"으로 고쳤다. 그리하여, 세 자매의 이름은 송애림(宋琳), 송경림(宋慶琳), 송미림(宋美琳)이 된다. 또 어떤 사람은 송요여(宋耀如, 찰리송, 송씨삼자매의 부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낸시 아리린(愛琳)이라는 여자아이와 사랑에 빠진 적이 있다고 한다. 송요여는 귀국한 후에도 그녀와 자주 연락하고 서로 사랑을 나누었다. 1886년 그녀는 병으로 사망한다. 그러자 송요여는 한동안 비통해 한다. 그래서 나중에 딸이 태어났을 때, 부친은 그녀의 이름을 "애림"이라고 지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링컨을 존경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그의 옛 연인에 대한 그리움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 버전에 따르면, 1904년 송애림이 부친을 모시고 당시 97세된 심육계(沈毓桂) 노인을 찾아간다. 심육계는 일찌기 <<만국공보>>의 주필을 맡은 바 있고, 경륜과 학식이 대단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송애림의 이름을 듣고난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애림은 서양인의 이름이다. 우리 중국인은, 중국식의 이름을 가져야 한다." 송요여도 그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에게 이름을 지어달라고 부탁한다. 심육계는 "여성의 이름은 당연히 문아(文雅)해야 한다. 애(愛)를 애(靄)로 고치고, "림(琳)"은 "령(齡)"으로 고치면 좋겠다. "애(靄)"와 "애()"는 서로 통용될 수 있으니, 사마상여의 <<장문부>>에도 '망중정애애혜(望中庭兮)'라는 문구가 있다" 이때부터 "애림(愛琳)"은 "애령(靄齡)"으로 바뀐다. 큰딸의 이름이 바뀌자, 아래의 두 여동생의 이름도 "경령(慶齡)", "미령(美齡)"으로 바꾸게 된다. 이런 주장은 언뜻 보기에 합리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시간적으로는 전혀 맞지 않는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1908년에는 송씨자매의 이름이 여전히 송애림(宋愛林), 송경림(宋慶林), 송미림(宋美林)이었고, 1915년을 전후하여 세자매의 이름이 송애림(宋愛琳), 송경림(宋慶琳), 송미림(宋美琳)으로 바뀌었다.  다만, 위의 이야기에서는 심육계노인이 1904년에 바꾸어 주었다는 것인데, 이는 사실과 전혀 들어맞지 않는다. 심육계 노인은 1907년에 돌아가셨고, 당시에도 송씨삼자매는 아직 이름을 고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송씨삼자매의 이름중 "림(琳)"자가 언제 "령(齡)"자로 바뀌었는지에 대하여 손중산의 외손녀인 대성공(戴成功, 1922-1991)은 또 다른 견해를 편다. 그녀의 외할머니인 노모정 부인이 말한 바에 따르면, 이전에 이름은 확실히 경림(慶琳)이었다는 것이다. 나중에 손중산이 경령(慶齡)으로 바꾸어 주었다는 것이다. 비록 대성공이 송경령의 친척이기는 하나, 그녀의 주장은 의문이 든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세자매중 둘째가 먼저 솔선하여 개명한 다음 첫째, 셋째를 모두 개명하게 하는 일은 드물기 때문이다. 다만, 손중산에게는 국부라는 지위가 있었으므로,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긴 하다. 1922년 진형명의 반란때 손중산부부는 위험에서 빠져나온 후 손중산은 그의 처를 위하여 시를 지었는데, 이때는 이미 "경림(慶琳)"이 "경령(慶齡)"으로 바뀌어 있었다.

 

 

 

 

송경령 본인이 "림(琳)"자에 대하여 해석한 적이 있다. 1962년, 중국역사박물관은 북경시민 장면지의 수중에서 손중산 선생과 송경령이 일본에서 결혼할 때의 서약서를 구매했다. 감정할 때, 전문가는 세 가지 의문을 제기했다: 첫째, 왜 서약서에 쓰여진 일자가 "1915년 10월 26일"인가? 역사가들이 알고 있는 결혼일자인 10월 25일이 아니다. 둘째, 왜 송경령의 이름에 "림(琳)"자로 서명했는가? "령(齡)"자가 아니고. 셋째, 왜 송경령은 도장을 찍지 않았는가? 그리하여 이 박물관은 8월 11일, 서신을 보내어 송경령 부주석에게 진위여부에 대하여 확인을 요청했다. 동시에 서약서의 원본크기의 사진을 한 장 첨부해서 보냈다. 8월 20일, 송경령 부주석은 그녀의 비서실을 통하여 서면답신을 보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중국역사박물관앞:

 

이번달 11일 귀관에서 송부주석에 보낸 서신 및 첨부한 손중산선생과 송부주석이 일본에서 결혼할 때의 서약서 사진 1장은 받아보았다.

 

송부주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서약서는 진짜이다. 바로 손중산 선생과 송부주석이 1915년 10월 25일 일본 동경에서 결혼할 때, 일본의 변호사 화전서(和田瑞)가 동경시정부에서 결혼등기절차를 취할 때 서명한 법률상의 서약서이다. 다만 일본풍속으로는 짝수일이 좋은 날이므로, 변호사의 건의를 받아들여, 25일을 26일로 고쳐썼다. 항일전쟁기간동안, 상해의 "손중산고거"에 있던 손중산선생과 송부주석의 결혼서약서 2부는 일본군벌이 약탈해 갔다. 아마도 이것은 그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러므로, 송부주석은 첨부로 온 것을 기념으로 남긴다. 이에 회신하고, 사의를 표한다.

 

송경령부주석 주택비서실 1962년 8월 20일

 

송경령은 비록 이 결혼서약서가 진짜라고 인정했지만, 역사박물관이 제기한 두 가지 문제에 대하여는 대답하지 않았다. 1980년 중국역사박물관은 <<손중산송경령혼인서약>> 원본을 송경령에게 보내어 그녀의 서명을 부탁했다. 그리고 해결되지 않은 둘째, 셋째 의문에 대하여도 대답을 요청했다. 송경령은 다시 한번 말미의 여지에 "이것은 진품이다(此系眞品)"이라고 네 글자를 써주었고, 서명날인했다.

 

 

 

 

얼마후, 송경령의 비서실은 서약서원본을 중국역사박물관에 되돌려주었고, 첨부한 서신에서 아래와 같이 설명했다:

 

서약서상의 일자인 10월 26일은 일본의 습관에 따라 짝수일을 길일이라고 보고 쓴 것이다. 결혼일자는 실제로 10월 25일이다. 송부위원장이 혼인서약서상에 "림(琳)"자를 쓴 것은 "림(琳)"자가 쓰기 쉽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에서 일본으로 갔는데, 찍을 도장이 없었다.

 

송경령비서의 위의 설명은 마치 송씨삼자매의 이름이 원래부터 "령(齡)"인 것처럼 되어 있다. "림"으로 쓴 것은 그저 쓰기 편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답변은 앞의 세 가지 사진자료와 맞지 않는다. 송씨삼자매의 이름의 유래를 설명해주지 않을 뿐아니라, 의혹을 더욱 키워놓았다. 이에 관해서 대담하게 가설을 제시해보면, 송씨삼자매의 출생시 부모가 지어준 이름은 바로 "애령(齡)", "경령(慶齡)", "미령(美齡)"이었다. 그러나 필획이 너무 많고 쓰기가 어려워서 삼자매는 어렸을 때는 "애림(愛林)", "경림(慶林)", "미림(美林)"이라고 썼고, 나중에 자라면서 "애림(愛琳)" "경림(慶琳)" "미림(美琳)"으로 쓰다가 부잣집마나님, 국모, 퍼스트레이디가 된 이후에 원래의 이름인 "애령(齡)", "경령(慶齡)" "미령(美齡)"을 다시 쓰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